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와 시간의 불순물: 부르크하르트와 바르부르크
바르부르크는 나흐레븐의 개념을 매우 엄밀한 역사적 틀 안에서 정교화했으며, 이는 그가 출판한 연구들로 거의 배타적인 영역을 형성했다. 이런 출판물에 우선 이탈리아 르네상스(보티첼리, 기를란다요, 프란체스코 델 코사,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부차적으로 플랑드르 및 독일 르네상스(멤링, 판 데어 후스, 뒤러, 루터와 멜란히톤)이 포함되었다. 우리가 이러한 개념을 오늘날 시각으로 고려한다면, 그것은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지식에 관한 몇 가지 주요 전제를, 말하자면, ‘재설립’할 수 있는 이론적 교훈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리라. 하지만 바르부르크가 특히 르네상스 시대 전후 맥락으로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상술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가 전혀 보증하지 않은 것을 제공해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곰브리치가 바로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 예를 들어 생존에 대해 말하며 “사실상 중세 예술은 누락(시켰다)”고 그를 비난하였다). 바르부르크를 읽은 결과로 나흐레븐의 개념이 어떤 일반적인 가치를 지니든 그리하여 그의 해석의 가치가 뭐든, 그 해석에 대한 책임은 오직 우리에게만 있다.
어쨌든 바르부르크는 미묘하고 은밀하긴 해도, 도발에 대한 확연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데 동의하자. 역사학자-철학자인 그가 '생존'과 '르네상스'만큼이나 아주 다른 두 개념을 자신의 책에 나란히 병치하는 것은 도발적이지 않은가? 물론 독일어에서 르네상스라는 단어는 역사적 시기를 의미하며,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에서처럼 그 당시, '고대의 생존'(Nachleben der Antike)을 일컫던 그 과정 역시 당연히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두 단어가 서로 닿아있다는 인상은 뭔가 거북하게 들쑤시는 여운이 남는다. 사실 우리는 이 두 단어는 이런 짝짓기에서 영향을 받지 않고 끄집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술사의 황금기로서 르네상스는 그 순수성과 완성도를 일부 잃는다. 상반적으로, 모호한 진화 과정으로서 생존은 원시 또는 선사 시대 기운을 일부 잃는다.
그런데 왜 이런 맥락인가? 왜 르네상스인가? 특히 왜 이탈리아 르네상스- 나는 보티첼리에 대한 바르부르크의 논문, 그의 첫 번째 출판 작품을 염두에 두고 있다-와 함께 시작, 아니 다시 시작하는가? 무엇보다, 미술사가, 지식의 한 분야로 생각되는 미술사가 시작된, 아니 다시 시작된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파노프스키 이전, 바르부르크와 뵐플린은 ‘인본주의적 조건, 즉 르네상스 시대의 조건으로 돌아가서’ 미술사라는 학문을 재창조하였고, 보통 말하는 항상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대형의 담론인 학문으로 달리 보여주었다. 르네상스로 들어간다는 일, 르네상스 시대의 왕도를 따라 미술사로 들어가는 일은 19세기 말의 젊은 학자에게는 바로 그 지위에 대한, 양식과 역사 담론 전반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론적 격론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논쟁은 쥘 미셸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셀레는 몇 가지 저명한 공식으로 처음으로, 르네상스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적이고 해석적인 개념의 개략을 세워 제시하였다. “세계와 인간의 발견”, ‘현대 예술의 출현’, ‘판타지의 자유 비행’, ‘살아있는 힘에 대한 호소’로 이해되는 고대유물로의 회귀 등등…. 오늘날 시각으로 이러한 표현에서 진부하거나 심지어 미심쩍어 보이는 부분들을 상대화하여 살펴보자. 바르부르크가 본 대학에서 헨리 토데의 강의를 따라다니던 때, 그는 근본적으로 ‘반기독교적 도덕이 발명된 순간’으로 인식되는, 이 “근대적” 르네상스과 관련하여 수많은 신랄한 비난을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난은 미셀레 자신보다는 그러한 공식을 극단적인 귀결까지 밀어붙이는 죄를 범한 두 명의 독일 사상가에게 향했다. 이 두 저자는 다름 아닌 야콥 부르크하르트와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이 격론은, 익히 짐작 가듯이, 기독교적이든 아니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지위뿐만 아니라 역사적 지식 자체의 지위, 철학적, 인류학적 야망의 자격에 관한 것이었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니체와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출범한 새로운 ‘쿠투르게슈테/문화사’에 대한 쟁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토데의 “프란치스코 수도회” 강의와 부르크하르트의 “근대” 저술 사이에서 바르부르크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전자의 이름은 『게삼멜트 슈리프튼/Gesammelte Schriften저작 모음집』에서 한 페이지도 인용되지 않은 반면, 후자의 영향력은 곳곳에 확인되고 있다. 단 가지 예만으로도 이런 도드라진 차이를 드러내는데 충분하리라. 1902년 피렌체의 초상화에 관한 글에서 바르부르크는 정확하게, 프란치스코 도상학을 포함한-산타 크로체 교회에서 지오토가 그리고 산타 트리니타성당에서 기를란다요가 묘사한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규종 비준’-주제로 시작하는데, 토데에 대해서 오히려 아주 노골적으로 아무 언급도 선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바르부르크는 기를란다요의 일생화에 대한 인류학적 해석이 토데가 르네상스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서 제안한 도식과 그 하나하나 모두 반대된다는 사실을 단순히 언급을 건너뛴채 둔다. 이와 대조적으로, 모음집의 동일 텍스트에서 부르크하르트의 위광이 아주 특징적으로 두드러지는 격렬한 이론적 주장으로 시작한다:
천재의 모든 위광을 지닌 모범적인 개척자(vorbildlicher Pfadfinder)였던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자신이 학문으로 개척한 분야, 즉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명 분야에서 아주 두드러지게 군림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발견한 땅(Land)을 독재자처럼 수탈하는 것은 그의 천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학자로서의 자기희생과 금욕(wissenschaftliche Selbstverleugnung)을 통해 당시의 문화사를 전체 하나로(Einheitlichkeit일관성) 따지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는 법 없이, 표면적으로는 서로 관련이 없는 여러 분야(in mehrere ausserlich unzusammenhangende Teile)로 나누고, 이를 진중한 침착함과 위광으로 탐구하고 기술해나갔다. 한편으로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에서 그는 시각 예술에 대한 언급 없이 사회 속 개인의 심리에 대해 논의했고, 한편 『시세로네Cicerone/명승고적 안내원』에 착수하여 “예술 작품의 즐거움에 대한 소개” 이상은 제공하지 않았다. …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위대함을 인식하고서, 지레 우리는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일을 단념해서는 안 된다.
이 ‘발자취’(Bahn)를 따르는 일은 유지가 매우 어렵고 고된 방법론적 준엄함을 요구한다. 하지만 바르부르크의 ‘겸허’-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Selbstverleugnung자기-금욕/희생’-는 그가 부르크하르트 속에서 인지하였던 겸허의 수준에 도달하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태도는 거의 스토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는 모든 문화의 통일성(Einheitlichkeit)을, 근본적으로 완전히 유기적인 본질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를 단언하고, 이를 정의하거나, 그런 식으로 이를 파악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였다. 사물은 분할된 상태 또는 '분열/해체'(Zerlegung) 상태로 남겨져야 한다. 부르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바르부르크는 항상 체계를 완비[reclore/재마감]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는 결론의 순간, 헤겔적 절대 지식의 순간을 항상 그런 식으로 ‘연기’하였다. 그는 고립된 연구자, 즉 선구자는 특이점들에 대해서만 연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수준으로, ‘겸허’, 인식론적 겸손이 필요하며, 바르부르크가 같은 의미에서 표현했듯이 아무리 '특정 연구'로 이루어진, 즉 어떤 위계적 질서에 놓이지 않는 연구들로 구성된 ‘종합적/통합적 역사’의 역설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감정가[부르크하르트]이자 천재적인 학자는 사후에도 지칠 줄 모르는 탐구자로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사후에 발간된 『이탈리아 예술사』(Beitrage fiir Kunstgeschichte von Italien)에서 문화사 통합(synthetische Kulturgeschichte)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향한 제3의 실증적 길을 열었다. “인과적 요인”들로 현실 생활(das wirkliche Leben)의 이념적, 실제적 요구를 해석하기 위해 그는 당대의 당면한 맥락 내에서 개별 예술 작품(das einzlne Kunstwerk)을 검토하는 작업을 떠맡았다.
뵐플린-20세기 미술사의 또 다른 위대한 '재창출자'-역시 '체계'가 정의되지 않은, 말하자면 완성되거나, 도식화되거나, 단순화되지 않은 “체계”로 '체계적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부르크하르트 면모에 거장으로 존경했다. 부르크하르트에게는 '개별 작품에 대한 민감성'이 항상 우세하게 작용하여 어떤 결론도 열린 결론으로 남겨두었다. 그의 텍스트에서 “분해하다”라는 동사 zerlegen으로 아주 잘 표현한 이런 역설적인 작업을 바르부르크보다 더 잘 성취한-성취 같은 단어를 쓸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람은 없다. 미술사 분야에서 그 누구도 이토록 대담하게 특이점에 대한 무한한 분석의 길을 걸어온 사람은 없었으나, 그 분석은 ‘완수’가 결여되었다는 이유로 “불완전” 또는 “미완성”으로 잘못 여겨졌다.
부르크하르트가 세운 역사적 ‘기념비’와 관련하여 바르부르크가 보여준 겸손과 비하는 거짓도 아니고 단순히 예의 차린 말도 아니다. 이런 겸허함이 그렇다고 해서 뒤이은 이의 작품이 순전히 더 이른 이의 역작의 소산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바르부르크는 자신의 개인 노트에서 특정 문제에 대해 더 비판적이고, 더욱 토론적인 태도를 보이고, 심지어 반대 입장으로 대립하기도 한다. 또한 바르부르크의 기본 어휘- 나흘레븐. 파토스포메인, ‘표현’ 이론(아우스드럭)같은 경우-는 부르크하르트 자신의 개념적 도구 사이에서 두각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바르부르크의 유명한 노티츠카스텐(Notizkasten/노트상자, 여러 가지 색의 판지 파일 상자들)은 말하자면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 미술사”, 계속 보류를 하다가 출판되지 못한 프로젝트를 집필하기 위해 수집한 자료의 3차원적 구현이라고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그림 6과 7). 어쨌든 바젤 출신의 위대한 역사가의 저서 중 어떤 요소가 젊은 바르부르크의 직관과 지적 구성에 자양분이 되었을지 알아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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