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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기 없는 짓/the museum of unconditional surrender10

the museum of unconditional surrender p140- 리스본에서 하룻밤 리스본과 관련하여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처음으로 머물러야 했던 시절에, 레마르크의 오래된 소설 제목 ‘리스본에서 하룻밤’이다. 레마르크의 소설은 이미 잊힌 시대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그리고 ‘유효한 패스포트가 전부’이던 시절을 다룬다. 내가 독일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서베를린 사무실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며 그런 뒤 작은 포르투갈 영사관 동베를린 사무소에서 두어 시간 죽이며 손에 레마르크의 소설을 들고 있다 그 구절을 마주쳤다. 비자로 알록달록 장식이 잘 된 내 여권에 잘 생긴 포르투갈 비자는 꽤나 전망이 밝아 보였다. 나는 리스본으로 엄청난 양의 짐과 함께 여행했다. 아니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지만 완전히 짐은 하나도 없이 여행했다. 나는 고국을 잃었고 이 상실이 아직은 길이 들지.. 2023. 4. 1.
the museum of unconditional surrender 2019-5-19 44. 미로슬로프 크리에차, 크로아티아 작가는 1925년 러시아로 가던 길에 잠깐 베를린에 멈췄다. 그달 베를린 사람들이 많이 찾은 구경거리는 고래 시체 전시였다. ‘베를린은 로저반더바이덴(화가) 공단과 헤에르트겐(네덜란드 화가) 마지팬 만 사랑하는 도시가 아니다. 고상한 족속들, 이집트 청동, 뒤러의 판화의 도시만이 아니라 고래의 도시기이기도 하다. 24미터 길이의 고래가 상퀼로트(sans-cullotte, 프랑스 혁명시 과격 하층민들)과 상놈들을 위한 기적처럼, 황제의 궁전 앞에 슈프레 강 위, 나무 뗏목에 전시되어 있다.’ 2023. 4. 1.
the museum of unconditional surrender p98- 2019-05-09 page 98 32. ‘시간 좀 낼 수 있어요?’ ‘아니요, 왜 물으세요?’ 시셀(Sissel)이 말한다. 시셀은 지도, 자, 컴파스, 세계의 나라와 그 바다들에 편집증이 있는 예술가이다. 시셀은 세계 지도들을 사서 바다를 오려내고 이 바다들을 자잘한 조각으로 자른다. 그리고 이 자른 조각들을 다시 한 표면이 되도록 붙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그 자신의 지리적 감각을 따른다. 바다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으면 그녀는 종이쪽들에 구멍을 내고 한 줄로 이를 빨래처럼 쭉 꿴다. 이 구멍들에 빛이 통과하면 시셀은 이 작은 별이 빛나는 조각 하늘에 넋이 나가 몇 시간이고 쳐다보고 있다. 시셀이 구멍을 내고 있지 않은 때면 달궈진 다리미로 종이조각에 자국을 내고 있다. 이 자국들은 물론 지도.. 2023. 4. 1.
the museum of unconditional surrender 79- 2019-05-08 page 79 인용 ‘기억은 내 생각에 진화의 과정 중에 영원히 우리가 잃어버린 꼬리의 대체물이다. 이는 이동을 포함하여, 우리의 방향을 조종한다. 그런 점 외에 회상의 바로 그 과정에는 그런 과정이 절대 일직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분명 인간 본래적인 무언가가 있다. 또한 기억을 더 할수록 아마 더 가까운 것들이 죽게 마련이다. 상황이 이런 식이라면 기억을 헛딛는 것은 좋은 일이다. 꼬리가 그러듯이 대개 하지만 감기고 되튀고 사방으로 빗나간다. 사람의 서술도 조리가 닿지 않고 지루하게 들릴 위험이 있긴 해도 그래야 한다. 지루함은 어쨌거나 가장 자주 접하는 존재의 면모 아니던가. 그렇게나 열심히 현실주의를 분투했던 19세기 산문을 왜 그렇게 형편없이 대하는지 궁금하다. 마음 속 아.. 2023. 4. 1.
the museum of unconditional surrender 50- 2019-05-06 Dusan Djukaric 3. 오늘 내게 필요한 것은 책 한 권이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나는 운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붉은 산호처럼 묵직한 슬픔이. -빅토르 슈클로프스키, 제3 공장 page 50 ‘여기 있다.’ 엄마는 내게 숙제라도 내밀고 있기라도 하듯 무심히 말했다. 오랫동안 나는 꽃무늬 공책을 건드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연다는 생각 자체가 마음이 아렸다. 그러다 하루는 아무튼 이를 열었고 이미 열린 상처 그 페이지들이 흩뿌린 것들은…소금이었다. 나는 문장들을 씻고 껄끄러운 부분과 진흙들을 제거하고, 손수건에 침을 뱉어 내 자신의 침으로 이를 씻어 내렸다. 이제 내 손바닥 안에 엄마가 사용하지 않은 단어들(어머니는 ‘shaft’대신에 ‘draught’적었다. .. 2023. 4. 1.
the museum of unconditional surrender 33- 2019-05-03 page 33 II 꽃무늬 표지의 공책 그리고 그가 직접 저민다. 그는 그 씨앗들을 특별한 종이조각에 주워 모아 먹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갑카에게 잉크를 가져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씨앗을 담고 있는 종이에 내용을 적어 넣는다. ‘이 멜론은 모월모일 먹었다.’ 혹시라도 손님이라도 같이 있었다면, ‘모모씨가 참여했다.’ -V. N 고골 ‘어떻게 이반 이바노비치는 이반 니코포로비치와 싸웠나’ 1986년, 어둑하고 먼지투성이 고미다락의 판자 마룻장을 짚어 모스크바에 속한 화가 일리야 카바코프의 스튜디의 빛 들어오는 공간에 어느새 들어있을 적에 나는 마음속으로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절’을 했다. 나는 인정받지 못한 쓰레기의 왕,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 2023. 4. 1.
the museum of unconditional surrender 13 2019-05-03 part 2 가족 박물관 I (page 13) 앨범의 시학 현시대는 향수의 시대이고 사진들은 적극적으로 향수를 조장한다. 사진술은 애수 어린 예술, 황혼의 예술이다. 사진으로 찍은 대부분의 주제들은, 그냥 사진으로 찍혔다는 점 때문에, 파토스, 연민을 자아낸다. 꼴사납거나 섬뜩한 주제가 사진사의 주목으로 위엄을 갖추게 되었기에 감동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아름다운 주제는 나이를 먹거나 퇴락하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회의 감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사진을 찍는 일은 다른 사람의 (혹은 물건의) 필멸성, 취약성, 변덕스러운 변화에 참여하는 일이다. 정확하게 이 순간을 잘라내어 동결시키는 일, 모든 사진들은 가차 없이 녹아내리는 시간을 증명한다. -사진술에 관하여, 수전.. 2023. 4. 1.
the museum of unconditional surrender 7- 2019 5-02 14 애초부터 내 지인인 S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녀는 간호사 교육을 완수했고 마을 끄트머리 정신박약 소아병원에 일을 구했다. ‘좋게 끝맺지 못할 거야.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압지처럼 빨아들여.’ 그녀가 말했다. 병원에서 그는 작은 개인적인 행복을 발견했다. 남자 간호사, 그녀보다 훨씬 젊은, 남들보다 한참이나 작은 남자였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광택을 낸 작은 신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기억이 난다.) 그의 성조차 자소사(diminutive)형이었다. 상당히 늦은 나이에, 그녀는 임신을 했고, 둘 다 당뇨를 갖고 있는 데도 밀고 나가 보자고 결정했다. 그녀는 (쌍둥이를 임신해) 만삭에 이르렀고, 그러다, 출산 예정일 하루 전에 태중의 아기들은 질식사했다. 지.. 2023. 4. 1.
the museum of unconditional surrender 3- 2019 5-2 page 3 part 1 ich bin müde 1 ‘Ich bin müde(나는 지쳤어)’하고 나는 프레드에게 말한다. 슬픔 가득한 창백한 얼굴이 활짝 웃음으로 길게 벌어진다. ich bin müde가 그 순간에 내가 아는 유일한 독일어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더 이상은 배우고 싶지 않다. 더 배운다는 것은 마음을 터놓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당분간은 한참까지 닫아 놓고 싶다. 2 프레드의 얼굴을 보면 옛날 사진의 인물이 떠오른다. 프레드는 러시안 룰렛을 불행하게 사랑하는 젊은 장교처럼 보인다. 나는 한 백 년 전쯤 부다페스트 식당에서 온밤을 지새우는 그를 상상해본다. 애절하게 긁어대는 집시 바이올린은 그의 창백한 얼굴에 가벼운 떨림조차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아주 가끔씩만 그의 두.. 2023. 4. 1.
무조건 항복 박물관 1999 Dubravka Ugresic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 베를린 동물원에, 살아있는 바다코끼리가 들어 있는 못 옆에 범상치 않은 전시물이 있다. 그 유리장 안에 1961년 8월 21일 죽은 바다코끼리 롤란트의 뱃속에서 발견된 모든 물품들이다. 아니, 더욱 엄밀히 말해, 분홍색 담배 라이터 하나, 아이스크림 (나무) 막대 4개, 푸들 모양의 금속제 브로치 하나, 맥주병 따개 하나, 여성용 팔찌 하나(추정컨대 은제), 머리핀, 목제 연필, 어린이용 플라스틱 물총, 플라스틱 칼, 선글래스, 작은 사슬, 18인치 가량의 금속제 사슬, (대형) 못 4개, 녹색 플라스틱 차, 금속 빗, 플라스틱 배지, 작은 인형, 맥주 캔 (필스너, 하프-파인트), 성냥갑 하나, 갓난아기 신발, 콤파스, 작은 자동차 열쇠, 동.. 2023. 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