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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이미지 p23-26

by 어정버정 2024. 9. 8.

생존한 이미지 

 

따라서 인류학은 미술사를 대체/전위하고 낯설게 이화(異化)하며, 심하게 말하면, 불안하게까지 한다. 관점이 없는 다방면 절충주의적인 학제 간 학문으로 흩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문 내에서 대규모로 검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드넓게 열기 젖히고 닿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이미지를 구성하는 관계와 결정, 더 나아가서는 과잉결정의 극단적인 복잡성을 공정하게 숨김없이 다루는 문제이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관계의 특수성 그리고 이미지 자체가 구성 요소인 일정 양식의 작업에 대한 새로운 공식을 제공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바르부르크를 역사적 사실과 도상학적 내용의 발견에만 유일한 관심을 둔 사람, 대량 생산된 이미지와 유일무이한 걸작을 구별하지 못하는 소위 반형식주의자로 보는 일은, 아쉽게도 자주 일어나지만, 완전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오히려 그가 시도한 일은,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인 므네모시네 아틀라스가 분명히 증명하듯이, 두드러진 특이 사례/특이점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와 이러한 특이 사례들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살아가도록 해준 관계들의 인류학적 접근을 항상 결합함으로써, 연결과 형식적 효능의 문제를, ‘스타일의 문제를 다시 형식화하는 것이었다.

바르부르크가 당대의 인류학에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미술사학자로서 자신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뀔 수 있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데도 책 한 권이 따로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전문화된 민족지학적 연구들과 웅대하고 철학적으로 영감을 받은 체계를 포괄하는 방대한 분야를 아울러야 되기 때문이다. 특히나 헤르만 우제너의 사상이 그에게 미친 실질적인 영향을 재구성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바르부르크가 1886년과 1887년 본에서 수강한 그의 강좌나 종교적 신념들의 형태학을 확립하고자 했던 우제너 목표는 바르부르크의 방법론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는 바르부르크가 르네상스 프레스코화 연구에서 곧 적용하게 되듯이 똑같은 마음 자세로 고대 신화에 접근하여 언어학적 탐구를-세부 사항, 특정 구체적 사항, 특이점들에 대한 요소들로- 심리학 및 인류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하였다. 예를 들어, 그리스 운율학의 형식을 연구하면서 우세너는 이를 중세 음악 시대까지 생존을 모색하는. 전반적 문화의 증상으로 이해했고, 반대급부로 믿음의 행동들은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모든 경우에 언어학자의 도구로 다뤄야 하는 형식들로 접근했다.

혹자는 빌헬름 분트가 그의 거대한 대작 민족심리학Völkerpsychologie에서 시도한 지나치게 일반적인 이미지 인류학에서 바르부르크가 무엇을 차용하였는지 찾을 수도 있다. 또는 바르부르크가 루시앙 레비-브륄을, 예를 들어 참여의 법칙’, ‘죽은 자의 생존’, ‘원시 사고방식에서 인과성 개념과 관련하여, 참조한 부분을 추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르부르크가 당대의 인류학에 빚진 것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상호적으로, 인류학 일반과 특히 역사 인류학이 이러한 유형의 접근 방식에 무슨 덕을 보았는지 물어야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물론 주로 기나긴 두 차례의 세계대전 세월과 연계된 역사적 이유때문에-프랑스 학계는 특히나 이 독일 전통유파에 대해 무지를 드러냈다. 마르셀 모스(Mauss)가 그러나 아주 자세히 읽었던 헤르만 우세너는 장 피에르 베르낭과 마르셀 데티엔에게 생판 모르는 이었다. 바르부르크의 경우 실증주의 미술사학자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에 동조하는 역사가들, 심지어 아날Annales’ 학파의 최고 학자들에게도 무시당했다. 따라서 자크 르 고프는 아낌없이 역사 인류학의 창조에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에게만 그 공로를 돌렸고, 또한 후자의 기적을 행하는 왕들Rois thaumaturges에서 도상학적 자료”[“dossier iconographique”]로 겨우 10페이지 정도밖에 없다는 점을-그것도 아주 분석적이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미술사의 혁신은 오늘날 역사 연구의 우선순위 중 하나라고 결론지었다.

오늘날 바르부르크를 다시 읽으려면 관습적인 시각을 반대로 뒤집어야 한다. 그가 미술사를 실행하는 방식, 미술사를 완전개방하는 방식은 아주 까다롭고, 급진적이어서, 내가 보기에는, 이미지의 상징적 효능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역사 인류학-야콥 부르크하르트와 헤르만 우제너로부터 물려받은 형태에서 그가 고안해 낸 학문-의 질문을 새롭게 제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상상계(imaginaire)’의 영역에서 전반적 역사학이 제기하는 '새로운' 질문에 기초하여 재게 일신一新해야 하는 것은 미술사가 아니라, 역사학 그 자체의 역사에서 어느 주어진 순간에 '지도적' 개념, '참신함'이 이미지에 내재된 힘에 대한 구체적인 특정 사고 방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 것은 역사학 그 자체이다.

사실 바르부르크에게 이미지는 총체적인 인류학적 현상을 구성하며, 그 역사에서 어느 주어진 시점의 '문화'(Kultur)가 무엇인지 그 응축 혹은 특히 중요한 결정체를 이룬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바르부르크에게 소중한 이미지의 신화-시적 힘”(die mythenbildende Kraft im Bild)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감정적 공식들”-‘파토스포멜른Pathosformeln/정념공식’, 고전적 고대의 시각적 공식에 의존한 예술가들을 통해 묘사에서 심화된 몸짓들-에 관한 그의 연구에서 그의 연구 지향점에 사회적 모방, 안무, 의복의 유행, 축제 중 행실, 사람들이 서로 인사하는 방식을 지배하는 규범과 같은 그런 주제로 향하는 그의 연구를 지향점에 학제적모순이 없다고 느낀 이유이다.

요컨대, 이미지는 한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 방식(agir)과 전반적인 동작과 구분해서는 안 되고, 한 시대의 지식과 사고방식(savoir)에서도, 그리고 물론 신념과 믿는 방식(croire|)과도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바르부르크적 독창성의 또 다른 필수 요소가 있다. 예술사를 이미지의 마법적 효능을 지닌 암흑 대륙에 열어젖혔을 뿐만 아니라 전례적, 법률적, 정치적 효능에 활짝 개방했다. “이러한 형식들을 이데올로기적 격렬한 논쟁의 어스름 중간지대에서 끌어내어 철저한 역사적 정밀조사를 받게 하는 것은 예술사(Kunstgeschichte)의 주요 의무 중 하나이다. 스타일과 문명-르네상스 유럽 문화 전반에 대한 고대의 영향-의 역사에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eine der Hauptfragen der stilerforschenden Kulturwissenschaft) 있는데, 다른 방법으로는 완전히 이해되고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끄러져 하락하는 어휘는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미술사(Kunstgeschichte)에서 문화 과학(Kulturwissenschaft)으로 이동하며, 이러한 움직임은 동시에 연구 대상의 영역을 활짝 열고 근본적인 문제를 명확한 표현 어구로 갈고 닦는다. 예를 들어, ‘쿤스트게쉬흐테 (미술사 Kunstgeschichte)’초상화라는 순수미술 장르는 르네상스 시대에 개인의 인본주의적 승리와 모방 기술의 진보 덕분에 등장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르부르크의 쿨트르비센샤프트Kulturwissenschaft’는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하는데, 이는 고대와 이교의 마법(로마 이마고imago(형상)의 생존)과 중세와 기독교 전례(묘형의 형태로 바치는 봉납물 관행)와 또한 15세기 시대의 예술적, 지적 활동의 특정 상황을 포함하는 교차점- 얽힘, 과잉결정-의 훨씬 더 복잡한 시간이 수반된다. 그 결과, 초상화는 우리 눈앞에서 변모하고, 바사리식 미술사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본성을 드러낸 신화 창조의 힘의 인류학적 뒷받침이 된다.

따라서 바르부르크가 젊은 시절 간절히 바라던 “'예술의 과학쿤스트비센샤프트는 비특정적이고 한없이 개방적인 쿨투처비센샤프트(문화학)’의 틀 안에서 특정 이미지의 조사하는 모양새를 갖춘다. 예술사학자 관심을 끄는 대상의 영역을 활짝 개방할 필요가 있는데, 예술 작품은 자신의 역사에 완전히 둘러싸인 대상으로 더 이상 보지 않고, 오히려 이질적이고 과도결정된 역사적 요소들의 역동적인 만남의 지점-발터 벤야민은 이를 나중에 번쩍하는 번개라고 칭했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필연적인 일이다. 에드거 윈드는 바르부르크의 문화사 개념에 관 권위있는 한 소논문에서 “[기교 뛰어난 예술적] 이미지라도 이를 종교와 시, 추종 및 드라마와의 엮인 유대를 떼어내려는 시도는 그 자체의 생명줄을 끊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적었다. 이미지의 자율/독자적인 역사라는 개념은 뭐든 반박하며, - 그렇다고 해서 이미지의 특정한 형식적 특질들을 무시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 바르부르크의 쿨투처비센샤프트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역사가 발생하고 있는 시간을 활짝 열어준다’. 바르부르크는 자신의 도서관 입구 문 위에 기억을 뜻하는 그리스어 '므네모시네'를 대문자로 새겨 넣어 방문객에게 다른 시간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