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잘데기 없는 짓/살아남은 이미지

살아남은 이미지 9-13

by 어정버정 2024. 8. 24.

 

***

여기 우리의 예술사 발명가가, 고대 절세미인들의 죽음에 탄식을 하며, 자신의 대상을 두고 애도에 빠졌던 그가 등장한다. 여기 자신의 체계적 정신esprit de systéme’을 지닌 미학자, 우리의 역사가가 등장한다. 유령을 믿지 않는 이 역사가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이야기- 또는 그가 믿는 대로 과학-에서 부재하는 대상을 그려내며 황송스럽게도 신빙성을 부여할 수 밖에 없던 오래된 라틴 어와 그리스어 묘사에 입각하여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혼자] 대상들을 상정한다. 여기 마침내 '예술의 본질'로 괴롭히고, '좋은 기호'(der gute Geschmack)이라는 원칙에 입각한 찬사로 그리고 아무리 어떠한 신체의 변형'이라도 변형에 절대적인 거부로 우리를 공격하던-그가 모방에 관한 반주의 놀라운 구절로 등장한다. 거기에 '성병과 그 딸, 영국식 병폐',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예단한 악폐에 대한 자신의 공포를 표현한다. 그리고 마치 이러한 것들이 어떤 모호한 공통의 병상(病狀)으로 연결된 것처럼, 빙켈만은 파토스/비애감에 대한 거부감을 아주 철저하고도 과격하게 표현한다. 비애감은 이상, 영혼의 위대함과 고귀함의 특징인 평온을 전제로 하는 이 이상을 파괴하고 신체를 변형시키는 영혼의 질병이라고 여긴다. “몸의 상태가 고요할수록 영혼의 진정한 성격을 더 잘 묘출할 수 있다. 이런 고요에서 너무 벗어난 모든 자세들은 영혼은 가장 본질적인 상태에 있지 못하고 동요되고 어거지의 부자연스러운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영혼은 격렬한 열정 속에서 보이면 더 분명하고 뚜렷하지만, 조화와 평온의 상태에서 보면 위대하고 고귀하다.”

반추에서 일반적인 가설로 제시된 것은 고대 미술사에서는, 그리스 예술의 특정 영역에 적용이 될 것이다. 따라서 윈켈만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규범의 관점)”라는 말 대신 그리스인들이 익숙했다고 쓰는 정도로 만족한다. 물론 이 관점은 역사적이지만, 그 안에 표현된, 아니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 안에 스스로 드러나는 것은 동일한 본질이다.

 

표현은, 제한적인 의미로 보나 확장된 의미로서도, 얼굴의 특징, 그리고 자세를 변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그들 형태를 바꾼다. 변화가 클수록 아름다움에 불리한 영향을 미친다. 이것 때문에 고요함은 여기에서 관찰되는 원칙 중 하나였다. 왜냐면 플라톤에 따르면 고요함은 슬픔과 환희의 중간 상태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똑같은 이유로, 고요함은 바다의 고요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에 가장 적절한 상태이다. 또한 경험으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몸가짐과 행실이 조용하다는 깨닫는다… 게다가, 또한 사람과 짐승 모두 고요와 편안한 휴식의 상태는 잔잔히 가만히 물결이 일지 않을 때만 강이나 호수의 바닥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진정한 본성과 특징들을 조사하고 발견할 수 있는 상태이며, 결과적으로 예술도 자신의 독특한 본성(das Wesen der Kunst)을 고요에서만 표현할 수 있다.

 

Albrecht Durer, Death of Orpheus, 1494. Drawing. Ham burg, Kunsthalle.

 

***

 

이런 소개 정도로 고대 예술사와 그 전반적인 유산으로 대표되는 사고의 지점에서 대단히 문제 많은 성격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체계를 세우지만 거듭 완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논문이나 이론적 명제에 대한 모든 확언에는 곧 반박이 뒤따른다. 따라서 빙켈만은 미술사를 단순한 취향의 판단과 대비시키지만, 미학적 규범은 그의 역사 서술의 모든 단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자신의 역사가 과거의 '잔해'를 객관화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강력한 주관적 요소가 그의 학문적 글쓰기를 이끄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올림픽 스타디움에 등장하는 나 자신을 상상해본다.” 빙켈만이 옹호하는 예술사는 본질과 생성/발달 과정(becoming)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그 안에서 역사적 과거는 발견되는 일 못지않게 발명이 된다.

이 현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빙켈만이 현대적 의미의 미술사라는 용어를 발명했다는 말은 콰트르메르 드 퀸시 이후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모순이 아닌가? 이미지 사회학자, 도상학자, 전자 현미경을 사용하는 고고학자, 분광학적 분석에 익숙한 박물관 큐레이터는 여전히 이러한 철학적 문제에 부담으로 고민하고 있는가? “과학적학문으로서 미술사의 위상이 너무 확고해져 우리가 여전히 그러한 사유의 세계에 신세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느 쪽이 수증자의 유산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대미술사는 어떤 복잡한 문제의 매듭을 우리에게 계속 던지고 있는가?

빙켈만의 작품 제목 자체가 삼중의 매듭, 즉 역사학의 매듭(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예술의 매듭(어떻게 구분하고, 어떻게 이를 바라볼 것인가?), 고대의 매듭(어떻게 기억하고, 복원할 것인가?) 세 번 묶인 매듭을 소개하고 부과한다. 물론 빙켈만의 '체계'는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적이지 않으므로 변증법적 구성이나 그런 비슷한 개념으로 간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매듭으로 묶인 세 가지 결합들을 하나로 붙드는 중요한 개념이 존재한다. 이런 일종의 마법의 단어는, 모든 모순을 해결한다, 아니 오히려 모순을 눈에 안 띄고 넘어가도록 만든다. '모방'이라는 이 단어는 빙켈만 체계의 중심 요소를 이루고, 이 덕분에 모든 차이를 연결하고 모든 심연을 넘나들 수 있는 중심축, 경첩을 형성한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빙켈만 저작의 결론에서 빙켈만은 커다란 골을 열어젖힌 것 같다. 고대 예술의 상실과 그 '소원의 대상'의 귀환 불가능성과 관련된 우울한 골짜기, 욕망(분쉬Wunsch)으로부터 애도를 갈라놓는 골, 그리스 조각상의 '원본'(우르딜더Urdilder)과 로마 '사본'(코피엔Kopien)을 분리하는 골을 열었다. 그러나 반추를 필두로, 그의 작품의 다른 곳에서는 모방이 이러한 골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는다. 신고전주의 예술가가 일삼던, 고대인들의 모방은 애도를 넘어 욕망의 불씨를 다시 지필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모방은 원본과 그 발상을 모조품 사이에 연결고리를 창조하여 '예술의 본질', 발상이 말하자면 되살아나도록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스 예술의 범주적 부재가 알렉스 포츠의 표현을 빌면, 르네상스가 될 수 있었고, 나아가 강렬한 존재감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모방 덕분이다.

현시절의 모방이란 잃어버린 원본을 되살려활발한 혹은 지금 현재의 존재를 원본으로 복원시키는, 진정으로 존재와 현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모방의 대상이 사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 그 자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빙켈만 역사의 우울한 측면이 그리스 예술을 애도의 대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우리가 소망하는 대상의 그림자 같은 윤곽만 남았다”-것으로 만들었다면, 광적인 측면은, 혹시 내가 이런 과감한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나, 이 예술을 잡아야 할 이상, “예술의 본질이라는 범주적 긴요한 엄명, 즉 오로지 고대의 모방을 통해서만 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물론 모방은 매우 역설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바로 그 역설로 엄밀히 빙켈만은 그 유명한 피루엣을 능숙히 선보이며 선회를 한다. “우리가 위대해질 수 있는, 아니, 가능하다면 모방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고대인을 모방하는 것이다.”

이는 상당한 성과이며, 그 결과들 역시 상당할 것이다. 이들은 바로 그 뼈대에, 전체 진취적 기획의 시간적 건축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빙켈만이 구성하는 예술사는 결국 ’Wesen der Kunst(예술 본질)의 이상적 시간위에 변화(Verdnderung)의 자연적 시간을 덮어씌우는 일로 마무리 짓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바로 그가 '삶과 죽음''위대함과 쇠락'의 도식을 르네상스 또는 '신고전주의적' 복원의 지적 과제와 공립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업적의 결정적인 요소, ‘모방은 이 르네상스이상만을 모방하도록 허용한다는 점을 꼭 짚어보아야 한다. 어떻게 여기서 사람들이, 재설정되었으나 여전히 지니고 다니는, 세 가지 기본적인 바사리식 이상주의의 마범의 단어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어떻게 사람들은 이상적 시간에 겹쳐 올린 '자연적 시간덧방에, 모방이라는 인문주의 개념 자체의 양면성을 구성하는 병존을 인식하지 못하는가? 더욱이, 이런 동일한 고대에 대한, 빙켈만의 눈에도 보기에도 르네상스 모방-라파엘로 대표되는-이라는 중간 시기가 없었다면 모방 불가능한 고대의 현대적 모방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만장일치로 주장되는 빙켈만주의 유산을 고려하여, 무엇이 여전히 여기에서 위태로운지 명확히 따져보자. 우선 시간의 분석을 자세히 살펴보자. '삶과 죽음'도 아니고 '위대함과 쇠락'도 아닌 이미지의 시간들은 존재하지 않는 건지, 심지어 역사가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영달로 그 가치를 이용해 먹는 이상적인 '르네상스'도 존재하지 않을까요? ‘유령의 시간’, 이미지의 귀환, 더 최근의 작품으로 고대 작품의 '모방'(Nachahmung)이 추정되는 전승의 모델에 종속되지 않는 '생존 (유물)'(Nachleben)은 없을 수가 있을까? 이 예술의 역사, 이 내러티브가 제안하는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의 기억을 위한 시간’- 억압된 자와 그 영원한 귀환 간의 모호한 게임-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예술 자체에 관련해서도, 18세기에 확립된 분류를 벗어난 이미지의 ''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빙켈만의 공식 속, 연민에 대한 거부로, “이상에 대한 모방으로 부과되지 않은 다른 유형의 닮음꼴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예술 이미지의 역사에는 여러 징후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런 역사는 진정으로 하룻밤 새 '탄생'한 것이었나?

빙켈만이 기념비적인 고대 예술사를 쓴 지 백오십 년 후, 아비 바르부르크는 드레스덴이 아니라 함부르크에서 뒤러와 이탈리아 고대"에 대한 아주 작은 소책자, 사실 5쪽 남짓 분량 강의 요약본을 출판했다. 이 텍스트의 서두에 나오는 이미지는 바사리 책처럼 그리스도 부활(그림 1)이나 빙켈만 책처럼 무슨 올림픽 영광의 그림(그림 2)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갈기갈기 찢기는 장면, 극도로 강렬한 물리적 순간에 고정된, 열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이다.(fig. 3).

역사, 예술, 고대에 대한 이러한 생각의 순간들 틈에서 이런 비대칭은 급진적으로 보인다. 바사리 책에서 그린 작가의 단 하나 보다 짧은 그의 간결한 텍스트에서, 그의 모든 출판된 작품의 경우처럼마찬가지 그의 출판된 작업들을 모두 모아도 고대 예술사보다 부피가 적은 것처럼바르부르크는 바사리와 빙켈만의 예술사에 사용된 모든 인식 관련 모델을 은밀하게 분해하고 해체한다. 그는 이렇게 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술사가 맨 처음 도입의 순간으로 여기는 것을 해체한다.

바르부르크는 "생명과 죽음""위대함과 쇠락"의 자연적 순환 모델에 대해, 단호하게 비자연적이고 상징적인 모델로, 역사의 문화적 모델로 대체했다. 이런 모델에 시간적 기간이 더 이상 생물 형태적인 단계에 따라 빚어지지 않고, 대신 지층, 잡종 지괴, 뿌리줄기, 특정 복잡성들로, 종종 예상치 못한 회귀들로 그리고 항상 훼방을 받은 목표로 표현된다. 바르부르크는 고대의 르네상스”, “훌륭한 모방및 고대의 정갈한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적인 모델에 대해 역사의 환영幻影적 모델(|modeéle phantomal])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대체했다. 여기서 시간적 기간들은 더 이상 지식의 학문적 전달에 따라 형성되지 않고 오히려 잊히지 않는 기억, “생존”, 잔류 및 지속적인 형태의 회귀로 표현된다- 말하자면, 지식을 구성하지 않는 개념, 생각해본 적 없는 개념 및 시간의 무의식적 측면으로 표현된다. 마지막 분석에서, 결국 내가 심리적 모델(modele psychique)을 두고 하는 칭하던 환영적 모델은, 심리적 관점이 이상적 관점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이론적 분해의 가능성으로의 회귀로 여겨진다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다루는 것은, 징후적 모델(modele symptomal)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형태의 출현과 변화는- 예를 들어, 동일시에 대한 욕망과 변화의 제약 간의 긴장, 정화와 교잡, 정상과 병리, 질서와 혼돈 간, 그리고 볼 수 있는 특성과 생각해 본 적도 없이 남은 다른 성격들 간의 긴장 등,- 이런 긴장을 특징으로 하는 과정의 앙상블로 분석되어야 한다.

'쓰잘데기 없는 짓 > 살아남은 이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아남은 이미지 p20-23  (0) 2024.09.01
살아남은 이미지 p16~20  (0) 2024.08.31
살아남은 이미지 p13~16  (1) 2024.08.27
the surviving image 5-9  (0) 2024.08.22
the surviving image 1-4  (0) 2024.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