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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기 없는 짓/살아남은 이미지

살아남은 이미지 p50~54

by 어정버정 2024. 9. 29.

 

 

이제 우리는 ‘유령의 역사’로 짜인 이미지 역사의 역설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생존, 지연, 귀환[revenances] 이 모든 것이 시대와 스타일의 가장 뚜렷한 발전에 참여한다. 바르부르크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28년, 가장 인상적인 경구 중 하나, “어른들을 위한 유령 이야기”(Gespenstergeschichte fur ganz Erwachsene)는 그가 추구한 이미지 역사의 유형에 대한 나름의 정의였다. 하지만 이들 유령은 누구의 유령일까? 언제, 어디에서 온 것일까? 고고학적 정밀함과 멜랑콜리한 공감이 어우러진 바르부르크의 초상화에 대한 공경스러운 텍스트를 보면 이 유령들이 죽음 이후의 생존에 관한, 끈덕진 지속에 관한 문제라는 생각이 언뜻 처음에는 든다.

사세티 가문(자신의 집안과 같은 은행가들 가문)의 초상화 작업에 착수할 당시, 아비 바르부르크는 동생 막스에게 가슴 벅차 편지를 썼는데, 오래전에 사라진 존재의 “유령 같은 이미지”(schemenhafte Bilder)를 일종의 생명으로, 심지어 두근거리는 고동으로 복원할 수 있게 되자마자 그의 모든 기록문서(archives) 작업이 아무리 “무미건조한”(eine trockene Arbeit) 일일지라도, “엄청나게 흥미로워(colossal interessant)”졌다고 설명하려고 했다. 이를 염두에 두면 피렌체 초상화의 역설적인 '생동감'(말하자면, 이들의 죽음과의 물리적 관계), 그리고 결과적으로 매우 강력한 '애니미즘/물활론'(말하자면, 이들의 무생물과 정신적 관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니콜라 피사노에서 도나텔로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이 생명 자체를 표현하는 고전적인 양식, 로마 유적의 대리석에 그대로 화석화되어 살아남은 “움직이는 생명체”를 면밀히 조사하던 데가 고대 석관들, 그 죽음의 관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이미지의 역사 속 유령들 또한 애벌 단계 과거에서 나온다. 이 유령들은 ‘“탄생-전前”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생존’으로도 볼 수 있다. 이들의 분석은 바르부르크가 적절하게 칭했던 “스타일의 형성”이라고 했던, 그 “형태 형성”에 관해 우리에게 뭔가 결정적인 점을 가르쳐 줄 것이다. 따라서 나흐레븐의 모델은 소멸에 대한 탐색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멸 속에서 흔적을 낳고, 그에 맞춰 기억이 될 수 있는, 되돌아갈 수 있는, 실제로 “르네상스”가 될 수 있는 비옥한 요소를 추구한다. 이 체계를 통해 인식론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진화의 생물형태 모델을 재정의 유사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삶과 죽음, 르네상스, 진보와 쇠퇴-다시 말해, 바사리 이후 습관적으로 사용되던 모델- 더 이상 이미지의 증상적 역사성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물론 다윈은 “우연한 출현”(진정한 의미의 증상, 또는 진화에서 나타나는 현상mallaises dans | évolution)에 대한 분석에서 보여주듯이 이러한 동일 문제를 다루었는데, 여기서 그는 아주 두드러지는 방식으로 “공통 조상”의 생물학적 구조가 살아남는 “잃어버린 형질의 복귀”와 “잠재”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비둘기의 경우는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경우, 말하자면 모든 품종에서 가끔 날개에 두 개의 검은 줄무늬가 있는 암회색 파란색, 흰색 둔부, 꼬리 끝에 줄무늬 하나에 바깥 쪽 깃털이 기저에 흰색으로 외부 가장자리가 돋은 품종이 가끔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 모든 뚜렷한 자국은 부모 양비둘기의 특징이기 때문에 이것이 새롭지만 유사한 변형이 아닌 회귀의 경우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아주 오랫동안 아마도 수백 세대에 걸쳐 사라졌던 특징이 다시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놀랍기가 그지 없다…교배된 적은 없지만 양쪽 부모가 조상이 가지고 있던 일부 특성을 잃어버린 품종에서, 강하든 약하든 잃어버린 특성을 재생산하려는 경향은 이전에 언급했듯이, 우리가 반대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얼만큼의 세대이건 건너뛰고 거의 다 전달될 수 있다. 한 품종에서 사라진 특징이 엄청난 세대가 지난 후에 다시 나타날 때, 가장 가능성 있는 가설은 한 개체가 갑자기 몇백 세대를 거슬러 오른 조상을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각 잇따른 세대에서 문제의 특성이 잠재되어 있다가 마침내 알 수 없는 유리한 조건에서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L'EXORCISME DU NACHLEBEN: GOMBRICH ET PANOFSKY

나흘레븐의 푸닥거리:곰프리치 그리고 파노프스키

예술의 역사에서 고대 형식이 어떤 경우에는 ‘살아남을’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르네상스’를 경험하게 되는지 조건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이 문제가 학문의 역사 내에서 그 운명을 자리매김해보도록 하자. 바르부르크의 나흐레븐은 이해되었던가? 소수의 이해는 분명 받았지만, 몇 가지 사례로 알 수 있듯이 주류는 아니었다.

1911년 율리우스 폰 슐로서가 『밀랍 초상화의 역사[Geschichte der Portritbildnerei in Wachs]』를 출간했을 때, 생존의 어휘(타일러에게서 빌린 말이지만, 주로 슐로서의 친구였던 바르부르크에게서 빌려왔다)가 밀랍 조각의 가장 이상한 현상, 즉 그 지속성[longue durée], 그 방식의 역사에 대한 저항력, 다시 말해 중차대하게 진화하지 않고서도 생존하는 능력을 이해하는 가능한 유일한 이론적 방법을 열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슐로서는 이미지의 역사가 모두 “자연사”가 아니라 외려 정교화, “방법론적 구성”(ein methodisches Praparat)이며, 사소한 “진화론”의 법칙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것으로 이 책의 끄트머리에서 바사리 식의 “목적론적 겉치레을 가차없이 일축하는 비판의 정당함을 보여준다.

분명 슐로서는 생존 모델에 내재된 몇 가지 이론적 문제들을 충분히-무지보다는 겸손함에서 비롯하여-검토하지 않고 두기는 했다. 그러나 강력한 아이디어가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 모양새는 이랬다. ‘예술에 역사가 있다면, 이미지들은 그들 나름 생존이 있으며’, 이로 일반적인 예술 작품의 영역에서 분리하여, 자리가 강등된다. 이 생존의 대가는 예술적 스타일의 “높은” 역사가 내보이는 경멸이다. 그런 이유로 아주 오랫동안 미술사학자보다 인류학자들이 『밀랍 초상화의 역사』는 더 많이 읽었다.

시간 모델과 관련하여 에드가 윈드는 아마 바르부르크와 슐로서만큼 급진적이고 탐구적인 이론적 행동들을 감행하는 위험은 벌이지 않았을지 모르나, 그러나 그는 “생존”이라는 단어가 사소한 “생물학적 은유” 이상의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했다. 1934년에 그는 “우리가 ‘고전의 생존’에 대해 말할 때 고대인들이 창출한 상징이 차후 세대들에 계속해서 그 힘을 발휘했다는 뜻으로 말하는데, 과연 ‘계속’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할까?”라고 썼다. 그리고 윈드는 생존이 망각, 의미의 변형, 기억의 유도, 예기치 않은 재발견을 포함하여, 전체 활동들의 조화로운 작동을 전제로 한다고-이런 종류의 복잡성으로 여기 담긴 시간성이 지닌 ‘문화적’, 비자연적인 특성을 상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윈드는 뵐플린의 “편재적 역사”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역사적 연속성”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이런 모든 종류의 생존에 포함된 것, 매 생존의 순간에 도입이 되는 힘들, 즉 “잠깐 정지”와 “위기”, “도약”과 “주기적 반전” 대해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서사적 역사가 아닌 기억의 씨줄(기억-므네모시네)을 형성하며, 따라서 예술적 사실의 연속이 아니라 상징적 복잡성 이론으로 귀결된다.

그 생존 가설 바로 그 안에 담긴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보다 더 분명한 언명은 없을 것이다. 거트루드 빙은 역사 과학의 인식론에 관한 바르부르크의 역설적 위치를 아주 잘 파악하고, 지적했다(사람들이 미셸 푸코에 대해서도 유사한 논평을 내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으로 그는 특정 역사적 사실에 대해 불완전하고 편향적이며 심지어 오인을 했을 수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기억에 대한 가설-나흐레븐으로 전제되는 특별한 형태의 기억-은 역사적 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의미심장하게, 거트루드 빙은 나흘레븐의 개념이 전통에 대한 우리의 개념 전체를 완전히 바꿔 놓은 방식에 방점을 찍었다. 전통은 더 이상 여러 일들이 상류에서 시작하여 하류로 흘러가는 식으로 연속적으로 흐르는 강이 아니라 긴장 넘치는 변증법적 과정, 강과 그 자체의 소용돌이 사이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주목할 점은 이렇게 역사성을 파악하는 개념의 방식이 발터 벤야민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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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접근법을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역사가들은 종종 실수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들 눈에 하나의 사실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가설보다 가치가 높다. 이를 과학적 겸허함이라고 하자. 또는 비겁함, 심지어 철학적 게으름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모든 이론에 대한 실증주의적 증오이다. 1970년 곰브리치는 바르부르크의 전작을, 자신의 표현대로, ”원근법에 따라 정리하는 것으로 바르부르크 전기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여기서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이상한 소망, ‘망귀revenant’-1924년 바르부르크가 스스로 정의한 대로-‘더이상 돌아오지않도록 단도리 하려는 열망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생존에 대한 낡은가설도 당분간은 미술사학자의 마음 한구석으로 스며드는 그 영원한 회귀를 멈출 것이다.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작전이 필수적이다. 첫 번째는 생존의 변증법적 구조를 무효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생존과 르네상스로 구성된 이중 리듬이 항상 이미지들의 시간성에 체계를 세워, 과정에서 이미지를 잡종으로 불순하게 만든다는 점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곰브리치는 바르부르크의 나흐레븐을 단순히 부흥revival’이라는 말에 단순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고 거리낌없이 주장한다. 두 번째 움직임은 생존의 시대착오적인 구조를 무효화하는 것으로, 이는 간단히 슈프링어로 돌아가고 생존과 르네상스 사이의 구분을 재-시대화하기만 하면 달성한다. 다르게 말해, 아주 단순하게 <중세><르네상스> 사이의 연대기적 구분으로 축소된다. 따라서 곰브리치는 결국 중세 생존의 모호한 '집요함'과 고대인처럼 모조품의 창의적인 '유연성'을 구별하여 15세기부터 시작된 르네상스만이 그 이름에 걸맞게 이를 생산할 수 있었다고 본다.

생존이라는 개념의 다양한 변천사를 정리하는 일은 방대한 작업으로, 누구든 착수하려고 한다면 바르부르크 시대부터 이 분야의 전체 역사를 검토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랜드마크들만 짚어보자. 1920년대 초, 바르부르크 도서관(Vortrage der Bibliothek Warburg)첫권에서 아돌프 골드슈미트는 중세 고대 양식의 생존”[“Das Nachleben der antiken Formen im Mittelalter”]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골드슈미트는 맨처음부터 지속되는 삶” (Weiterleben)지속되는 죽음”(Weitersterben)을 동시에 나타내는 척도인, 나흐레븐의 역설을 인식하고, 특히 비잔틴 예술에서 우아한 주름의 표현적 역할에 주목하고서, 바르부르크가 보티첼리에서 관찰하였던 바를 중세로 확장하려고시도했다. 20년 후, 장 세즈넥은 '고대 신의 생존'을 주제로 발표하면서 이 주제는 기존에 용인되는 연대표에 대한 견해에 애를 먹일 수도 있는 주장이라고 칭했다. 그는 역시,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의 간섭을 보여주며 생존 분야의 넓은 범위를 실증하였다:

중세와 르네상스가 더 잘 알려지면서 두 시대 사이의 전통적인 대립은 점점 덜 흐릿해지고 있다. 중세 시대는 “덜 어둡고 정적으로” 보이고, 르네상스는 “덜 밝고 덜 갑작스러워”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이교도 고대가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부활'을 경험하기는커녕, 중세의 문화와 예술 속에 여전히 살아있었다고 인정받고 있다. 신들조차도 인간의 기억이나 상상력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복원된 것이 아니다…스타일의 차이는 전통의 연속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한층 더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는데, 15세기와 16세기의 이탈리아 예술은 고대의 상징에 신선한 아름다움을 부여했지만, 중세에 진 르네상스의 빚은 텍스트에서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대 신화적 유산이 세기에서 세기로 어떻게 전승되었는지, 이를 거치며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는지, 그리고 16세기가 끝날 무렵 향할수록, 어느 정도까지 모든 유럽의 인문학과 예술에 영양을 공급하게 되었을 신에 관한 위대한 이탈리아 논문들이 여전히 중세 편찬 모음집에 큰 빚을 지고 중세의 영향에 깊이 빠져있었는지 보여주는 시도를 할 것이다.

바르부르크의 가르침과 이미지의 시간성에 대한 불순함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존중은 하지만 아무래도, 소수집단 위치를 점한다고 해야 하리라. 그 외 다른 모든 곳에서는 한층 더 명확하고 더욱 뚜렷하게, 더 도식적이고 정신에 만족스럽게 예술의 역사를 시대 구분을 확립하려는 열망이 감지된다. 요컨대, 무효화에 사용된 작전은, 곰브리치가 대놓고 표명한 것처럼, 나흐레븐의 개념을 끌어다가, 애초에 도발의 장점을 지녔던 다양한 시간적 도식-그리고 결정론적 모델들-로 방향을 전환하는 일련의 이론적 배제-대체하며 더욱 은밀하게 움직였다. 따라서 생존은 원형이라는 시간무관한 개념으로, 또는 영원한 순환이라는 발상으로 끌려갔다. 이런 일은 이미지의 역사에 필연적으로 찍혀있는 '연속성''변화'의 혼합을 적은 비용을 써서 설명하기 위해 벌어졌다.

생존이라는 개념은 또한 고대의 물질적 유물에 혹은, 좀 더 일반적인 출처에 대한 의문에 보다 실증적인 방향으로 이끌리기도 했다. 또한 보다 형식주의자적인 관점, 영향에 대한 관점 향해 끌려갔다. 또한 도상학적 전통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과 더불어, 더욱 일반적으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특정 고대 예술 장르를 특징지었던 검토되지 않은 영구적 요소들에 관심 있던 학자들에게 이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사회학적으로 정보에 근거하는 수용이론으로 반대 방향에서 혹은 '고대에 대한 취향'에서, 모방 또는 단순히 고대의 '양식 규범'에 대한 '참조'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했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지건, 그렇지 않으면 파스파르투(만능열쇠)로 사용되었건, 하지만 어쨌든 모든 이론적 중대성은 벗겨나가고, 바르부르크의 나흐레븐은 더 이상 토론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동화/흡수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반대이다. 오히려 시간의 불순물이라는 역사적 개념으로 바르부르크에게 빚을 지고 있지만 결국 그런 이유로 그를 비난하던 바로 제자로부터 내쫓겼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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