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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기 없는 짓/살아남은 이미지

살아남은 이미지 p31-32

by 어정버정 2024. 9. 18.

이 생존의 예-원시문화에서 가장 먼저 제시된 예-는 꾸밈새의 형식적 요소, 즉 스타일 개념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 발견되는 원시적 단어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형식의 생존이 각인이나 날인이란 용어로 표현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특징적이다. 현재가 여러 많은 과거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현재 삶의 형태 자체에 찍힌 시간의 날인이-또는 여러 시기의 도장이- 파괴할 수 없다는 점을 확고히 보여준다. 따라서 타일러는 이러한 생존의 힘에 대해 그가 또 다른 은유를 사용하여 언명한 말마따나, “오래된 습관이이들을 밀어내기 위해 강하게 압박하는새로운 문화 한가운데서 자리를 잡고 있다고 쓴다. 그는 또한 생존의 집념과 끈기를 시냇물이 일단 강바닥 따라 자리잡히면 오래 흘러가게 되는 그 줄기에 비유하며 문화의 영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각인의 용어를 다시 써서, 표현한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바르부르크가 영속성”, 서양 미술사의 오랜 시간 동안 고대 형태의 집요함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서 아마 인식을 했을 것이다. 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타일러는 19세기의 많은 철학적 인류학 저술가들처럼 '문화의 본질'이라는 면에서 이러한 영속성을 설명할 수도 있었다. 이 점에 관한 그의 생각 속 중심 관심사와 그의 입장이 바르부르크의 접근 방식과 근사近似한 방식 또한, 한층 더 나간, 과단성 있는 보충에서 발견된다. '문화의 영속성'이 본질로, 세계적 어느 특성으로, 또는 원형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증상’, 예외적 특성, 뭔가 대체된 것으로 표현된다고 보았다. 생존의 집요함’, 바로 그 ''은 타일러의 말처럼 사소하고 불필요하며 보잘것없거나 비정상적인 것들의 박약함에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반복되는 증상에서, 게임에서, 언어의 병리에서, 형태의 무의식에서 그러한 생존이 발견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타일러는 나중에 바르부르크가 르네상스 축제의 관습에 큰 관심을 기울인 것처럼 어린이들의 게임(, 새총, 딸랑이, 지골 공기놀이, 카드 놀이-전쟁과 점술에서 비롯된 아주 진지했던 옛 관습의 생존)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나중에 바르부르크가 피렌체 문화에서 조사하고 싶어했던 것처럼 언어- 격언, 속담, 인사말의 방식 등-의 특성을 조사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일러가 생존을 조사할 때 미신이라는 측면에서 특별히 고찰했다는 점이다. 그는 미신superstitio이라는 용어에 대한 전통적인 라틴어 뜻에서 이 인류학적 개념의 정의를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일반적으로, 부적절하지도 않게, 그런 절차는, 미신이라고 묘사되었고, 실제로 이 이름은 일반적으로 많은 부분 생존들에 붙여졌을 것이다. 그 '미신'이라는 단어가 그 속에 아마 옛날부터 ‘견뎌낸다’는 그 원래 의미를 지녀, 자체가 생존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미신'이라는 용어는 질책을 내포하고 있다…민족지학자의 목적을 위해서, 어쨌든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도, '생존'과 같은 용어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원시문화에서 생존에 대한 분석이 왜 마법, 점성술, 그리고 그 외 다양한 형태를 취한 온갖 이런 부류에 할애한 기나긴 장에서 정점을 이루며 마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바르부르크가 페라라 프레스코화에서 발견되는 점성술 활동에 대한 분석과 심지어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의 저서들을 분석하며 복원했던 '고대인의 나흐레븐'에서 최고 부분이 아니 떠오를 수가 없다. 두 경우 모두-그리고 이것은 프로이트의 연구 이전이다- 의식 내부의 분열, 논리적 오류, 또는 논증의 무의미한 측면으로 역사적으로 생성된 어느 사실의 현실성/현재 상태에 틈새를 열어, 그 생존이 등장하도록 허용한다.’ 타일러는 바르부르크와 프로이트 이전에 '사소한 세부 사항'을 연구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자신의 하찮음을 타당하게 하는-아니 오히려 사소함의 증상으로 작용하는-능력 때문이다. (그는 이를 랜드마크라고도 불렀다.) 타일러는 바르부르크나 바르부르크의 봉헌된 성상의 애니미즘/정령신앙에 관심 이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실이지, 이러한 징후/신호들의 힘에 대한 일반 이론을 구축하려고 시도하였다. 타일러는 바르부르크가 몸짓의 표현 현상에 매료되기 전에 다른 사람들처럼, 역시나, “감정적이고 모방적인 언어에 대한 이론을 만들려고 탐색했다. 바르부르크와 프로이트 이전에 자신 나름대로, 증상-황당무계한 부조리이든, 깜박 실수이건, 질병 혹은 광기이건-의 특출한 능력이 특정 문화 내에 존재하는 현기증 나는 생존의 시간적 차원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는 정당한 논거를 입증했다. ‘증상이 가리키는 길유령의 목소리를 듣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증명이 될까?

점점 줄어드는 옛 문화의 생존에 대한… 다양한 조사 전체에 걸쳐… 그 예시들이 하고 많은 것 중에서 낡고, 쓸모없고, 시시하고 심지어 완전히 유해하고 어리석은 짓으로 형편없는 예시까지 거기서 들어야 하였느냐고 불평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고, 나는 충분히 알고서 그리고 그럴 의도로 이 논쟁의 과정으로 잡았다.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탐구들에서 미치광이들에 대해 감사해야 할 이유를 끊임없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제의 표면 아래로 거의 내려가지 않더라도 어리석음과 비실용적인 보수성과 완강한 미신들이, 실용적인 공리주의라면 가차 없이 휩쓸어버렸을지도 모를 우리 민족의 역사의 흔적을 보존하는 데 얼마나 큰 몫을 했는지 보는 일은 꽤나 놀랍다.

 

**** 

역사적 및 인류학적 과학 영역에서 유령과 증상의 관념 사이에 위치한 생존의 관념은 자취의 특정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바르부르크는 고전적 고대의 흔적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흔적은 한 사회의 형태, 양식, 행동, 정신에 종종 근근이 존속하듯이, 물질적 유물의 객관적 존재로 결코 환원할 수가 없었다. 타일러의 생존에 대한 그의 관심은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우선 첫째로 이들은 부정적인 현실’, 말인즉슨 한 문화에서 버려진 요소처럼 보이는 것, 즉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고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것을 가리켰다. (예를 들어, 15세기의 피렌체 보티boti는 이미 현재와 단절된 그리고 르네상스 예술의 창작 이면 현대적관심사에서 벗어난 관행에 대한 증거이다.) 두 번째로 타일러에 따르면 생존은 감춰진 현실을 지칭한다. 한 사회의 역사에서 사라진 단계를 지속하고 증언하지만, 그렇게 버티는 지속에는 지위의 변화와 의미의 변화라는 본질적인 수정이 수반된다. (예를 들어, 고대 전쟁의 활과 화살이 어린이 게임에서 살아남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그 지위와 의미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분명 생존에 대한 분석은 환상적인 현시만큼이나 증상적인 현현을 분석하는 문제인 것 같다. 생존은 미약하고 심지어 지각할 수 없는 현실을, “깨부수고 침입”[réalité d‘éffraction/현실 침입]한다-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현실을 가리키며, 따라서 유령같은 현실을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점성술적 생존은 루터의 글에서 유령들로 등장하는데, 이들 유령의 효능을 바르부르크는 루터의 논증 논리를 파고든 침입자-그리고 증상의 침입-로서 이들 천성 덕분에 감지할 수 있었다. 타일러의 생존 개념이 가장 먼저 이용된 분야가 신념/신앙 연구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가장 많이 적용된 분야가 종교사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을 두르는 일부 고고학 연구에서도- 나중에 앙드레 르르와-구랑André Leroi-Gourhan기술적 스테레오타입/정형이라고 명명을 예측하는- 이 생존 개념의 관점에서 사물의 역사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Anna Ancher

 

진화의 운명들, 이시성 상태들

 

꼭 짚고 넘어갈 점이, 그러나 생존이라는 개념은 미술사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은 적이 없으며, 이는 비단 미술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타일러 시대에도 생존너무 구조적이고추상적인 개념으로, 정밀성에 혹은 사실적 검증에 벋서는 내성을 지닌 개념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실증주의자들의 반론은 어떻게 생존의 연대를 추정하는 일을 해나가느냐?” 질문에 다 담겼다. 이는 정확히 말하면 적어도 사소한, 사실적인 그 단어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역사적이 아닌 일종의 시간성으로 설명하려던 개념의 의도에 대해 완전한 몰이해를 드러낸 것이다. 오늘날에는 생존불충분한 구조적개념이라고 비난받을 가능성이 더 높다. 간단히 말해 진화론자낙인이 든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생존은 19세기의 전형적인 낡은 과학적 유령으로, 시대에 뒤떨어지고, 용처도 다한 개념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사람들이 마르셀 모스에서 클로드 레비 스트라우스에 이르기까지, 본질주의(프레이저에서처럼)나 경험주의(말리노프스키에서처럼)로 아주 깊이 자국이 박힌 민족학적 개념에 필수적인 방향 전환을 일으킨 현대 인류학에 비추어,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미리 짐작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문제를 좀 더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처음 인상보다 더 미묘하고 복잡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실제로 논쟁 중인 부분은 생존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니라 19세기 후반의 몇몇 앵글로색슨 민족지학자들이 생존을 어디에 적용했는지 이용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모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용어의 사용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저서 선물[Essai sur le don]3장 제목은 고대 법 체계와 고대 경제에서 [‘선물의 교환을 확립하는] 이러한 원칙의 생존들”(“Survivances des ces principes dans les droits anciens et les economies anciennes”)이다. 여기서 그는 선물과 맞-선물의 원칙이 민족학자뿐만 아니라 역사가도 생존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사회 진화의 한 단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회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점만이 아니라 또한 이들은 사회사와도 관련이 있다. 이러한 유형의 제도/관습들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법과 경제 형태로의 전환을 제공했다. 이러한 제도들는 우리 사회를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 사회 바로 앞의 사회에서 실행된 도덕과 교환은 우리가 [소위 원시 사회의 틀에서] 방금 분석한 모든 원칙들의 중요한 흔적을 어느 정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심지어 모스는 원시사회 자체로까지 생존의 개념을 확장한다:

 

“어느 사회도 진화하지 않은 사회는 없다. 가장 원시적인 인간도 그 뒤에 어마어마한 과거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서도 확산된 전통과 생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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