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일들을 대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시간을 갖고 늑장을 부리는, 미루는/연기하는[différer] 길이 있다. 피렌체에서 바르부르크는 이미 예술의 역사를 “연기”하고 있다. 그는 자기 미화로 자만하는 “역사”의 바사리식 시간이나 “역사의 보편적 의미”라는 헤겔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을 취하여 그렇게 해낸다. 그는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에 새로운 유형의 관계를 창조한다. 이를 위해 그는 예술 자체의 전통적인 영역을 샅샅이 뜯어보고 전복한다. 우피치 미술관이 더 이상 그에게 충분하지 않자, 그는 수많은 개인 ‘리코르단체(ricordanze회상)’, 회계 장부, 공증된 유언장 등 그런 문건들의 비계층적인 기록 보관소의 세계, 아르키비오(Archivio)의 세계에 몰입하기로 결심한다. 따라서 1481년에 기증자 자신의 찬조를 근거로, 혹은 피렌체 부르주아의 마지막 유언을 바탕으로 만든 봉헌 이미지에 대한 지불 통지서는, 그의 눈에는 르네상스의 역사를 재창조하는 데 적합한 가슴 뭉클하면서도 무한한 재료의 요소가 된다. 이것은 그 안에서 아카이브는 죽은 자의 목소리에 대한 중요한 물질적 자취들로 취급된다는 점에서, 이미 “유령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이다. 바르부르크는 “이미 읽고 해득된 아카이브 문서”를 이용하는 목적이 “귀 기울이지 않았던 목소리의 어조와 음색을 복원하는 것”(den unhérbaren Stimmen wieder Klangfarbe zu verleihen)이라고 썼는데, 고인의 목소리이나, 여전히 누워 기다리며, 단순히 아키비오에서 발굴된 친밀한 15세기 일기 글 자체 속에 또는 특정 절묘한 표현 방식 속에 잔뜩 웅크리고 감겨있는 목소리이다.
유령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 자체는 시간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기에, 불완전한 부분이거나 허상이 되어버린 인류학적 퇴적의 역동적 과정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따라서 첫 번째 근사치로, 바르부르크가 특히 열정적으로 조사한 피렌체 은행가들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이미지는 유령의 개체군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여긴다. 흔적이나 자취나 거의 보이지 않으나 모든 곳에서 산재 된 유령들: 출생에 관한 점성술적 화제에서, 사업상 편지에서, (기를란다요가 자신의 이름을 땄던 바로 그) 꽃 화환[guirlande]에서, 당대의 패션과 관련된 세부 사항, 예를 들어 벨트 버클이나 여성의 시뇽/틀어올린 머리의 말린 모양에서 보인다.
유령같은 귀환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 자체는, 시간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고 남은, 불완전한 부분이거나 허상이 되어버린 인류학적 퇴적의 역동적 과정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따라서 첫 번째 근사치로서 이미지는, 바르부르크가 특히 열정적으로 조사한 피렌체 은행가들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유령 주민들 중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여긴다. 흔적이나 자취나 거의 보이지 않으나 모든 곳에서 산재 된 유령들: 출생에 관한 점성술적 화제에서, 사업상 편지에서, (기를란다요가 자신의 이름을 땄던 바로 그) 꽃 화환[guirlande]에서, 당대의 패션을 언급하는 세부묘사에서, 예를 들어 벨트 버클이나 여성의 시뇽/틀어올린 머리의 말린 모양에서 보인다.
이러한 인류학적 파종은 분명히 다양한 관점, 접근 방식, 역량을 필요로 한다. 함부르크에 위치한 인상적인 바르부르크 문화과학도서관은 이러한 인식론적 배위/대체의 부담, 무한한 인내를 요구하는 부담을 떠안고, 끊임없이 확장되고 변경되는 부담을 짊어질 운명이었다. 일찌감치 1889년부터 바르부르크가 구상하고 1900년에서 1906년 사이에 지어진 이 도서관은 일종의 최대명작(magnum opus)으로 설립이 되었는데, 그 입안자는, 프리츠 삭슬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 안에서 바쁘게 자신의 '사유-공간'(Denkraum)을 구축하며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길을 잃었다. 1929년 즈음에 6만 5천 권 책을 보유하던 이 뿌리줄기 같은 공간에서 학문으로서의 미술사는 통제된 방향 상실의 혼미한 시련을 겪었고, 학문 간의 변경을 접하는 곳곳마다 도서관은 ‘연결 고리’를 구축할 길을 찾았다.
그러나 이 공간은 여전히 “이름 없는 과학”을 ‘작업 중인 도서관’이었다. 따라서 ‘작품을 위한’ 도서관인 동시에 작업 진행 중인 ‘작품’의 도서관이기도 했다. 프리츠 삭슬은 도서관이 무엇보다도 질문의 공간이자 문제를 기록하는 장소이며, -그래서 우리의 목적에 매우 중요한-역사와 ‘시간에 대한 질문’이 그 정점에 서 있는 복잡한 연결망을 위한 공간이라는 말로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 “질문의 도서관이며, 그 특유의 성격은 그 분류가 문제 속으로 들어가도록 돕는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도서관 정상(an der Spitze)에 역사 철학에 관한 구획이 위치한다.”
살바토레 세티스의 주목할 만한 논문에서, 바르부르크가 학생으로 있던 스트라스부르 대학 도서관을 비롯하여, 도서관의 실제 모델들을 재건하였고, 겸사겸사 19세기 말 지식의 분류를 둘러싼 논쟁들로 공급된 이론적 전후 맥락도 재구성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바르부르크가 도서관에서 궤적들에 대해 쉴새없이 되새김질하던 많은 단계들 그리고 도서관에서 “장소들”을 추적하였고, 그것이 나흐레븐 데어 안티크(Nachleben der Antike 고대의 생존), 아우스드럭(Ausdruck 표현), 므네모시네(Mnemosyne/기억 혹은 기억의 여신)과 같은 중요한 용어가 시사하는 근본적인 문제와 씨름하는 도중의 함수임을 증명하였다.
이는 이러한 방식으로 구상된 도서관이 어떻게 대체/변위 효과를 낼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체험적 태도-말하자면, 답의 근거가 되는 공리를 사전에 알고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 사유 실험-는 이의 재구성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들의 지침이 되었다. 학제 간 융합을 조직하려고 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다시 한 번 언어학적 톱니바퀴와 철학적 모래알의 어려운 상접을 전제로 한다. 또한 진짜 ‘지식 분야들의 고고학’를 창조하는 일을 전제한다. 이는 오늘날 '인간 과학‘이라고 불리는 학문과 연결이 되어 있는데-처음부터 형태와 상징이라는 이중 질문을 중심에 둔 이론적 고고학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종류의 기획은 (증거와 반증이 동시 존재하는) ’아포리아‘식 상황을 산출하였다. 애초에는 한 사람과 하나의 질문들의 세계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런던의 바르부르크 연구소의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던 사람이 여전히 장담하듯이, 제작자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작업 도구를 사용하면서 매우 이상한 느낌이 스민다. 바르부르크 도서관이 세월의 영향을 너무도 잘 잘 견뎌내었다면, 그가 제기한 질문의 유령들이 안정적인 집도, 어떤 안식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역사가의 장례식 추도사에서, 에른스트 카시러는 아주 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열린 어느 아우라 넘치는 도서관의 특성에 대해 한 페이지 가량의 장엄한 글을 썼다. “원래의 영적 외형구성”들이 “서식하는” 도서관에서 그의 표현대로, 귀신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이름도 없는”, 있음직한 문화의 고고학이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생소하고 기묘한 일은 아포리아의 오점 같은 것이 더불어 따라붙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바르부르크는 지식 분야들간의 고리를 증식시킨다. 말하자면, 이미지의 정신 나간 중첩/과잉결정overdetermination(인자)에 대한 가능한 반응 사이의 연결들을 증식시킨다. 그리고 이 증식과 관련하여 그는 아마도 선택하지 않고, 미루고, 아무것도 잘라내지 않기를, 모든 것을 고려할 시간을 갖기를 꿈꾸었을 것이다-여지없이 미친 짓이다. 이 얽히고설킨 문제들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을 수 있을까? 이미지 결정론의 문제로 이뤄진 “장어국”에서 어떻게 자신의 방향을 잡을 수 있을까?
질문을 제기하는 또 다른 방법, 일을 대체/변위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또 다른 스타일, 또 다른 템포. 즉, 시간에 늦거나-아니 오히려 시간에 늦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문제의 가장자리를 따라 진행하며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분기하여’, 갑자기 갈래를 쳐 나가고, 더 이상 아무것도 미루지 않는 것이다. 문제와 관련된 ‘차이점’들을 직접 직면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지반고(地盤高)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아키비오나 도서관은 지형 위에 떠다니는 순수한 추상물이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지식과 문명의 보고는 다양한 지층들을 함께 모아들이고, 사람은 실제로 아카이브에서 다른 아카이브로, 한 지식 분야에서 다른 지식 분야로 ‘지형 내에서 그 움직임’을 따라다닐 수 있다. 그러나 분기한다는 것은 그 외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분기는 ‘지형을 향해 나아가고’, 지반을 가로지르며, 제기되는 질문들로 촉발되는 실존적 시련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그것은 자신의 관점의 대체를 겪어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대상에 대한 정의를 대체하는 수단으로 자신을 받치기 위해 주체로서의 위치의 대체를 겪어야 한다. 바르부르크는 자신이 “낭만적”(der Wille zum Romantischen/낭만주의 의지)이라고 분류했던 뉴멕시코 여행의 이유로, 무엇보다도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동안 미국 동부 해안에서 관찰한 현대 문명의 공허(die Leerheit der Zivilisation)에 대한 강력한 반발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미학화된 미술사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감”과 연결된 그리고 상징적 분야로 열린 “예술의 과학”-또는 당시에 그가 붙였던 말대로 문화 분야 전반(Kunstwissenschaft)에 대한 그의 탐구와 연결된 타탕한 “과학적” 이유(zur Wissenschaft) 역시 일조하였다.
바르부르크의 “인도 여행”은 자주 연구되었지만, 그가 정확히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해답이 어느 수준 나오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대체를 갈피 못잡고 어리둥절하거나 심지어 충격을 받아 심리적 위기의 한가운데 선 어느 미술사가의 순전히 부정적이고 ‘부적절한’ [deplacé] 행위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해석은 독회들은 한쪽으로 제쳐둔다면, 이러한 대체/전위의 방법론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를 이룬다. 그래도 바르부르크가 이 여행 중에 ‘어떤 유형의 대상을 마주쳤는지’, 어떤 유형의 대상이 “예술사”라는 표현 자체에 포함된 ‘이 "예술" 대상을 대체하기에’ 적합한지 질문해야 한다. 대칭적으로, “예술사”라는 표현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용어로 "역사"를 대체하기에 적합한 시간을 바르부르크가 그곳에서 경험했는지 질문해 보자.
그렇다면 바르부르크는 이 경험의 과정에서 어떤 대상을 마주쳤는가? 1895년 당시에는 아마도 아직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 ‘이미지’이지만 또한 행위(즉, 물질적, 사회적)이자 상징(즉, 심리적, 문화적)이었던 그 무언가. 한마디로 이론적인 '장어 수프'였다. 뱀 더미, 즉 오라이비(애리조나 원주민 마을) 의식에서 실제로 떼 지어 꿈들대던 바로 그 생물 그리고 상징적으로 천상의 번개 붓질로 쏘아 올린 바로 그 뱀(그림 37과 73~76), 그리고 마찬가지로 뉴멕시코의 파충류 종유석의 환영에서 그리고 아코마에서 기도하는 인디언들이 관찰되기 전 바로크식 제대 뒤 토사드(꼬아서 만든 끈)에서 이미지로 나타났던 것들이다.
행위, 이미지, 상징의 단단한 '구체화'가 제기하는 문제는 바르부르크가 이들과 그가 공들이고 있던 피렌체 르네상스 시대의 서유럽 대상들 사이에 동등성 또는 차이를 확립할 기대를 걸고 있는지 알려고 드는 문제가 아니다. 피터 버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는 거기에 르네상스와 르네상스의 축제 행사들과 아폴로의 묘사들과 뱀 파이톤의 묘사들, 디오니소스적 요소와 이교도적 요소들의 유비를 확립하기 위해 갔던 것일까? 아니면 지그리드 바이겔의 논쟁처럼 그는 거기에 서양의 고전적 관점을 완전히 뒤집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갔던 걸까? 답은 변증법적이어야 한다. 바르부르크는 그의 말마따나 틀림없이 모든 문화 현상에서 나타나는 양극성의 근거를 기대하던, 알레산드로 달라고의 표현을 빌려, “낯섦의 가시적 통합”에 답이 있다. 그에게 이 기초는 공동체적이고 원형적인 것이 아니라 ‘차등적이고 비교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으리라.
그렇다면 왜 이 대상이 미술사 학문이 전통적으로 연구해 온 “예술” ‘대상을 대체/전위하기’에 적합한 것이었을까? 엄밀히는 그것이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복잡한 집합체-무더기, 엉긴 복합체 또는 관계의 뿌리줄기라는 사실이다. 두말 나위 없이 이것이 바로 바르부르크의 일생 내내 인류학적 질문에 열정적으로 몰두하는 모습을 선보인 주된 이유이다. 예술의 이미지와 작품을 인류학적 질문의 영역에 기반을 두고 묶는 것은 미술사를 대체하는 첫걸음이었으며 또한 미술사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도록 이끄는 방법이기도 했다. 역사학자로서 이전의 부르크하르트처럼 바르부르크는, 칸트나 헤겔이라면 그랬을지 모를, 가장 기본적인 지식의 수준에서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기를 거부했다. 그에게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법칙을 도출하거나’ 인간 능력의 본질(이미지 생산해내는 능력) 또는 지식 영역에서 본질(시각 예술의 역사)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적절한 관련 특이점(singularity)들을 배가시키는 일이 문제였다. 요컨대, 그것은 그때까지 이들 대상들이 맺는 관계를 결국 해치면서까지, 그리고 그 관계에 의해 성립되는 것들로- 마치 페티시스트가 신발을 신은 것처럼 대상에만 관심을 쏟았던 학문에 ‘용인되는 현상들의 영역을 넓히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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