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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시작하지 않은 책과 끝나지 않은 책

by 어정버정 2023. 4. 20.

2013-2-23

책밖에 모르는 바보

 

 

남산 아래 퍽 어리석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말도 느릿느릿 어눌하게 하고, 천성이 게으르며 그 성격마저 고루하니 꽉 막혔을 뿐만 아니라, 바둑이나 장기는 말할 것도 없고 생계(生計)에 대한 일이라면 도통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남들이 욕을 해도 변명하지 않았고, 칭찬을 해도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았다. 오직 책 읽는 일만을 즐겨, 책을 읽기만 하면 추위나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배가 고픈지도 모른 채 책만 읽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스물한 살이 된 지금까지 하루도 옛 책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그가 기거하는 방도 무척 작았다. 하지만 동쪽과 서쪽과 남쪽에 각각 창()이 있어 해가 드는 방향에 따라 자리를 옮겨가며 책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아직 보지 못했던 책을 구해 읽게 되면, 그 즉시 만면에 웃음을 띠곤 했다. 집사람들은 그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기뻐하면 필시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특히 두보(杜甫)의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 시를 읊느라 앓는 사람처럼 웅얼거리기를 예사로 하였고, 시구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 혹 심오한 뜻을 깨우치게 되면 그만 기뻐서 벌떡 일어나 방 안팎을 서성이기도 했는데, 그럴 땐 마치 까마귀가 우짖는 소리를 내곤 했다. 어떨 땐 조용히 아무 소리도 없이 눈을 크게 뜨고 멀거니 보기도 하고, 혹은 꿈꾸는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책밖에 모르는 바보라 해도 그냥 씩 웃고는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아무도 그의 전기(傳記)를 써 주는 사람이 없기에 내 붓을 들어 그의 일을 써서 책밖에 모르는 바보 이야기를 짓는다. 그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는다.

 

 

 

이덕무 지음/강국주 편역 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 돌베개, 117.  

 

 

 

L o r e n a     K l o o s t e r b o e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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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 한 책을 잡으면 이틀 만에 끝나는 경우는 (요즘은) 극히 드물고, 2개월?, 다섯달이고, 일년이고 이년이고 걸린다. 곱씹는 건 아니다. 문장이 시신경을 거쳐 들어온 광자는 형체없는 의식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빛의 속도로 사라져 버린다. 어릴 적 버릇 든 그대로 옳다 그르다, 나쁘다 좋다 따지는 일도 없다.  의미없는 글에, 의미를 찾는 착한 짓은 일찍이 깨치지도, 해보지도 못한 일이다, 의미를 담아두는 일은 찰나를 벗어나면 썩고 삭아버린지 오래다 책은 시간을 때우는, 공간을 때우는, 생각을 때우는 한갓진 소일거리이고, 삶을 사는 나는 단절된 세상들 사이를 칸칸이 나누며, 아니, 숨어들어 잠시 숨만 돌린다. 재미없으면 덮는다. 흥미없으면 넘긴다. 그렇다고 가벼운 것은 싫다. 거짓된 것도 싫다. 진실인 척 하는 것도 싫고, 진실인 것도 싫다. 가르치려 드는 것도 싫고, 배울 것 없는 것도 싫고, 남들 좋다는 것도 싫고 남들 싫다는 책도 싫다. 허약한 체력에, 빈약한 앎에, 입맛만 더럽게 짧아서 남이 차려준 것도 싫다. 

그래서 보던 것 맨날 보거나, 보았나 헷갈리는 것만 보거나 딱 네놈같이 재미 하나도 없이 민숭맹숭, 맨밥에 김한장, 멀건 죽에 간장 한 술 (아 간장도 싫다, 간장에 얹은 참깨는 더욱 싫구나) 아니 된장국 한술만, 놓고 턱 아 배부르다 놓아버린다. 어차피 많이 읽지도 못할 거, 읽어봤자 알지도 못할거, 알아봤자 써먹지도 못할 거, 내 입맛대로 골라, 골라, 골라, 골라, 골라, 닥치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어쩌다 걸린 대로. 

 

-다니엘 페나크의 권유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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