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스트라우스가 『구조인류학』 서문에서 제기한 비판은 훨씬 더 가혹해 보인다. 더 급진적이지만 동시에 더 편향적이고, 때로는 부정직이라고까지 할 수 없다 해도, 부정확함으로 그득하다. 그는 모스에 뒤따라 원형주의 그리고 원형주의가 보편주의의 편익을 위해 실체화된 유추와 의사형태를 잘못 사용한다는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타일러에게서 직접 이러한 접근법의 흔적을 찾아나서며, 그는 활과 화살은 하나의 “종species”을, 타일러가 생식이라는 생물학적 연결고리에 근거한 언어로 표현한, 종을 형성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왜냐면 “동일한 두 도구 또는 기능은 다르지만 형태가 유사한 두 도구 사이에는 항상 기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이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각각이 표상 체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말하자면, 바르부르크는 이 첫 번째 주장에 주저 없이 찬동의 이름을 기입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징들의 단체를 경험적 세계의 기본 구조로 만드는 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라우스는, 덜 신중하고 현명하지 못한 걸음을 한발 더 나가, 생존의 곤란한 문제점에 초점을 맞춘 연구들이 “구체적인…경험에서 무의식적 과정에 대해…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쓴다. 그 자신이 몇 페이지 후 “집단 현상의 무의식적 본질” 분석의 사실상 창시자의 지위를 타일러에 부여하여 이 주장을 무효로 돌린다. 그러나 그의 눈에 타일러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이 인류학에 종사한 사람이며, 이와 관련하여 그는 단순히 『인류의 초기 역사 연구』 (1865)의 짧은 구절을 인용하는데 이는 번듯한 그 책 제목에 전혀 주목하지 않은 것이며, 무엇보다도 타일러가 6년 후 『원시 문화』에서 더욱 세세하게 푼 원시 사회의 역사성에 대한 발상을 알아보지도 않은 것이었고, 레비 스트라우스는 그 발상을 분명 프란츠 보아스에게만 독점적으로 그 공을 돌리고 싶어했다. 1952년, 『구조인류학』의 저자는 원시 민족의 역사성은 “우리손이 닿지 않는” [“hors d’atteinte”]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위에서 인용한 타일러의 구절을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바꿔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에도 우리가 직면한 기본적인 질문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여전히 '생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가장 먼저 확고히 규명해야 할 일은 이 개념이 진화론적 교리에서 혹시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그 관점 면에서 그리고 무슨 쟁점이 이에 달렸는지 그 양측에서- 유래하였는지 보는 일이다. 타일러가 “문화의 성장과 쇠퇴”를 중점으로 다룬 그의 책 『인류의 초기 역사 연구』 일곱 번째 장에서 다윈에 대한 언급을 자신의 텍스트에 간간이 섞었을 때, 쟁점이 격론으로 위태로우리란 점은 뻔하다. 그는 이 시점에서 인간의 진화 대 신성한 숙명, 즉 『종의 기원』대 『성경』을 두고 결승전을 벌여야 하니까. 그는 '발달주의'와 종의 개념과 이의 연관성 대비 종교적 퇴화 이론과 원죄 개념과 이들의 연관성에 맞서 재건해야만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분명히 피력해야 할 점이 있다. 타일러가 텍스트에서 이러한 언급들을 시작했던 시점에, 그는 아직 “생존” 관련 어휘를 꼼꼼하고 명정하게 구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록 진화에 대한 논쟁이 그의 전반적인 인식론적 지평을 구성하고 있지만, 타일러는 생존에 대한 개념을 짜맞추는데 있어, 다윈과 스펜서의 학설과 연관하여 자신의 독립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자연 선택은, 생물학적 혁신을 보장하는 '적자생존'을 증명하는 반면, 타일러는 생존에 역으로 접근하여, 가장 '부적합하고 부적절한' 문화적 요소, 진화하는 미래가 아닌 지나간 과거의 짐꾼들로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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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생존은 오직 증상, 일시적인 방향 감각 상실의 짐꾼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결코 목적론적 과정, 즉 '진화적 방향'의 전제 지표들이 아니다. 물론 더 근원적인 상태, 그래서 더 억눌린 상태에 대해 증언을 해줄지언정, 진화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단적 가치는 있지만 예후적 가치는 전혀 없다. 마지막으로 타일러에 따르면 문화 이론은 신학에 기반두지 않듯이 생물학에도 기반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그에게 '야만인'은 하나님 형상의 타락의 예가 아니듯이 원시 인간 집단의 화석 역시 해당되지 않는다. 그의 이론은 오히려 ‘역사적 그리고 문헌학’적인 관점을 견지했는데, 이로 바르부르크가 이에 이끌렸던 그 매력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바르부르크의 생존(나흐레븐) 개념은 처음에는 인류학적 사안들과 진화론자 이론들의 중심 선입견들이 주요 요소로 들어있던 인식론적 영역에서 개략적으로 밑그림이 잡혔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바르부르크는 “19세기의 사람”으로 남아 있다, 단정하고, 따라서 그의 미술사는 노화되었고, 그 기본 이론적 모델은 구식이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이 단순화는 잔혹하다. 그리고 부정직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이런 모습은 2세대의 도상학자들이 너무 ‘유령/공상’같아서 받은 대로 '적용'할 수가 없는 세습재산을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준다. 최악의 경우, 이러한 단순화는 나흐레븐 개념이 열었던 이론적 통로들을 일일이 다시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진화론자' 바르부르크, 그게 무슨 뜻일까? 다윈을 읽었다는 뜻인가? 그 점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문도 없다. 그가 예술 분야에서 ‘진보에 대한 견해’을 장려하고 “지속주의자(continuiste) 시간 모델”을 채택했다는 뜻인가? 진실과 동떨어져도 한참 동떨어졌다. 물론 진화론은 생명과학에 ‘시간의 문제’를 도입했고, 여전히 라마르크의 사고의 틀을 구성하는 '우주의 긴 지속 시간'-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이 붙인 말이다-을 넘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시간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시간대/시대의 문제’, 말하자면, 화석, 배아 또는 흔적장기 등의 예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시간적 양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또한 파트리크 토르Patrick Tort 는 '진화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허버트 스펜서의 철학을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에 밀접하게 기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완전한 실수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윈 이론은 생물 종의 출현이 변이의 과정에 종속된다는 생물-생태학적 변형 이론이며, 전자, 스펜서는 역사의 의미에 대한 신조, 더 나아가 이데올로기로서-19세기 산업계와 지배층 사이에 널리 퍼진-이 이념의 결론은 '종의 기원'과 여러 측면에 대조가 된다.
오해는 정확히 말하면 생존이라는 개념에서 돋아난다. 다윈의 책 다섯 번째 판본에서야 처음으로 “적자의 생존/survival of fittest”이라는 스펜서의 문구가 소개되었다. 오늘날 인식론에 관심 두는 연구생들은 (타일러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조심스럽게 분리해서 생각했던) 이 두 단어의 연관성에서 이론적 혼란만 본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선택’이 ‘생존’으로까지 후퇴하게 된다: 적자, 강자가 다른 것들을 견뎌내고 번식한다. 이 법칙이 역사 및 문화 세계와 관련하여 유의미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다윈이 아니라 스펜서에게서 나왔는데, 다윈과 달리 스펜서는 문명화에서는 자연 선택에 반대되는 방식,즉 “부적합”해지는/비적자를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부르크는 의심할 여지 없이 다윈주의자이지, 스펜서적 의미의 진화론자는 아니었다.
바르부르크에게, 나흐레븐은 ‘역사적 시간 개념을 복잡하게 뒤얽히게 만드는데’, 문화의 세계에서 부자연스러운, 구체적, 시간적 양식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 사용될 때만 의미가 통했다. 예술의 역사를 ‘자연 선택’에 바탕을 두는 일은, 즉, 약세인 양식들을 연속적으로 제거하고, 이러한 제거를 통해 변화를 부여하거나 완전하게 되고 역사에 목적론적 목적이 되는 것은 바르부르크의 기본 프로젝트나 그의 시간적 모델에서 터무니없이 동떨어진 논거이다. 바르부르크식 용어로 이해하여, 살아남은 형태는 경쟁자가 죽은 후에도 의기양양 잔존하여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생존은 ‘자신의 죽음’을 증상으로서, 그리고 유령으로서 살아남는 것이다. 역사의 특정 시점에 사라졌다가 훨씬 후, 아마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나타나며, 따라서 “집단 기억” 속 여전히 잘 정의되지 않은 (어중간한) 림보로 살아남아 있던 것이다. 이런 발상과 스펜서의 이른바 사회적 다윈주의의 '합성적', 권위주의적, 고도로 체계화된 개념만큼 동떨어진 것도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생존 발상과 생물학적 시대의 자기모순적인 상호침투와 복잡성에 관한 다윈의 일부 서술 사이의 연관성을 추적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흘레븐은 진화론의 틀 안에서 특정 사례는 증상적 해석으로 허용하는 시간 모델, 즉 연속성을 강조하는 모든 적응 도식에 어려움을 창출하는 모델과-동화되지는 않겠지만-비교될 수 있다. 진화 이론가들은 '살아있는 화석', 생존해 있지만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생물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이들은 “누락된 연결고리”, 즉 변이의 이전 단계와 최근 단계 사이에 든 그 중간 형태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그들은 ‘퇴화rétrogression’라는 개념을 통해 ‘긍정적’ 진화와 ‘부정적’ 퇴보를 서로 대립시키는 일을 거부했다. 그들은 또한 “범시대적panchronnics 형태들”-살아있는 화석이나 생존하고 있는 형태들, 즉 화석 상태에서 널리 발견되어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지만 특정 조건에서 살아있는 유기체의 상태로 갑자기 발견되는 생물체-뿐만 아니라 “이異시대성,” 이질적인 발달 단계가 혼합되어 발견되는 생물체의 역설적인 상태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왔다. 자연 선택과 유전적 돌연변이의 정상적인 과정이 새로운 종의 발생을 설명할 수 없을 때, 그들은 심지어 “희망적 괴물”, 어떻게든 극단적으로 분기를 한, 아주 독창적인 진화 계통을 낳을 수 있는 “비경쟁적 유기체”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바르부르크의 나흐레븐은 진짜 '살아있는 화석'과 '퇴행적' 형태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이는 “이시대성”을 허용하고 실제로 “희망적인 괴물”을 허용하여, 예를 들어, 몸통이 둘이고 발이 여덟 개인 란세르의 거대한 암퇘지처럼, 뒤러의 판화에서 이를 본 후 바르부르크는 자신이 “예언자 같은 괴물의 세계”(Region der wahrsagenden Monstra)라고 칭하던 관점에서 논의했다. 그러나 ‘진화론자’라는 수식어가 바르부르크의 작품처럼 실험적인-그리고 또한 불안정하며 체험적인-작품에 붙을 때 어떤 오해가 생길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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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착오적이고 ‘상상초월적인 연구 대상’을 더 잘 에두르기 위해 바르부르크는 다른 모든 선구자들과 마찬가지의 일을 벌여, 이질적인 모방물/차용물들을,“좋은 이웃” 접근 방식을 사용하여 각각 다른 모든 것들과 일일이 대조하여 위치를 재조절하여, 하나의 체계로 꿰맞췄다.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그가 티토 비놀리의 이단적 진화론을 사용했다고 –과대평가하기도 했지만- 적발했다. 이러한 실증주의자의 원천은 예를 들어, 칼라일의 낭만주의와 나란히 놓아야 한다. 이로부터 바르부르크는 항상 생존 현상을 인지하는 데서 일어나는 ‘역사의 의문 제기’에 호의를 보여 더 많은 논증을 이끌어냈다. 칼라일이 바르부르그에게 끼친 영향은 '상징의 철학'이나, 곧 다시 소개할 『사르토르 레사르투스Sartor Resartus/의상철학』라는 기이한 책에서 찾을 수 있는, 의복에 대한 철학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다. 같은 맥락에서 칼라일은 레싱, 헤르더, 칸트, 쉴러, 그리고 괴테를 포함하여, 독일 사상 전체와 대화하면서 진정한 역사 철학을 스케치했다.
그것은 거리의 철학(거리가 져 멀리 있는 것과 우리가 접촉하게 하는 역사)과 경험의 철학(본보기를 통해 가르치는 철학관으로서의 역사)이었으며, 예언적이면서 동시에 회고적인, ‘시대상 비전’의 철학이었고, 식견 깊고 신중한 역사에 대한 비판이자 예술적 역사에 대한 찬사였으며, 항상 한계와 알길없는 깊이를 찾아 헤매는, 칼라일 자신이 “쌍곡선점근선적”이라고 정의한 ‘시대의 기호(signs of Times)’에 대한 이론이었다. 그는 사소한 의미에서 역사를 연속적이고 서사적이며 선형적인 것으로 여긴 반면, 칼라일은 시간을 무수히 많은 동시적 행위와 “덩어리solids”들로 구성된 회오리라고 말했고, 이를 “존재의 혼돈”이란 말로 풀어놓았다.
1890년 빌헬름 딜타이가 자신의 “역사적 이성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이 역사 철학에 대해 언급했다는 사실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아주 다른 방면들을 통해, 서로 많은 점에서 의견이 갈렸지만, 칼라일과 딜타이는 젊은 바르부르크는 몇 가지 개념적 도구들을 갖춰주었고 나중에 모습을 새로이 드러내던 ‘쿨투르비센샤프트’의 시간적 모델을 구성하는 데 조금씩 사용이 되었다. 미술사를 인류학으로 확장 개방하는 일은 그 자신 이해를 도울 도안들, 그 자체 결정요인들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르부르크는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19세기 말 실증주의 역사가 또는 “전문가들”이 프랑스의 살로몬 라이나흐Salomon Reinach와 앙리 베에Henri Beer, 독일에서는 빌헬름 딜타이와 바르부르크의 스승인 칼 람프레히트 같은 확장된 쿨투르게슈테의 지지자들과 대치하며 벌이던 논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진화론이 그 자체의 위기, 그 자체의 내부 비판을 낳은 것이 아니라면 이 차용과 논쟁의 놀이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정설 역사의 모델들을-서사적 모델, 시간적 연속성 모델, 객관성의 달성 가능성을 전제로 한 모델 등- 확대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하고, 형태 ‘기억’ 이론-도약과 지연, 생존과 시대착오, 욕망과 무의식적 동기로 구성된 이론-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며, 아비 바르부르크는 역사적 “진보”와 “발전” 바로 그 개념으로 결정적인 파열을 이룩하였다. 따라서 그는 단순히 생존 현상의 중요성을 감정하고 인식하여 진화론을 해체하고서, 진화론을 그 자체 진화론에 대조하였다. 이러한 나흘레븐의 사례들에, 그가 특유의 정교함으로 상술한 내용을 이해할 목적으로, 이제 우리의 주목을 돌려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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