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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기 없는 짓/살아남은 이미지

살아남은 이미지 p43~47

by 어정버정 2024. 9. 28.

바르부르크가 1902(초상화 연구에서)과 그 이전인 1893(보티첼리 연구)로 접어든 것처럼, 피렌체 르네상스의 '왕도'를 따라 미술사에 진입한다는 것은 부르크하르트가 그 랜드마크 책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명전반을 통해 구축한 바로 그 개념과 동조하는 입장을 취한다는 의미였다. 이 책의 주제와 논제는 끝없이 해설이 달렸다. 논객들은 이 책의 대담함과 방대한 범위, 그리고 '화려하고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에 갈채를 보냈고, 어떤 이들은 매우 풍부하고 매우 다양한 역사적 자료를 통합하는 방식에 감탄하였다. 반면에 하나같이 유명한 모티브-중세와 르네상스의 대립, 으뜸 위치의 이탈리아, '개인의 발전' -모두 비판 없이 지나지도 않았다. 또한 모든 비평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전히 르네상스 개념에 관한 역사적 논쟁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이러한 압도적인 '지배'로 부르크하르트가 그의 걸작을 통해 신화적인 르네상스를 창조했고, 신화화로, 종국에 하인리히 만이 히스테리성 르네상스라는 견책의 표현을 할 정도로 광신적 추종자를 조장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르네상스의 신화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신화는 르네상스 문화 자체에 내재된 것이며, 부르크하르트는 이를 그런 식으로 분석한 사람이다. “개인의 발전"은 아마도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구조 어느 경우이든, 신화적 구조에서 파생된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지식과 스타일의 영역, 진리와 역사의 영역에서 한층 더한 효과들을 창출했다. '개인'이 르네상스 신화라면, 적어도 <15세기 피렌체> 초상화라는 매혹적인 현실을 창조했다. 이제 여기부터 바르부르크가 출발했다. 신화를 분석하고 가지 친 미학적 효과의 파급력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신화를 (“구체적인 과학으로서) 그 생산성을 측정하고 (유령의 앙상블로서) 해체하는 것이 필요했다.

부르크하르트의 분석은 문화이건 혹은 시대이건, 르네상스가 제우스의 머리에서 불쑥 나온 아테나처럼 완전히 순수하게 개념적으로 '무장'한 상태로 등장할 수도 있었다고 설명하는 몇몇 일반화를 제공했기 때문에 바르부르크의 관심을 끌지 않았다.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개인의 발달'을 인식은 했지만, '발달'-하찮으나마 진화적 모델에 장애가 되는-‘증상의 분석과 정신적 특성, 패러디와 명예 훼손을 분석하면서 이상한 결론을 내렸고, 이 개인들은 프랑코 사체티에서 아레티노에 이르기까지 그 희생자가 되었다. 따라서 부르크하르트는 개인의 발전을 끊임없이 증가하는 해방뿐만 아니라 [개인의] 변태성의 발달이라고도 했다.

이 분석에서 두 가지 매우 다른 해석을 도출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도덕적 설교로, 18세기 비관적 세계관으로 '위대함과 쇠퇴' 모델을 따른다. 이는 당연히 부르크하르트와 쇼펜하우어 사이의 연관성을 알아본다. 그러나 쇠퇴라는 주제에 강세를 두어 결국 부르크하르트를 그저 반동적 이론가로, 스펭글러가 말하는 문화비관주의Kulturpessimismus’적 반민주주의 선구자, 심지어 독일에서 나치즘으로 나가는 길을 마련한 '보수 혁명'의 당파적 신봉자로만 간주한다. 다른 해석은 구조적 해석으로, ‘역사의 판단보다는 역사의 작동을 감지하는 데 열중한다. 바르부르크도 충분히 이해했듯이, 이는 변증법적이란 장점이 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인식론적으로 비옥하게 증식한다. 부르크하르트가 모던 문화고대를 이해하지못하는 그 무능력을 크게 혹평했을 때 그는 '반동적' 심판을 내린 것이 아니라 문화와 기억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문제에 비판적인 자세로 관심을 끌려던 행동에 가깝다. 자체 기억, 자체 생존을 억압하는 문화는 과거 문화에 영구적인 기념 행사에 고정된 문화만큼이나 무력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관점도 내가 보기에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의 개인의 발달- 일반적으로 왜곡과 부정적인 자질을 포괄하여-그 안에 개인의 증상 발달을 담고 있다, 이런 명제에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도덕주의적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은 쇠퇴에 대해 말하는데, 특정 순수성이라는 미명에 숨어, 비록 빙켈만처럼 이를 그리스 기적의 시대에만 유일하게 놓아야만 할지도 불분명해진다. 구조 관점에서 보면 고대가 되었든 르네상스 시대가 되었든 그 시대가 무엇이든 간에 시간이 불순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러한 해석이 바르부르크의 모든 후속 작업에 출발점을 제공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부르크하르트의 분석을 통해 시간의 불순물에 대한 신랄한 개념, 요컨대 생존이라는 개념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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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크하르트는 처음부터 르네상스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여겼던 시대의 복잡성을 저울질 해보기로 결심했고, 레오나르도의 매력적인 과학, 라파엘로의 천사 같은 표현법,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으로 이루어지는 시대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역사적으로도 해롭다고 판단했다. 프로이트가 빠뜨리지-않기라는 '기본 법칙'을 규정하기 반세기 전의 일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가들이 과거의 어떤 것으로부터 스스로 밀봉해서는 안 된다고 썼고, 빈틈이건, 어두운 부분, 대조-주제, 일탈은 모두 그의 탐색의 부분이다. 그런 이유로 그 유명한 개인의 발달은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특징이라고 말한 고대와 현대 미신의 혼합이라는 측면에서 고려해야 한다. (바르부르크는 나중에 루터와 멜랑히톤의 독일를 위해서도 비슷한 분석을 수행했다.) 로버트 클라인이 부르크하르트에게서 르네상스의 두 가지 방향 -‘인간과 세계에 대한 발견이라는 긍정적 정신과 심원하고 난해한 허구의 환상적정신-사이의 확연한 대립을 보는 것처럼, 우리는 변증법적 신통력 같은 것을 인식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데, ‘긴장과 극성을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으로바르부르크는 자기로서는, 각 분석 수준에서 계속 체계화해 나아갔다.

이 모든 것을 참작하여, 그 유명한 고대의 부활을 시간적 양상과 관련하여 순수하고 단순한게 동일한’(예를 들어 동일한 이상적 아름다움’)것의 복귀로 보기는 어렵다. 이는 ‘15세기 이탈리아라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와 맺은-불가피하게 시대착오적인-관계이며 이런 복귀차이, 복잡성과, 변형들과 밀접하게 결부되도록 이끈다. 그것은 오랜 기간의 생존이-부르크하르트는 이 용어로 칭하지 않고 대신 이 고대는 오랫동안 느껴지는 영향을 끼쳤다고 썼다-르네상스를 복잡한 현상으로 만드는 문체/양식의 결정되는 그 짧은 기간과 조우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크하르트가 역사적 개념 재생(renaitre)’과 관련하여-renatire1856년 원고에서 프랑스 동사형으로 언급하였다- 진정한 변증법적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가 고대 과거의 '재현'이라고 부르는 temps-coupure탕쿠퓌르(또는 파열의 시기)활력 잔여물’ (lebensfahige Reste)temps-remous-레무 (또는 소용돌이의 시기) 사이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효과적으로 오랫동안 잠재되어, 인식되지 못한 채 '긴 단절'의 핵심에 자리 잡고 남아 있었다. 고대는 소환하면 그대로 되돌아오는 순수한 시간의 대상이 아니다. 모든 역사적 층위와 문화의 모든 단계들 가로지르는 거대한 영역의 엄청난 움직임, 조용한 진동, 조화로운 파동이다:

고대 세계의 역사, 즉 우리의 삶으로 뻗어 들어온 모든 사람들의 역사는 인간 지식의 분야를 가로질러 계속 울려 퍼지는 근본적인 화음과 같다.

이런 점에서, 부르크하르트가 그처럼 급진적인-그래서 르네상스의 미적 애호가들의 눈에는 아주 가증스럽게-다음과 같은 명제를 썼다는 점이 아주 놀랍지는 않으리라. “르네상스는 그 자체로 유기적 스타일을 창조하지 않았다” (kein eigener organischer... Stil). 이는 무슨 뜻일까? ‘르네상스는 순수하지 않다.’ 예술적 스타일과 살아있는 현재와 회상으로 돌아본 고대 사이의 복잡한 시간성 양쪽에서 그렇다. 19세기에 (시간의 통일성에 쏠린)역사주의나 (스타일의 통일성에 쏠린)미학주의에 대한 이보다 더 날선 비판을 상상할 수 없다.

르네상스는 불순하다. 바르부르크는 나흐레븐과 파토스포멜이라는 특유의 개념 덕분에 이러한 논평을 탐구하고 심화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르네상스는 불순하다. 이 말은 아마도 온갖 이상적인 모습 관련하여서는 한계가 될 수도 있지만, 그 활력의 원천이기 되기도 한다. 그리고 1920년에 바르부르크가 바로, “이질적인 요소의 혼합”(Mischung heterogener Elemente)르네상스의 문명”(Kultur der Renaissance)에서 무엇이 활력에 필수적인지(so lebenskraftig) 정확하게 명시한다-라고 썼다. 이는 피렌체 양식의 복합적”(Mischstil)) 성격을 명시하며, “긴장타협의 끊임없는 변증법의 존재를 암시하며, 그 결과 르네상스 문화는 역사가의 눈에는, 진정한 불가사의한 유기체로 보이게 된다:

 

상충하는 세계관(Lebensanschauung)으로 외딴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사투를 벌이는 대립으로 내몰리고 일방적인 열정을 고취시키면 사회 구조는 멈출 수 없이 무너지지만(Verfall), 그러한 견해가 한 개인 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로를 파괴하는 대신 서로를 비옥하게 하고 인격의 전체 범위를 확장하면 이런 알력은 문명의 가장 숭고한 성취로 이끄는 힘(Krafte)이 된다. 피렌체 초기 르네상스가 꽃을 피운 토양이 바로 이랬다. 메디치가 피렌체의 시민은 중세 기독교적이건, 낭만적 기사도적이건, 고전적 신플라톤주의적이건 이상주의자와 세속적이고 실용적이며 이교도적인 에트루리아 상인이라는 완전히 이질적인 성격들을(eterogene Eigenschaften) 하나로 묶었다. 원초적이면서도 조화로운 생명력(Lebensenergie)을 지닌 이 수수께끼 같은 생명체(ein ratselhafter Organismus)는 모든 심령적 충격을 자신의 정신적 범위의 확장으로 기꺼이 받아들여 여유롭게 발전시키고 활용했다.

 

생존이 역사를 시대착오적으로 만들다

 

르네상스는 불순하다-‘생존의 개념은 바르부르크가 그 불순함의 시간적 유형에 이름을 붙이는 방식이다. 현저하지는 않지만, 부르크하르트의 글에서 생존가능한 잔존” (lebensfahige Reste)이라는 표현은 바르부르크 자신보다 더 일찍이 거슬러 올라, 그러한 개념의 역설-그리고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 내가 보기엔 더 과단성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잔여 에너지의 역설, 전생의 흔적, 간신히 회피하고 거반 진행 중인 죽음의 역설이며, ‘환상의 죽음, 직설적으로 말해서 득의만면 이름 붙인 '르네상스' 문화에 생명력vitalite’의 원칙을 부여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생명력과 시간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생존은 이 생명이 보여주는 형태의 생명시간의 형태를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방식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의 잠정적 가설은 부르크하르트의 생존가능한 잔존에 대한 환기를 넘어, 바르부르크의 나흐레븐은 이미지에 특별히 적합한 시간 모델, 바사리식 친자관계(그런 가족사 소설)와 빙켈만식 향수(이상에 대한 애가)를 종결시킬 뿐만 아니라 역사의 의미에 대한 모든 일반적인 상정을 깨부수는 시대착오적 모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부르크가 이해하는 나흘레븐의 개념은 전체 역사 이론을 끌어들인다. 우리는 헤겔주의에 비추어, 궁극적으로 그러한 개념을 측정하고 판단해야 한다.

우선 바르부르크 자신도 자신의 모든 연구에서 '고대의 생존''중심 문제'(Hauptproblem)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살펴보자. 프리츠 작슬과 자크 메스닐과 같은 그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이자 친구들이 이를 증언하였다:

바르부르크 교수가 함부르크에 설립한 도서관은 인간 지식의 한 가지 분야 또는 여러 가지 분야에 바쳐지지 않고, 일반적이든 지역적이든 일반적인 범주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 해결을 위해 아니 오히려 광대한 범주의 연결된 문제들의 총체를 해결할 목적으로 형성되고, 분류되고, 지향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도서관과 구별된다. 이런 문제는 바르부르크가 젊은 시절부터 그를 사로잡았던 문제이다. 고대는 과연 르네상스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대변하는가? 그들에게 고대의 의의는 무엇이었나? 어떤 영역에서 어떤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을까? 이런 식으로 제기된 질문은 그에게는 순전히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질문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르네상스는 스타일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문화’의 개념을 일깨웠다. 생존의 문제와 고대의 르네상스는 예술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일하게 종교적,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 바르부르크 도서관의 분류상 체계는 여전히 이러한 집착을 증명하고 있다: 거의 모든 주요 섹션은 고대의 생존에 관한 하위 섹션으로 시작하여, 고대 신들의 생존, 점성술적 지식의 생존, 문학적 형식의 생존, 조형적 모티브들의 생존 등을 포괄한다. 프리츠 작슬이 1923년에서 1932년 사이에 출판한 강의집(Vortrage der Bibliothek Warburg)도 모두 이 문제의 지속적인 특징을 담고 있다. 첫 번째 권만 열어보아도 고대의 해석자로서의 뒤러에 관한 글이 보이고(구스타프 파울리 저)와 나란히 아랍 마술에서 헬레니즘적 생존에 관한 연구(헬무트 리터 저), '상징적 형식' 개념에 관한 에른스트 카시러의 유명한 강의, 그리고 '중세시대 고대 형식의 생존'에 관한 아돌프 골드슈미트의 에세이(“Das Nachleben der antiken Formen im Mittelalter”)가 수록되어 있다. 바르부르크 연구소의 모든 서지학적 노력은 고대의 생존 문제에만 오롯이 바쳐진 두 권의 책으로 집대성되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정말 그토록 새로운 문제였을까? 빈켈만과 그의 추종자들의 신고전주의는 이미 19세기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재(Gegenwart)속으로 고대(Altertum)를 투영하지 않았던가? 언스트 곰브리치는 1867년에 출간된 안톤 슈프링어의 저서 현대 미술사 속 그림들Bilder aus der neueren Kunstgeschichte의 첫 장인 중세시대 고대의 생존”(“Das Nachleben der Antike im Mittelalter”)에 관한 텍스트의 영향에 대해 주장했다. 슈프링어가 고대 천을 드리운 조각상을 완벽한 표현의 도구라고 말한 구절의 여백에 바르부르크는 간결한 브라보라는 메모로 동의를 표시했다.

물론 바르부르크는 고대 전통문제에 관한 모든 역사적 문헌들은 샅샅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시각에서 볼 때 이러한 지식은 그의 나흐레븐 개념과 당시 다양한 모습으로 논의되고 있던 다른 모든 개념 사이의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바르부르크의 생존 개념은 어떻게 이전과 현대의 모든 생존 개념과 단절할 수 있었을까? 본질적으로 그것은 그 자체로 어떤 역사적 시대구분에 포개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슈프링어의 나흐레븐은 역사를 시대구분화하여 단순화했고, 이로 르네상스의 '승승장구한' 고대와 대조적으로, 중세에는 생존의 형태로 존재하는 감퇴된고대를 볼 수 있게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르부르크의 나흐레븐은 구조적인 개념이다. 이는 르네상스와도 관련되지만 매한가지로 중세도 배려한다. “각 시대마다 마땅한 고대의 르네상스가 있다”(ede Zeit hat die Renaissance der Antike, die sie verdient)고 그는 썼다. 그러나 그는 대칭적으로 각 시대마다 마땅한 생존이 있다고, 아니 오히려 그 시대에 필요한, 어떤 의미에서 양식적으로 뒷받침하며 보강하는 생존이 있다고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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