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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기 없는 짓/the museum of unconditional surrender

the museum of unconditional surrender 7-

by 어정버정 2023. 4. 1.

2019 5-02

 

14 애초부터 내 지인인 S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녀는 간호사 교육을 완수했고 마을 끄트머리 정신박약 소아병원에 일을 구했다. ‘좋게 끝맺지 못할 거야.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압지처럼 빨아들여.’ 그녀가 말했다. 병원에서 그는 작은 개인적인 행복을 발견했다. 남자 간호사, 그녀보다 훨씬 젊은, 남들보다 한참이나 작은 남자였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광택을 낸 작은 신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기억이 난다.) 그의 성조차 자소사(diminutive)형이었다. 상당히 늦은 나이에, 그녀는 임신을 했고, 둘 다 당뇨를 갖고 있는 데도 밀고 나가 보자고 결정했다. 그녀는 (쌍둥이를 임신해) 만삭에 이르렀고, 그러다, 출산 예정일 하루 전에 태중의 아기들은 질식사했다. 지인은 젖은 압지처럼 갈가리 부서졌다. 그녀는 정신병동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내고, 회복하고 나서 더 작은 도시로 자그마한 그 남편과 옮겼다. 하루는 갑자기 그녀가 우리 집에 나타났다.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일에 관해 그녀의 남편에 대해, 이런 저런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뒤 지인은 핸드백에서 작은 비닐봉지를 꺼냈다. 거긴 두어 개 반짝거리는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 물건이 들어 있었고, 너무 사소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녀의 자질구레한 장신구들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고 뒤적였다. 그러다 선반 위에 작은 모형 마른 꽃가지가 시선에 들어왔는지, 그 꽃가지 정말 좋아 보인다는 말을 했다. 훌륭해, 무지 훌륭하다고, 자신에게 그걸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작은 비닐봉지에 이를 밀어 넣고, 불쌍한 까치의 보물들과 함께 떠났다.

 

15 커피를 나누며 키라는 마을의 다른 거주민들에 대해 말을 전해 주었다. ‘있잖아. 어떻게 보면 우리는 비슷비슷해. 우리는 다들 무언가를 찾고 있어마치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그녀가 말한다.

 

16 망명객은 망명 상태가 소리에 꾸준하게, 특별히 민감한 상태가 된다고 느낀다. 때로 나는 망명은 다만 소리를 찾아 헤매고 기억해내는 상태라고 느낀다

이고르를 만나러 갔던 뮌헨에서, 나는 잠시 마리엔플라츠에서 음악 소리에 이끌려 멈췄다. 늙은 집시가 바이올린으로 헝가리 집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는 열렬한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공손함과 뻔뻔스러움이 동시에 담긴, ‘그들 중의 한 명임을 알아보는 미소였다. 무언가 내 목을 옥죄어 들어와 한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눈을 내리깔고 서둘러 자리를 떴고, 다음 순간 바로 잘못된 방향으로 출발했음을 알아차렸다. 두어 걸음 더 나아가다, 나는 궁지를 몰아낼 구명(救命) 같은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했고, 줄에 합류해서 어디 전화할 데가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달리 어쩌겠는가?

내 앞에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꽉 조이는 가죽 재킷, 꽉 조이는 청바지, 굽 높은 부츠, 얼굴에 불안함과 무례함이 색깔들이 서로 충돌이라도 하듯이, 동시에 담겼다. 잠시 후에 그도 우리 중의 한 명’, ‘우리 동포임을 알았다. 그가 천천히 끈덕지게 전화번호를 돌리던 방식은-싸구려 레스토랑의 웨이터처럼, 오른쪽도 왼쪽도 보지 않고-분노와 동정이 섞인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나는 대기 줄의 다른 사람들 편이 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이 젊은이 연결이 되어 통화에 이르게 되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나 동포의 한 명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을 두고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우리 동포의 버릇대로, 어르고, 응석을 받아주듯, 서로의 등을 쳐대며, 서로 유쾌하게 추어올리는 기나긴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분노와 동정이 치솟았다. 바이올린은 여전히 슬픔을 안고 깨앵 울어대고, 젊은 남자는 무슨 밀리카라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고, 내 머릿속은 무슨 편집 중인 탁자에 앉은 듯이, 울어대는 깽깽이와 젊은이의 횡설수설을 뒤섞고 있었다. 검은 눈의 바이올린 주자는 끈질기게 내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동안 나는 대기 줄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기회가 그저 주어지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게 그 이유다. 젊은이가 대화를 끝내고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을 때 (전과 마찬가지로 뜻밖의 행동이라, 뒤섞인 감정을 똑같이 불러일으키는 행동) 한나루네에게 전화를 넣은 것이다. 무언가 긴급한, 실질적인 질문을 생각하며 전화를 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녀였다.

나는 이고르와의 만남에 늦었다. 우리는 중국식당에 갔고, 밝게 대화를 나누며 웨이터가 오길 기다리는데, 내가 영 가만있지를 못하고, 정신이 팔려, 사방으로 눈을 움직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겨울날 안경에 끼는 것처럼, 눈이 아주 얇은 필름에 덮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소리를 깨닫게 되었다. 중국인지 한국인지 팝뮤직이, 모르긴 몰라도 어쨌든 그쪽 지역의 팝뮤직이 나오고 있었다. 부드럽게, 애조를 띤, 달콤하게 흥얼거리는 아마도 사랑의 노래인 것 같은데, 내 고향에서 나온 음악일 수도 있고, 이고르의 러시아 고향에서 난 곡조일 수도 있었다. 바로 그때 비가 갑자기 퍼부었고, 이고르 뒤편 창문에 길게 빗줄기가 개울을 이루며 흘러내렸다. 그러자 마침내, 나는 부서졌다. 자제력을 다 잃어버리고, 오래 전, 제대로 익힌 반사작용에 따라, 적절하게, 정확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그 순간까지 있는 지도 의식하지 못했던 반사작용인데. 한 마디로, 나는 종소리에 침을 질질 흘린 셈이었다. 보편적인, 달콤하게 우짖는 소리에, 어디에서 나왔든 상관없는 똑같은 징징 우는 소리에나의 내부에서 고투를 벌이고, 저항을 하고, 투덜거리며, 내가 그 힘 안에 든 것이 기쁘기까지 하였고, 신체적으로 나약해지고, 부드러워진 게 흡사 만족스러운 느낌까지 들어, 보이지 않는 따뜻한 눈물의 물웅덩이 속에서 사방으로 물을 튀겼다

대체 무슨 일이래요, 이고르?’ 나는 사과조로 이렇게 이고르에게 물었다.

반짝거리는 당신 블라우스 단추에 당신 눈이 빛나고 있어요.’ 체르노비트사 출신, 러시아 유대인 망명객, 내 친구가 말했다.

나는 둔한 눈길로 단추를 내려다보았다. 단추는 불투명한, 황금색 비스무리한 플라스틱이었다.

 

17. ‘기지 있는 말은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줄거리를 짜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는 이런 저런 사물에 대해 생각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인용구들을 엮기 위해서.’ 오래전에 일시적인 망명객이 이렇게 남겼다. 그의 이름은 빅토르 슈클로프스키(러시아 문학이론가, 비평가. 러시아 형식론의 대표적인 인물)였다.

 

18 ‘Ich bin müde(나는 지쳤어)’하고 나는 프레드에게 말한다. 슬픔 가득한 창백한 얼굴이 활짝 웃음으로 길게 벌어진다. ich bin müde가 그 순간에 내가 아는 유일한 독일어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더 이상은 배우고 싶지 않다. 더 배운다는 것은 마음을 터놓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당분간은 한참까지 닫아 놓고 싶다.

내 방의 침묵 안에, 창문의 낭만적인 무대 세트를 배경으로, 나는 잡동사니들을 늘어놓았다. 일부는 진짜 이유는 모르는 채 갖고 왔던 물품이고, 일부는 모두 무작위로, 의미 없이 여기서 발견한 물건들이다. 공원을 걷다가 발견한 작은 깃털이 내 눈 앞에서 윤을 내고 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구절이 머릿속에서 울린다. 노랗게 바래가는 오래된 사진이 나를 쳐다본다. 내가 어딘가에서 보았던 몸짓의 윤곽이 나와 동행을 하고, 그게 무슨 뜻인지 그리고 누가 그런 동작을 했는지 모른다. 수호천사가 든 플라스틱 공이 플라스틱 잔광으로 빛난다. 공을 흔들자 눈이 천사 위로 떨어진다. 나는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자리한 자리는 엇나갔고, 나는 나약한 인간 표본, 나는 우연히, 다른, 더 안전한 해변에 떠밀린 몽돌이다.

 

19. ‘여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공기와 물이다.’ 한나로레가 교훈처럼, 어느 바에 앉아 우리 컵에 맥주거품을 불면서, 말한다.

 

20. 망명객은 망명상태가 꿈의 구조를 지녔다고 느낀다. 아주 갑자기, 마치 꿈속에서처럼, 그가 잊어버렸던, 아니 오히려 알지 못하는 얼굴들이 등장하고. 의심의 여지없이 처음 보는 장소들이 지나가지만, 어딘가 다른 데서 알던 것 같다. 꿈은 과거, 현재, 미래에서 난 이미지들을 끌어들이는 자기장이다. 망명객들은 갑자기 실제로 꿈의 자기장에 이끌린 얼굴들, 사건들, 이미지들을 본다. 갑자기 그의 전기가 이룩되기도 한참 전에 미리 쓰인 것만 같다. 그래서 그의 추방/망명/유배는 외부적인 상황도 아니고 그의 선택도 아니라, 뒤죽박죽 편성이 된, 그의 운명이 오래전 미리 개략을 그려 둔 일 같다. 이런 매혹적인 그리고 섬뜩한 생각에 사로잡혀 망명객은 그 표식들, 십자 표시와 매듭들의 암호를 풀기 시작하고, 아주 갑자기 그는 그 속에서 온갖 비밀스러운 조화, 상징의 뭉뚱그린 논리를 읽기 시작하는 듯이 느낀다.

 

21. ‘나니지바트, 야 유블류 나니지바트(바느질, 나는 바느질을 좋아한다)’ 무언가 사과라도 하듯이 키라가 말을 한다. 그리고 회복기 환자의 창백한 미소를 짓는다.

바느질, 나는 바느질을 좋아한다.

 

 

22. 우리 공원정원 끝에 있는 유리 스튜디오에, 루마니아 커플이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젊은 여자는 도끼를 이용해 며칠 동안 공원 주변에서 주워 모은 나무 조각들의 모양을 다듬는다. 한편으로 남자는 엄청 큰 흰색 판자에 얇은, 거의 투명한 종이쪽들을 핀으로 고정한다. 각 종이쪽마다 새의 머리가 보드랍고 밝은 회색 수채화 물감으로 그려져 있다. 젊은 여자는 도끼로 가락에 맞춰 나무를 내리친다. 처음에 작은 종이쪽은 가만히 있다가, 보이지 않는 느리게 흐르는 기류가 이들을 흔든다. 새들의 머리가 마치 떨어지기라도 하듯이 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