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3
part 2
가족 박물관
I
(page 13)
앨범의 시학
현시대는 향수의 시대이고 사진들은 적극적으로 향수를 조장한다. 사진술은 애수 어린 예술, 황혼의 예술이다. 사진으로 찍은 대부분의 주제들은, 그냥 사진으로 찍혔다는 점 때문에, 파토스, 연민을 자아낸다. 꼴사납거나 섬뜩한 주제가 사진사의 주목으로 위엄을 갖추게 되었기에 감동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아름다운 주제는 나이를 먹거나 퇴락하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회의 감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사진을 찍는 일은 다른 사람의 (혹은 물건의) 필멸성, 취약성, 변덕스러운 변화에 참여하는 일이다. 정확하게 이 순간을 잘라내어 동결시키는 일, 모든 사진들은 가차 없이 녹아내리는 시간을 증명한다.
-사진술에 관하여, 수전 손택.
‘슬라비카와 브랑코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내손에서 앨범을 뺏으며 그녀가 말한다. 그리고 미소를 짓고 있는 젊은 커플을 골똘히 살핀다.
‘슬라비카와 브랑코가 누구야?’
‘너는 모르는 사람들이야…네가 아주 어렸을 적에…’ 그녀가 어깨를 으쓱인다. ‘대체 내가 무슨 생각으로 저것들을 앨범에 넣었던 건지,’ 저것들을 강조를 하며 혼자 중얼거린다. 그리고 희귀한 식물 표본이라도 되는 듯이 조심스럽게 들여다본다.
갑자기-신속한 동작으로 한손으로 끈적한 테이프를 제거하고 셀로판 커버를 뜯어내고 사진을 떼어내더니 조각조각 찢어버린다. 처형되는 종이의 소리가 공기를 찢는다.
‘저기,’ 그녀가 말한다. ‘어쨌거나 그 사람들 죽은 지 수년은 되었어.’ 그녀는 회유적인-회상적인 어조로 덧붙이고 앨범을 내게 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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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4
어머니는 할머니 장례식장에 가서, 몇 년 동안 할머니에게 보냈던 가족사진 한 뭉텅이로 들고 돌아왔다. 그 사진 중에 하나가 내 사진, 해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아마 한 열셋 정도 되었을 것이다. 사진의 뒷면에 먼 사촌친척이 삐죽거리는 엉성한 글씨체의 불가리아어로 ‘이게 저예요. 새 수영복을 입고 해변에서 찍었어요.’라고 적혀 있었다. 그 글 아래 역시나 서투른 글씨로 서명이 들어 있었다.
이제 그 사진은 내 소유다. 먼 친척사촌은 왜 그랬을까, 나는 이유는 모른다. 그런 사소한 일들이 곤혹스러운데, 때로 그런 짓을 한 게 혹시 나인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사실 내가 안 그랬다는 보장이 없기도 하다. 그 사진이 딱 봐도 나인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나는 내가 사촌의 언어, 철자와 글씨체와 그녀의 이름으로 내 자신이 서명을 했을 수도 있다는 악몽 같은 생각이 몸서리를 친다.
초기의 혼돈 후에, 사건의 연대순과 그 중요성에 따라 순서를 맞추고 조직화하는, 초기의 선택 후에, 재빠른 손질 후에 (못난 사진은 아무거나 내친 후에, 슬라비카와 블랑코의 사진을 내다버린 후에)-엄마 앨범 속 사진들은 이후 한참으로 당분간은 그 영속적인 배치에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그럼에도 새로운 삶의 조류들이 이 엄격한 앨범 속으로 슬그머니 비집고 기어들어온 것을 나는 알아보았다. 화장 크림의 이름이 적힌 찢어진 종이쪽 하나, 누군가의 전화번호, 특수제작 문 자물쇠와 경보장치를 어디서 살 수 있는지 잘라놓은 신문 쪽, 혹은 토마토의 유해한 영향에 대해 적은 신문기사나, 누군가의 성탄 축하카드…마치 내버린 사진들로 남아있는 빈 공간이 보이지 않는 자기력으로 대체물들을 끌어들인 것처럼 끌어들였다.
앨범의 장르가 콜라쥬의 장르를 위협하며 전환될 때 (그런 견지에서 이를 뒤집는 전복적인 유일한 요소가 내 첫 사진 옆의 잘라 붙인 내 머리 다발이다) 어머니는 이를 말끔히 정리하며 어머니의 조절력을 벗어나, 앨범 속으로 기어 들어와서 개인적 역사의 구조를 어지럽히는 이런 ‘쓰레기’들을 내던져버렸다.
때로는 앨범들을 휘리릭 넘기며 뒤적거리는 엄마를 마주치곤 한다. 그러다 들고 있던 앨범을 덮고 안경을 벗고는 이를 내려놓으며 ‘때로 내가 이런 삶을 살았나 믿기지가 않기도 해…’말한다.
‘삶은 다만 사진 앨범에 지나지 않아. 앨범에 들어 있는 것들만 존재하니까. 앨범에 없는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어.’ 내 친구 중 한 명의 말이다.
page 27
사진은 끝없는, 다루기 힘든 세상을 사각의 틀로 줄인다. 사진은 세상을 재는 우리의 자다. 사진은 또한 기억이다. 기억하는 일은 작은 사각형으로 줄인다는 의미이다. 앨범 속에 작은 사각형들을 배열하는 일은 우리의 자서전이다.
이 두 장르, 가족사진과 자서전 사이 의심의 여지없이 연관성이 있다. 앨범은 물질적 자서전이고, 자서전은 구어적 앨범이다.
가족앨범을 구성하는 일은 깊이 아마추어적인 작업이다. (왜인고 하니 거긴 아마추어적인 허세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서전을 적은 일은 (어떤 예술적인 기교를 성취했다고 해도) 역시 아마추어적인 활동이다.
‘프로페셔널성’(이를 더 나은 단어의 부족으로 이렇게 부르도록 하자)보다 ‘아마추어’가 갖는 장점은, 혹은 적어도 둘 사이의 차이점은 또렷하지 않은 고통 속에 포함되어 있다. 아마추어 작업이 (초감각적인 의미에서) 관찰자/독자의 심금을 건드리고 촉발할 수 있는 통증 속에. 소위 예술 작품들의 풍성하고 호화로운 전략들은 그런 점에 이르는 일은 드물다. 통증의 지점은 축복받은 아마추어들에게만 허용이 되는 우연의 목표물이다. 다만 그들이 건드리기만 할 뿐, 실제로 이게 대체 어떤 것들인지 모르는 목표물이다.
내 시선이 우연히 트램에서 박은 어느 아침의 사진이 기억난다. 젊은 커플이 문간에서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헝클어진 우체부 제복을 입고 제모를 머리에 쓰고 있었다. 여자는 딱히 특기할만한 것이 없는 작은 여자였다. 시의 문간이 이 쌍을 회색 아침 햇살을 받으며, 거리로 뱉어내었다. 여자가 발끝으로 서서 쭉 뻗은 (하이힐의 낡은 구두를 신어서) 목을 돌리는 방식이나 여자 허리에 부드럽게 팔을 두르고, 인형처럼 약간 뒤로 젖히는 남자의 방식이나, 제모를 한쪽에 부딪히며 여자와 열정으로 키스하는 방식이나. 완전히 키스에 열중해, 여자가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는 방식이나,-이런 것들은, 분명히, 가장 전문적인 영화배우들이라고 해도 연출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커플은 ‘아마추어’처럼, 그들 영화배우들을 흉내 내며 키스를 한다.) 그날 아침 사진은, 내 시선으로 절로 미소를 지으며 딸깍 찍고 기억에 저장한 사진은 내게 깊은, 어김없는, 어렴풋한 통증, 차이의 통증을 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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