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이 살아남다. 역사가 열리다.
여전히 확고한 점은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말처럼-그러나 그가 어떻게 자신의 발언으로 자신이 표적이 되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바르부르크의 유산이 발휘하는 [현재의] 매혹을”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자행된 미술사에 대한 “확실한 불만의 증상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 바르부르크 자신도, 아직 완전히 체계가 서지 않았지만 필요성의 촉구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런 종류의 불만을 드러냈다. 1888년, 겨우 스물두 살이었던 바르부르크는 자신의 개인 일기에서 이미 '교양 있는 사람들'을 위한 미술사로,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구상 미술 작품을 평가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의 미술로 ‘미학화한’ 역사라고 혹평하였다. 그는 이미 “예술의 과학”, 예술학(Kunstwissenschaft)의 필요성을 주창하며 “예술학 없이는 비의료인이 증상학에 대해 논평하는 것이 헛되듯이,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헛된 일이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1923년에 계속해서 바르부르크는 갑자기 뉴멕시코 산지로 떠난 이유가 “미학적 미술사에 대한 순전한 혐오감”(dsthetisierende Kunstgeschichte) 때문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평생 동안 이미지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위해서는 모렐리, 벤투리, 베렌슨 등 “전문적인 찬미가들”라고 그가 칭했던 귀착/귀결주의자들의 “미식가적 호기심curiosité gourmande”보다 훨씬 더 전폭적이며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비슷하게 그는 러스킨과 월터 페이터의 후예들(그들이 저속한 부류, 말하자면 ‘부르주아'의 후예들였을 때)과 버크하르트와 니체의 후예들에게도 막연한 미학 이상의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그는 노트에서 “자라투스트라를 로덴 방수코트 주머니에 넣고” 피렌체를 방문 온 “부활절 관광객-초인”으로 원용하여 비꼬았다.
이러한 불만에 부응하여 바르부르크는 끊임없는 대체/변위/displacement를 피력하여, 사상에서, 철학적 관점에서, 지식 분야에서, 역사적 시대에서, 문화적 위계에서, 지리적 위치에서 대체 및 배척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바로 이 대체가 그를 계속해서 유령과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바르부르크는 당대에는-비록 지금은 더하긴 하지만- 오해받기 좋은 도깨비불, ’미술사의 passe-muraille(벽 통과자)‘같은 존재였다. 그가 미술사를 ‘향한’ 대체, 학문과 이미지 전반을 향한 대체는 이미 중상류층 비즈니스계와 정통 유대교에 대한 불만감이라는 자신의 가족의 세계에 대한 비판적 반발의 결과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술의 역사를 관통하여, 그 경계와 그 ‘너머’까지 그의 대체는 학문 자체에 격렬한 비판적 반발, 위기, 그리고 학문적 변경邊境들의 진정한 해체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반발은 이미 1886년에서 1888년 사이 학생 시절에 젊은 바르부르크가 했던 선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고전적인-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고전적인-라인하르트 케쿨레 폰 스트라도니츠와 아돌프 미카엘리스와 같은 고고학자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후자와 함께 파르테논 신전 프리즈(방, 벽 위 띠무늬 장식)를 연구했고, 전자의 수업 과정에서는 라오콘Laocoon의 미학을 발견했으며, 1887년에는 비애형식(pathosformel)에 대한 최초의 분석을 발표했다. 그는 카를 후스티의 제자가 되었고, 후스티 덕에 고전 문헌학에 입문했으며 빈켈만을 소개했지만, 벨라스케스, 플랑드르 회화도 소개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헤르만 우제너의 ‘인류학적’ 문헌학에 열정을 쏟았고, 그 여파로 제기된 온갖 철학적, 민족지학적, 심리적, 역사적 문제들도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정신심리적 과학'으로 배태된 카를 람프레히트의 역사 강의에서 그는 자신의 미래 방법론의 기본 요소 몇 가지를 접하게 되었다.
르네상스로 볼 것 같으면, 리엘과 토데의 가르침이 주로 도드라지는 역할을 했다. (후자는 비기독교적 ‘고대’의 복귀를 배경으로 밀어붙여서, 이탈리아의 예술적 발전을 프란체스코 정신의 결과로 만들었다.) 그러나 후베르트 야니체크는 ‘예술 이론들’-단테와 알베르티의 이론들-의 중요성의 이해를 돕고, 그와 더불어 모든 형태의 조형 예술 생산과 연결된 ‘사회적 관행들’이 한몫하는 영향력을 이해하도록 이끌었다. 아우구스트 슈마소프에 대해서 아주 단순히 바르부르크가 이런 식으로 말해도 된다면, 피렌체 지형에 발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바로 피렌체 그 도시에서 이 젊은 역사가는 도나텔로, 보티첼리에 대한 15세기 피렌체에서 고딕과 르네상스의 관계에 대한 전자의 강의를 들었다. 다들 오늘날 우리가 탁월했던 바르부르크적 주제라고 여기는 것들이다.
또한 슈마소브는 인류학적, 정신심리적 의문에 확고하게 열린 ‘예술과학’을 옹호했다. 그는 시각적 의사소통과 “정보”(Verstandigung)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을 상술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그 시대에 “몸짓의 언어”라고 불렸던 것의 근본적인 역할을 이해했다. 슈마소브는 라오콘의 표현력에 대한 주제를 이어받고, 레싱을 뛰어넘어, “제스처/낯빛”(Mimik)와 “모형제작”(Plastik)의 연결된 두 명사 도식을 활용하여 이미지의 신체적 공감에 대한 이론을 정교화할 방도를 강구했다. 따라서 젊은 바르부르크가 고대 정신충돌(psychomachia)에서 빌헬름 분트의 독회로, 보티첼리에서 의학 강좌로, 심지어 확률 강좌로, 1891년 “우연 게임의 논리적 기초”에 대한 그가 발표까지 하며 쫓아다니는 그를 목격하는 일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형성 중인 지식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진짜 움직이는 중인 지식의 영역이 조금씩 외견상 이 모든 방법론적 대체/변용으로 된 산만하고 엉뚱한 놀이를 통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1866년에 태어난 바르부르크는 저명한 미술사학자 세대(1862년에 에밀 말이 태어났고, 1863년에 아돌프 골드슈미트, 1864년에 하인리히 볼플린, 1865년 버나드 베렌슨, 1866년 율리우스 폰 슈뢰서, 1867년 막스 J. 프리드란더, 1868년 빌헬름 푀게)의 일원이었지만 그의 ‘인식론/지식적 위치’와 교육기관의 상황은 이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1904년 마흔 번째 생일이 가까워질 무렵, 그는 다시 한 번 본의 교수직을 위한 자격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 그는 일찍이 1897년 초에 반쯤 간솔하게 반쯤은 불안하게, “나는 프리바트도젠트(객원강사)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최종적으로 결정내렸다.” 그 후 브레슬라우, 할레의 의장직을 사양해야했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공직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고, 예를 들어 가장 활발한 주창자 중 한 명으로 활약하던 로마에서 열린 국제회의(1912)에서 독일 대표단 대표를 맡는 것도 거절했다. 그는 자신의 프로젝트가 기존의 다양한 학문적 울타리 및 기타 학문적 정렬에서 만족스러운 자리를 찾을 수 없기에, '이름 없는 과학'이 된 프로젝트의'개인 연구자'-우리는 이 단어를 가능한 모든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로 남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미지 연구의 영역화’가 그의 첫 불만이었다. 1912년, 페라라에 있는 프란체스코 델 코사의 프레스코 벽화에 나타난 점성술적 모티프에 대해 로마 회의 연설의 결론을 지으며, 바르부르크는 자신이 만든 단어들을 구사하며, 이 학문의 '확대'를 간청했다. “내가 여기서 수행했던 상당히 잠정적이며 동떨어진 실험은 우리 예술 과학의 방법론적 경계를 확대하자는 탄원을 의도한 것입니다(eine methodische Grenzerweiterung unser Kunstwissenschaft).”
이 호소를 “다학제간 연구”의 압박으로 혹은 이미지에 대한 관점을 전통적인 역사가나 예술이 선택적으로 음미하는 사실적, 양식적 문제를 넘어서는 영역으로 철학적인 동기를 부여받아 확대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할 수도 있지만 매우 불완전하다. 바르부르크가 항상 언어/문헌학적 관심사(따라서 그것이 전제하는 신중함과 유능함)와 철학적 관심사(따라서 그것이 전제하는 위험과 심지어 무례함)를 조화시키고자 했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바르부르크는 “예술”과 “역사”라는 두 용어와 관련하여 매우 엄밀한 위치로 비롯하는 예술-사를 존중해달라고 요구한다.
바르부르크가 이미지 연구의 영역화에 불만을 느낀 이유는 적어도 두 가지를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 우리는 정확한 경계를 따라 그릴 수 있는 사물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이미지와 직면하거나 ‘이미지 앞에’ 서지 않는다. 작가, 날짜, 기법, 도상학 등 명확한 좌표의 총체는 분명히 그런 직면에 불충분하다. 하나의 이미지, 매 이미지는 그 안에 잠정적으로 침전되거나 결정화된 움직임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이를 하나에서 열까지 철저하게 가로지르고, 그 각자가 멀리서 시작하여 그 너머로 계속되는 제각각 궤적-역사적, 인류학적, 심리적 궤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우리는 이미지를 특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더라도 동력을 품고 있는 혹은 역동적인 ‘순간’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것은 예술사에도 기본적인 귀결을 수반하는데, 바르부르크 그의 “탄원” 직후에 다음과 같이 말로 발표한다. 우리는 복잡한 시간 앞에 서듯이 다시 말해 이러한 움직임 자체들의 잠정적으로 설정된, 역동적인 시간 앞에 서듯이, 이미지 앞에 서게 된다. “변경의 체계적 확대"의 귀결은, 실로 내기에 걸린 판돈들은, 다름 아닌 이미지의 탈영역화와 그 역사성이 발현되는 시간의 탈영토화이다. 이것은 ‘이미지의 시간이 일반적인 역사의 시간이 아니다’ 점을 또렷하게 의미한다. 말하자면 여기, 바르부르크가 여기서 정의하는 시간은 진화의 '보편적 범주'라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그가 구상하는 절박한 (현재가 아니라, 시기적절하지 않은) 과제는 무엇인가? 예술의 역사는 “나름대로 진화론”, 즉 자체의 시간 이론을 재정립해야 하는데,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듯이 바르부르크는 이를 위해 “역사적 심리학”을 지향한다. “지금까지 적절하고 보편적인 진화 범주들의 결핍으로 미술사를 인간 표현의-아직 기록되지 않은-역사적 심리학(historische Psychologie des menschlichen Ausdrucks)이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자료들을 정돈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지나치게 유물론적이거나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인 입장을 채택함으로써 우리의 젊은 학문은…정치사의 도식화와 천재를 따르는 교조적인 믿음 사이의 어딘가에서, 나름대로의 진화론(ihre eigene Entwicklungslehre)을 더듬어 나가고 있다.”
지금 우리는 '벽을 통과하려는' 바르부르크의 시도를 따라가야 한다. 즉 이미지와 그 자체를 담고 있는 혹은 이를 품고 있는 시간을 '탈구획화‘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여기에 관련된 유기적인 움직임을 하나도 생략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은 아주 무변광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적어도 바르부르크가 미술사에서 이동을 시작하고 대체/변위시킨 방식을 살펴보고 아니 그런 방식으로 이런 방면에서 인식론적 비판과 싸우기 시작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이 진취적 기획에 관련된 모든 것이 스타일의 문제, 사고의 스타일이건, 결정의 스타일, 또는 무언가를 알게 되는 스타일이건 스타일의 문제이며, 이는 시간, 템포의 문제라는 것을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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