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돌아서서 직면을 하거나, 아니면 그만둬야 한다. 어떤 위기에 맞닥뜨리면 사람은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해야 한다. 뭔가 하기는 해야 한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거나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 내면을 완전히 갈아먹었다. 나는 긴장의 불가피한 증상들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참고 살기 힘들 정도로 심술궂게 굴었고, 직원들에게 툭하면 성질을 냈다. 먹는 것에 흥미를 잃고 식사를 걸핏하면 걸렀으나 이를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나는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랬다. 그것은 단지 누가 마음에 들고 비위를 맞추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력, 의지, 체력,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걸겠다는 기꺼운 자발성의 문제였다. 잠을 못 이뤄 뒤척이고 패트가 고함을 지를 때까지 패트를 팔꿈치를 치고 무릎으로 치고 나자신에 대해 고심했다. 물론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곤죽이 되도록 두드려 맞고 싶지 않았다. 지난 7월에 나는 패트를 머레이 초티너와 함께 시카고 호텔 방에 밤새도록 가두어 두어야 했다. 머레이 초티너는 내가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면 나를 떠나겠다고 위협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압력을 가하는 가공할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 나중에 그는 내게 패트는 진짜 호랑이라고 했다 – 그러니 나는 지금 그녀의 동정은 전혀 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야위고 초췌해졌고 심지어 내 아침 식사도 형편없었다. 하지만 잭 드라운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고 버트 앤드류스는 나를 솔직하고도 엄하게 타일렀고, 예전 학교 선생님 중 일부는 내가 잘되기를 바랐다. 기분이 좋아졌다. 초티너는 “당신은 피뢰침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경선에서 하차하면 아이젠하워는 11월에 이길 가능성은 아예 물 건너가요.”라고 말했다. 피뢰침. 그때 나는 내가 한 일이 나 자신뿐만 아니라 조국의 미래와 전 세계의 평화와 자유의 대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위기였다. 나는 <하늘의 눈>을 불신하고 싶었다. 나는 그 눈을 비웃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팬텀을 이겨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부통령이 되고 싶었다. 아이젠하워가 나를 돕지 않는다면 나도 스스로 도와야 했다. 자기 탐색은 끝났다. “장군님,” 그가 그의 룩어헤드네이버 스페셜 호Look Ahead, Neighbor Special에서 전화로 나에게 전화했을 때 나는 그에게 말다. “똥통만 붙들지 말고 똥을 지르든 떠나든 결단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 말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나는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나는 가장 벌거숭이 형태의 <눈>을, 텔레비전 카메라를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하늘에-있는-눈 뜬구름 몽상이 아니었다. 거기에서 매섭게 번뜩이며, 검고, 무자비하고, 깜박이지 않는 눈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앞으로 나갈 것이다. 나는 전 나라 앞에 내 벗은 영혼 내보이고 통장을 드러낼 것이다. 사실 나는 그냥 영혼만 내보이고 싶었는데 아이크가 통장 또한 다 까놓으라고, 그래서 그가 이로 값을 치르고 있어서, 나도 동의했다. 나는 히스 사건의 경험을 통해 위기 대처에서 성공과 실패는 감정이 고조될 때 냉정하게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능력이 결정짓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 경험이 지금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 자신이 거의 자동적으로 신속하고 합리적이며 비감정적으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내 조언자들이 월요일 밤에 “아이 러브 루시” 쇼가 끝난 후 방송에 나가라고 신나서 강력 권유했을 때 나는 그 아이디어를 냉정하게 거부했다. “아니요.” 나는 말했다. “화요일 밤.” “화요일이요-?” “맞아요. 밀턴 벌 이후에”
연설을 하기 위해 할리우드로 가는 길에 나는 비행기에서 내 앞 좌석 등받이에 있는 그림엽서에 메모를 적었다. 나는 물론 게티즈버그로 가는 길에 기차에서 급히 휘갈겨 쓴 에이브 링컨의 전설을 생각해서 한 일이었다. 사실 그 메모들은 쓸모가 없어서 나는 버려야 했지만, 그 전설은 –이제 나 자신의 전설로 - 살아있다. 이 술책 덕분에 링컨이 보통 사람에 대해 했던 말이 생각이 났고, 나는 휘티어 교수 중 한 명에게 나를 위해 그 내용을 찾아보라고 부탁했다. 루즈벨트는 그의 개 팔라를 잘 활용했는데, 나는 어떻게든 체커스를 섞어 넣어보자 결정했다. 패트의 직물 코트를 트루먼 밍크 코트 스캔들에 대비하여 사용하라. 내가 벌어들인 모든 돈을 펼쳐 놓아라. 이 덕분에 사람 마음 끄는 소년 시절의 이미지를 많이 활용할 기회가 생겼다. 우리는 얼마나 가난했는지 그런 모든 것들. 나는 스매터스와 그의 오랜 고등학교 친구 비비 레보소가 그들 부동산 사업계획에 끌어들이는데 넘어가지 않은 일이 기뻤다. 나는 아이젠하워를 포함해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나처럼 자신의 재정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러면 그가 열 받을 것을 알았고, 그 사람 신경을 건드리려고, 불충한 -같은 놈들 그런 일 어떻게 느껴지나 맛 좀 보라고 그랬다. 맙소사, 나는 그에게 몹시 화가 났다! 그 사람과 그 주변의 순진한 모든 아마추어들, 나는 그들 모두 꿈지럭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신에 맹세코 나는 숲속으로 끌려가 적절히 처벌을 받고 다시 가족의 품에 돌아가는 어린 소년처럼 그에게 비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짓은 내 아버지만으로도 물리게 하였다! 나는 이번 선거에 이길 작정이었다! 조지 워싱턴, 네이선 헤일, 루 게릭, 꼬마 고아 애니, 요크 병장을 내가 어떻게 끌어들일 수 있을까 궁금했다. 이 방송은 엄청난 대박을 터뜨려야 했다. 정말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지지를 불러일으키고, 엉클 밀리 팬들조차 숨이 턱 막히게 만들 방송으로.
로젠버그 부부에게 그 연설의 사본을 보냈어야 했는데. 연설 날은 에설의 생일을 불과 4일 앞둔 날이었다 — 아마도 그녀는 감옥 라디오에서 이 연설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편지에서 그 일을 언급했을 테니까. 안타깝다. 적어도 그들 마지막 말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터인데. 결국 우리의 목적은 거의 같았다. 완고하게 의심스러운 미국 대중 - 즉 판사들에게- 우리의 결백을 확신시키는 일. 그리고 우리는 결백했다. 로젠버그 부부는, 국제사회주의자적인 혼란 속에서, 히스, 애치슨 혹은 스티븐슨 만큼이나 그 자신을 배반자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언론은 그 기금에 대해 틀렸다 — 내가 원했던 바는 돈이 아니라, 돈을 주는 사람들이었고, 니켈이면 충분했다. 나는 그들 이름을 그들의 헌신을 원했다. 돈이 내게 무슨 의미인가? 오, 물론, 모든 미국 남자아이들처럼, 아마 당연히 페니 캔디를 팔러나간 줄리어스 로젠버그처럼, 후한 백만장자를 폭력배에게 강도 당해 살해되는 일에서 구해주고 천 달러 보상을 받아 이 돈을 원천으로 명성과 한몫 잡고, 그 부자 남자의 유언에 이름이 오르고 어쩌면 그의 딸, 거리 구석에서 사과를 파는 불쌍한 여자아이로 변장한 그 딸과 결혼까지 하는 꿈을 꾸곤 했지만 이 모든 것은 이제 옛일이었다. 내가 그 돈을 활용해 덕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 돈이 우리가 스프링 밸리에 집을 살 길을 열어주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불해야 할 청구서들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돈에 대해 거의 생각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몰취미하다고 비난하지만 그건 아니고 단순한 욕망의 부족한 탓이다. 내가 부자라면 내가 사고 싶은 유일한 것은 대통령직뿐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 로젠버그 부부와 나는 우리 손이 미치는 매체를 사용하여, 우리 사건의 사실을 대중에게 발표했다. 그러나 로젠버그 부부가 매도된 결백과 독선에 기댄 과장된 자세에 의탁한 지점에서 나는 겸손하고 진실된 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객관적인 자세. 그들이 사형동 감옥 편지들으로 감미롭고 밝았던 함께한 삶은 온통 감미롭고 밝았다는 막연한 낭만적 암시들과 훈계조의 딱딱한 일반성으로 잔뜩 거품을 낸 곳에서(“우리는 함께 보냈던 영광스러운 12년을, 항상 함께 나누고 삶의 기쁨을 추구하며…”), 나는 이름과 장소와 시간을 언급했고, 구체적인 대화 긜고 의심과 어려움의 순간을 보고했고, 내가 소유하고 빚진 모든 것을 다 까발렸다— 단지 자동차가 아니라 1950년형 올즈모빌, 은행 부채가 아니라 워싱턴 리그스 내셔널 은행에 진 4,500달러 부채 — 내가 그 이름, 워싱턴 리그스 내셔널 은행 표명하는 것을 듣자 사람들 마음이 바뀌었다. 나는 트리시아의 나이, 히스 사건, 아브라함 링컨과 일반 사람들, 패트의 결혼 전 이름과 그녀의 존경할만한 공화당 직물 코트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는 저기 앉아서 나를 위해 그 옷을 입고 있었고, 그녀는 대단히 멋져 보였다. 엄청 마르고, 눈 아래의 다크서클조차 나에게 플러스요인이었다. 그리고 체커스 이야기에 이르자, 나는 개가 어떻게 짐 상자에 담겨 볼티모어 유니언 스테이션에 도착하게 되었나 이야기를 하나도 빼지 않고 알려주었다. 볼티모어 유니언 스테이션, 나는 그렇게 콕 집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아이들은 다른 모든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개를 사랑했습니다. 지금 당장 말하고 싶은 말은 이를 두고 뭐라고 말하든 개는 우리가 계속 키울 것입니다!” 하, 그건 정말 감동적이었고, 아직도 생각하면 약간 목이 메일 정도이다. 덕분에 나는 미국 정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부통령 후보 중 한 명이 되었다. 그 이후로는 사실상 캥거루 후보(대통령선거전에서 부통령 후보쪽이 정치적으로 강력한 짝)라 할 수 있었다. 맨 위에 늙은 전쟁 영웅이 포진했든 아니든.
영화계의 거물 대릴 재넉이 나중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본 것 중 가장 기막힌 연기였다”고 말했다. 내게 지지 편지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는데, 30만 통 이상이 워싱턴 공화당 본부에 도착했다. 그 편지들은 현재 “사해 두루마리”라는 라벨이 붙은 상자에 담겨 후세를 위해 휘티어에 보관되었다. 아이크는 굴복하고서 나를 "용감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루스벨트 부통령 후보 시절 커프스단추 갱들처럼 나만의 사냥개 이빨단(Order of the Hound's Tooth)을 만들고 파티를 열었다. 나중에 휠링에서 장군은 나를 껴안고 “장한 아들”이라고 부르며 그의 오른편에 걷게 해 주었다. 나는 사랑과 죽음이 온통 내 주위에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 집에 돌아와 살날이 얼마 없던 어린 아서에게 키스를 받던 순간이 기억났다. 나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좋은 친구 빌!” 나는 노우랜드의 어깨에 파묻혀 울었지만, 내가 진짜 의미한 것은 “엄마! 말 잘 듣는 어머니 개 리처드에요! 나 집에 왔어요!”였다. 사냥개의 이빨처럼 깨끗한. 체커스야 고맙다. 학대받는 개 흉내를 내며 엄마에게 보낸 편지로부터 30년이 지난 때였다 —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돌고 돌아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임의의 우주에서는 아이러니한 패턴들이 불쑥 불쑥 솟아오르고, 때로는 패턴처럼, 이런 것들이 세상을 좌우하고 영향을 끼친다…
친애하는 주인님:
주인님이 나를 맡긴 두 소년은 나를 아주 나쁘게 대합니다. 그들의 개 짐은 너무 늙어서 결코 나와 이야기하거나 놀지 않으려고 해요.
어느 토요일, 소년들은 사냥을 나갔습니다. 짐과 나도 그들과 함께 갔습니다. 숲을 가로지르는 동안 소년 중 한 명이 걸려 넘어져 나에게 넘어졌습니다. 나는 성질을 내고 그만 물어버렸습니다. 그는 내 옆구리를 찼고 우리는 공격했습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동안 나는 나무에서 검고 둥근 물체를 보았습니다. 내 앞발로 쳤어요. 그 속에서 검은 뭔가가 떼 지어 나왔습니다. 온몸에 통증을 느꼈습니다. 나는 뛰기 시작했고 두 눈이 앞이 안 보이게 부풀어 올라 연못에 빠졌습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몸이 많이 아팠어요. 지금 바로 집에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주인님의 충실한 개
리처드
오늘날에도 그 편지는 저릿하게 애가 끓는다. 왜 로젠버그 부부는 그들 서신에서 그런 느낌을 자아낼 수 없었을까? 그 ‘검은 뭔가가 떼 지어’는 지난 2년여 동안 전기의자의 예상에 따른 자기 연민에 그들이 했던 어느 말들보다 더 무서웠다. 에설은 결혼 12주년이자 첫 번째 감옥 생활을 지내던 즈음에 줄리어스에게 “12년 동안 우리는 원칙적이고 건설적이며 건전하게 같이 생활을 한 후에 싱싱의 감방에 앉아 나 자신의 법적 살인을 기다리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라고 썼다. 내가 더 믿을 수 없었던 점은 그 12년 동안 원칙적이고 뭐뭐뭐 하던 세월에서, 그녀가 언급할 가치가 있는 단 하루, 단 하나의 사건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모든 편지를 통틀어 과거로부터 그녀의 마음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단 하나였다. 둘째 아들이 특정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체리오닐라"라고 부르곤 했다는 것이었다. 그 유일한 이미지의 바로 그 외로움이 더욱 마음 뭉클하게 와닿았다. 줄리어스 쪽을 보면, 과거에 대한 그의 회상은 소도시 신문의 부고 기사처럼 읽혔다. 1943년 픽스킬 임대 오두막에서 보낸 목가적인 휴가의 언급조차 없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추정상 수영하고 하이킹을 하고 나무를 자르고 친구들 앞에서 해먹에서 사랑을 나눴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공공연한 급진적 활동을 중단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어쩌면 사실 이곳이 그들이 스파이 훈련 프로그램을 받은 곳이고, 사랑-놀이를 단지 위장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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