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8-18
The Old maid (the fifties, second novella in Old New York, 1924)
이디스 워튼
PART 1.
1.1.
50(1850)년대의 과거 뉴욕은 몇몇 가문이 단순함과 부유함 속에서 지배를 했다. 이 중에는 랠스턴 가문이 있었다.
튼튼한 영국인과 혈색 좋고 몸이 묵직한 네덜란드인이 섞여 번창을 하고, 사려 깊지만 그래도 호화로운 사회를 이루었다. ‘이런 일들을 멋들어지게 하기’ 위해서 은행가들, 인도 무역상, 선박건조와 선구상(船具商)들의 재산 위에 새워진 이 조심성 많은 세계에 기본적인 원칙이 하나가 항상 있었다. 유럽인의 눈에는 오로지 변덕스런 날씨가 남아도는 살은 벗겨내고 신경을 조금 더 단단히 조이기 때문에 짜증 잘 내고 소화불량의 사람들로 보이겠지만 이들 잘 먹고 느릿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이따끔 지하에서 벌어지는 터무니없는 드라마에도 결코 표층은 흔들림이 없는 고상한 단조로움 속에서 살았다. 그 시대의 감성적인 영혼들은 운명이 소리 없이 연주를 하는 벙어리 건반과도 같았다.
단단하게 용접한 블록으로 지어진 이 조밀한 사회에서 가장 큰 구역의 하나를 랠스턴 가문과 그 방계 가족들로 채워져 있었다. 랠스턴가는 중산층 영국인들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식민지에 신념의 사명으로 죽으러 온 게 아니라 은행계좌로 먹고 살기 위해 왔었다. 결과는 그들의 희망이었으며 그들의 종교는 그들의 성공으로 물들었다. ‘미합중국 주교감독 교회(Episcopal church)라는 회유적인 이름 아래, 결혼예식 속 다소 변변찮은 암시들은 빼버리고, 아타나시오 신경(Athanasian Creed) 속의 위협적인 구절들은 쓸어버리고, 주기도문에 ’것인 하나님 아버지‘ 보다 ’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더욱 점잖다고 생각을 하며, 떫은맛을 우려낸 영국국교회는 랠스턴 자신들이 세운 영혼의 타협으로 딱 맞아떨어졌다. 온갖 종족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새로운 종교에 동일한 본능적인 반동이 있었다. 그들은 그 중심부까지 제도적이어서 해초가 해변에 붙어있듯 새로운 사회를 함께 붙잡는 보수적인 요소들을 옹호하였다.
랠스턴가와 비교하면, 로벨 가문 같은 전통주의자들까지도 홀지 혹은 밴더그래이브 가문은 돈에 대해 조심성이 없고, 무심하며 그들 충동이나 우유부단에 거의 개의치를 않는 사람들로 비쳤다. 이 종족의 창건자인 강건한 노 존 프레드릭 랠스턴은 그 차이를 인식하고 그의 아들, 프레드릭 존에게 거듭 강조를 했다. 아들 존은 검증되지 않고 수익이 나지 않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희미하게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래닝가와 다고냇가 그리고 스펜더 가에 위험을 무릅쓰고 융통어음을 발행하게 했다. 그들은 주 명문 혈통이다.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지. 이미 그들이 얼마나 점점 쇠하고 있는지 보거라. 내 말은 그 남자들 말이다. 너의 아들들은 그 가문의 여자아이와 결혼을 시켜. (건강하고 멋진 그들이)네가 좋다면 그러거라. 비록 나는 얼마 안 있어 내 손자들이 로벨이나 밴더그레이브 딸을 취하거나 아니면 우리네 가문 누군가와 결혼하는 모습을 보겠지만. 하지만 너희 아들들은 그 가족들의 젊은 친구들과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경마를 하고, 남쪽으로 X할 스프링스 같은 데 우루루 몰려간다거나, 뉴올리언즈에서 도박을 한다거나 그렇고 그런 모든 일들은 못하게 말려라. 그게 네가 가정을 제대로 세우고 세상 풍파에서 견디는 방법이야. 우리가 항상 하던 방식이지.’
프레드릭 존은 귀기울여듣고 복종해 홀지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그리고 수동적으로 아버지의 전철을 따랐다. 그는 해밀톤을 숭배하지만 제퍼슨을 위해 봉사한, (뉴욕이 아니라 워싱턴을 수도로 만든 해밀턴은 영국을 모범삼아 군주제를, 제퍼슨은 프랑스식 정치를 원하였다고 한다.) 신중한 뉴욕 신사 세대에 속하였다. 그들은 뉴욕을 워싱턴처럼 설계하기를 바랐지만 사람들이 은연중에 내려다보고 있다고, 사람들이 ‘비민주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대신에 석쇠처럼 놓았다. 뼛속까지 장사꾼들은 그들의 진열창에 가장 요구가 많은 상품들을 늘어놓지만 그들의 사적인 견해는 뒷가게에 두는 법이다, 그러다 사용이 없으면 그들도 점차 본질과 색깔을 잃어버린다.
랠스턴의 4대손은 개인적인 그리고 사업적인 문제에 예리한 명예의 감각 말고는 확실한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정부와 공동체와 삶에서 그들은 신문에서 일상적인 견해를 얻었는데 그 신문들은 이미 그들을 경멸을 하였다. 랠스턴 가는 그렇게 하는 일이 안전한 길이 되리란 명분에 돈을 지원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나라의 운명이 잡히는데 한 일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공화국을 건설한 많은 위대한 사람들과 교류가 있었지만 어떤 랠스턴 사람들도 나서서 그처럼 위대해지려고 하는 일은 없었다. 노 존 프레데릭이 말했듯이, 3퍼센트로 흡족해하는 게 더 안전했다. 그들은 영웅심을 도박의 한 형태로 취급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은 단순히 숫자로 세를 불리고 아주 유사한 사람들을 이루어 그들은 공동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가문이 되었다. 사람들은 선례를 들먹이고 싶은 때는 ‘랠스턴 가문’을 입에 올렸다. 이런 권위의 귀착은 점차 3세손들의 집합적인 중요성을 확신으로 번졌고 델리아 랠스턴의 남편이 속해있는 4세대들은 지배계급의 편의성과 단순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보편적인 조심성의 한계 내에서, 랠스턴 가는 부자에 존경받는 시민으로써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들은 오래된 자선단체의 명판에 거의 다 올려지고, 구호기관에 후하게 기부를 하고 뉴욕에서 가장 좋은 요리사들을 보유했다. 그리고 외국에 여행을 갔을 때는 로마에서 이미 이름이 나있던 미국인 조각가에게 조각상을 주문하였다. 조각상을 집으로 들여온 첫 번째 랠스턴은 방종한 사람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조각가가 영국의 귀족의 주문을 몇 번 받아 작품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게 되자 이것 역시 3 퍼센트 투자라고 생각이 가족들 사이에 퍼졌다.
네덜란드계 반더그라브 가와 두 번의 결혼으로 절약과 멋진 삶의 자질들을 곤고히 다졌으며 신중하게 쌓아올린 랠스턴의 특질은 이제는 아주 유전처럼 흘러서 델리아 랠스턴은 자신의 어린 아들이 거기서 작은 뉴욕을 창조하지 않도록, 경영진으로 온통 이름이 올리고 싶어 하지 않도록 때로 아이를 야생 속에 풀어놓아야만 할까 자신에게 묻고는 하였다.
델리아 로벨은 제임스 랠스턴에게 스무 살에 시집을 갔다. 결혼식은 1840년 9월의 달에 있었는데 그 당시의 관습대로 신부 측 시골저택에서 엄숙하게 예식이 치러졌다. 지금 그곳은 애브뉴 에이와 9십5번가의 모퉁이로 사운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뒤 남편은 그녀를 (가두리를 마부석 덮개로 덮은 할머니 로벨의 카나리아 색깔의 4륜 마차에) 태워 확산되고 있는 교외와 느릅나무로 그늘진 어질러진 거리를 지나 그레이머시 파크에 있던 새로 들어선 집의 하나로 데리고 갔다. 더 젊은 개척자들 집단들이 막 영향을 발휘하기 시작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스물하고도 다섯에 그녀는 두 아이의 어머니로, 넉넉하게 가외의 용돈을 소유하고, 만장일치로 그녀 시절의 가장 당당하고 아름다운, 가장 인기 있는 (그들의 말 그대로 따르자면) ‘젊은 기혼녀’ 중의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그녀는 이런 일들을 어느 오후, 그레이머시 파크에 있는 그녀의 멋진 침실에 앉아 있다가 차분하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시적인 랠스턴가와 아주 가까워 그들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예를 든다면, 문제의 그 아들은 언젠가는 장악을 할 것인가 등에 주관이 없었다. 그녀는 나라의 법 아래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듯이 그들 아래 살았다. 소리 없는 건반의 흔들림이라고 해도, 때때로 날개처럼 그녀 속에서 박동을 하는 그런 비밀스런 질의는 가끔씩 그녀를 그들과 분리를 시켜 찰나적인 순간동안 그녀는 다른 일들과 그들의 관계를 두고 그들을 숙고를 할 수 있었다. 그 순간은 늘 찰나적이었다. 그녀는 숨이 막히고 약간 파리해져 재빨리 그 생각에서 후퇴를 하고 그녀의 아이들, 집안일, 새로운 드레스들과 친절한 짐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