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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기 없는 짓/the museum of unconditional surrender

the museum of unconditional surrender 50-

by 어정버정 2023. 4. 1.

2019-05-06

 
 
 

3.

오늘 내게 필요한 것은 책 한 권이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나는 운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붉은 산호처럼 묵직한 슬픔이.

-빅토르 슈클로프스키, 3 공장

 

page 50

 

여기 있다.’ 엄마는 내게 숙제라도 내밀고 있기라도 하듯 무심히 말했다.

오랫동안 나는 꽃무늬 공책을 건드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연다는 생각 자체가 마음이 아렸다. 그러다 하루는 아무튼 이를 열었고 이미 열린 상처 그 페이지들이 흩뿌린 것들은소금이었다.

나는 문장들을 씻고 껄끄러운 부분과 진흙들을 제거하고, 손수건에 침을 뱉어 내 자신의 침으로 이를 씻어 내렸다.

이제 내 손바닥 안에 엄마가 사용하지 않은 단어들(어머니는 ‘shaft’대신에 ‘draught’적었다. 아주 화가 뻗혀 항의할 때 단 한번 했던 말처럼 나에게 물렸다는 의미로 너는 내게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썼다.) 잘못 사용된 격어미, 맞춤법 실수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나는 마침표와 쉼표로 리듬을 완화했고, 잘못 놓인 느낌표(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표!)를 제거했고, 키릴 문자들을 들어냈다. (어머니는 항상 바르나를 키릴 문자로 썼다) 자주 등장하는 불필요한 따옴표를 추려내고, 대문자는 소문자로 (어머니는 항상 부모님을 대문자로 썼다) 바꿨다. 나는 과사용된 좋다는 말과, 아마 텔레비전에서 배웠을 정치적 상황이 팽팽해지고 있다같은 상투 어구는 그대로 두었고, 예상치 못한 시적인 표현, ‘봉주르, 지루함이여,’같은 것이나, 얼추 쓸모없는 문장들은 내가 날씨 예보에 대한 그녀의 논평이라고 상상이 가는 쏟아져서 강물을 이뤄야 하는데,’ 같은 것도 남겼다.

나는 무엇이 남았나 자문해 본다. 왜냐면 여기 내 손바닥 안에, 어머니 언어의 껍데기가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신원, 뭉클하게 잘못 사용된 강세표시, 나만 들을 수 있는 억양, 나만 의미를 아는 단어, 기분에 따라 변하는 어머니의 글씨체, 나만 오직 감지할 수 있는 자기 검열이 있기 때문이다

맨 처음에 나는 교활한 내 마음 구석에 문학적인 효과를 내기 위한 바람에, 장르에 관한 미미한 아이디어들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의 고통스러운 중심에 들어 앉아 있다. 마치 유사에 빠진 듯이, 빠져나올 수가 없이

 

나는 가끔 내가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결국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면 사람은 도대체 왜 사는 걸까?’ 어머니가 묻는다.

기억은 모든 사람을 배신한다. 특히나 우리가 아주 잘 알던 사람들을. 망각의 협력자들이다. 죽음의 협력자이다. (기억은) 어획량이 형편없는 그리고 물은 다 가버린 그물이다. 이를 이용해 누군가를 재구성할 수 없다. 종이에서조차 불가능하다. 우리 뇌의 수백만 뇌세포는 다 어떻게 된 건가? 파스테르나크의 위대한 사랑의 신, 위대한 세부의 신은 어떻게 된 건가? 결정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세부사항들을 준비해 두어야 하는가?’ 요세프 브로드스키(러시아 시인)가 말한다

 내 기억조차도, 그것만이라도, 나는 아주 작게 기억한다 어머니가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틀에 박힌 일상, 반복적인 성격이 잊히기 마련이다. 아침식사가 그 하나이고, 사랑하는 이들도 다른 예이다.’ 요세프 브로드스키가 말한다.

그럼 이 모두 무슨 소용인가? 내게 아무 미래도 없고, 과거에 어떤 기반도 찾지 못한다면 어머니가 묻는다.

실패들치고는, 과거를 회상하려는 노력은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과 비슷하다. 둘 다 아기가 농구공을 움켜잡으려는 느낌을 준다. 손바닥이 자꾸 미끄러진다.’ 브로드스키가 말한다.

삶의 마지막에 무작위적인, 연결 끊긴 세부들의 무더기로 줄어든다. 이런 식으로도 저런 식으로 될 수 있어서, 완전히 비물질적이다. 내가 무로 잊히기 전에 내가 여전히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 궁금하다. 어머니가 묻는다.

예술이 가진 기억과의 공통점은 선택의 요령, 세부에 대한 취향이다. 이런 관찰은 예술에 칭찬처럼 보이긴 해도 (특히나 산문 예술의 경우), 기억에는 모욕적인 일이다. 모욕이라고 해도 받아 마땅한 일이다. 기억은 전체 그림이 아니라 정확한 세부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전체 쇼가 아니라 하이라이트만 담고 있다. 전면적으로 전체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다는 확신은 그 종족이 삶을 살아가도록 해주는 바로 그 확신은 근거가 없다. 무엇보다 기억은 무질서한 색인에 사람들의 전집을 갖추지 않은 도서관과 같다.’ 브로드스키는 계속 말을 잇는다.

나는 많이 읽었고, 책속에 푹 잠기곤 하였다.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난장판의 어수선한 단어들이다. 나는 부모님을 떠올리려 애써본다. 그들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어 부끄럽다. 그러다 적어도 아이들에 대해서 안다는 생각에 마음을 달래본다.내가 그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깨닫자 마음 한 언저리가 싸늘해진다.’ 어머니가 말한다.

때로 나는 애를 먹는다. 하지만 보통은 그냥 그들을 이해는 없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신호를 잊었고, 작은 의례들은 내게 의미를 잃었다. 내 무관심에 패배하여, 그들은 우리의 공통된 기억의 세계 속으로 나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에 점점 더 줄어드는 확신을 품었다(?) 끝에 가서 그들의 말이 바닥났다. 가장 오래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들의 몸짓이었다. 딸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행동, 아들이 입 사이에 유리잔을 물고 고개 숙여 인사한다거나, 아내가 지친 등을 계속 죽 펴는 행동이라거나. 이런 몸짓들이 가슴 깊이 사무친다. 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버릇을 익히고, 혹은 내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옛버릇으로 돌아간다. 과거를 생각하면 당혹스러웠다. 어떻게 우리는 같이 살았을까, 그들에 대해 그렇게 아는 게 적었는데?’ 죄르지 콘러드(Georgy Konrad)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