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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디부크(dibbouk, 악령)을 쫓아낸 대제사장은 다름 아닌 에르빈 파노프스키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리라. 곰브리치 자신도 마지못해, 여러 세대에 걸쳐 미술사학자들에게 바르부르크의 작품에 “균형잡힌 시각을 적용”하여, 나흐레븐을 효력 정지시키는 방식으로 내쫓는 이론적 퇴마술을 확립한 것은 주로 파노프스키 때문이라고 인정했다. 파노프스키는 일찍이 1921년, 바르부르크가 ‘뒤러와 이탈리아 고고학’에 대해 강연한 지 불과 15년 후, 너무나도 비슷해 이전 출판물과 경쟁하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의 논문 “뒤러와 고전 고고학”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온갖 진부한 찬사의 표현에도 불구하고 ‘생존’이라는 곤란한 문제는 이미 ‘영향’의 한 문제로 자리를 내주었고 바르부르크의 작품에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내용과 연결될 수 있는 ‘비장함’에 대한 질문은 칸트의 “이상적인 아름다움[deau idéal]”과 고전 수사학에 대한 여러 참고문헌으로 뒷받침을 받아, 유형화 및 “중용 juste milieu”의 난제로 길을 내주었다.
파노프스키가 1929년에 쓴 부고 기사에는 ‘바르부르크의 핵심적인 문제’인 ‘나흘레븐 더 안티크’라는 표현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으며, “생존”에 대한 언급 대신 오로지 고대의 ‘유산’(Erdteildes Altertums)과 고대의 '수용의 역사'(Rezeptionsgeschichte der Antike)만 온통 언급되었다. 그 후 1933년, 파노프스키는 이미 바르부르크의 개념 도식을 가능한 한 역사화하려는-그 자체 합법적인 시도를 펼친- 프리츠 작슬의 노력에 합류하여 “중세 미술의 고전적인 신화”에 관한 장문의 글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회보에 발표했다. 이 글은 영어로 된 그의 첫 번째 중요한 출판물이었고, 그의 망명(나치 독일에서의 도피)을 제국의 영토(학문적 미술사에서의 확실한 지배)로 변화시킬 새로운 지적, 제도적 맥락의 ‘입국 비자’였다.
이 글을 '고대 신들의 생존'에 관한 바르부르크의 저술의 연장선으로 읽어도 무방하며, 어느 정도까지는 마땅하고 볼 수도 있다. 파노프스키와 작슬은 바르부르크 자신이 직접 연구하지 않은 연대기 영역에 나흘레븐 개념을 적용하는 데 흡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생존에도 한 자리 선사하고, 부분적으로나마 바사리 식의 역사적 관점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리도 만든다:
기베르티, 알베르티, 특히 조르지오 바사리와 같은 예술사에 관한 아주 초기 이탈리아 작가들은 고전 예술이 기독교 시대 초기에 전복되었다고 생각했으며, 그리고 14세기와 15세기에 고전 예술이 이탈리아에서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기조의 초석이 될 때까지 소생을 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르네상스가 중세와 무수한 연결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틀렸다. 고전적 개념은 문학, 철학, 과학, 예술 개념 다방면으로 중세 내내 살아남았으며 특히 샤를마뉴 시대 이후에는 특히나 강세를 보였다. 샤를마뉴의 통치 기간에 모든 문화 분야에서 의도적인 고전적 부흥이 두루 있었다. 하지만 중세시대에 고전적 개념 아래 지속된 예술적 형식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대에 대한 관념과는 완전히 달라, 예술적 형식이란 점에서는 초기 작가들은 옳았으며 이런 형식은 잘 정의된 역사적 현상으로서 고대의 '재탄생'이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르네상스'에 이를 때까지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러한 접근 방식에서 바르부르크적 의제의 확장만이 아니라 분기, 또는 심지어 어쩌면 반전을 암시한다는 점이 이미 감지되는데, 이래도 하지만 파노프스키와 작슬이 ‘계승자/신봉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이 확장되는가? 생존과 르네상스 간 양극화라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무엇이 역전되거나 버려지는가? 구조적 내용 또는 공시적 측면, 비동시적 측면, 간단히 말해 이중 리듬의 시대착오적 측면이다. 그 이후로 이들은 가치와 시간이란 면에서 더욱 깔끔하게 분리되고, 계층화되고 시대화된다. 생존은 예술사의 하위 범주가 되어, 이로 중세는 예술적 '관습'의 시대, 고전적 규범의 '점진적 퇴보'의 시대, 마지막으로 형식과 내용의 불행한 '해리'의 시대로 만든다; “중세의 정신은…고전적 형식과 고전적 주제 문제의 통일성을…깨달을 수 없다.”
르네상스는 그 나름대로, 미술사의 상위 범주가 되거나 다시 될 것이며, 이로 15세기 그리고 16세기가 예술적 활동의 최고봉, 고고학적 정확성, 따라서 양식적 순수성의 정점이 된다. 파노프스키와 작슬을 읽다 보면 “진정한 의미의” 르네상스, 즉 “잘 정의된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르네상스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탄생을 목격한 유일한 시대라는 생각까지도 들 것이다. 특히 상징적 부담과 조형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이, “르네상스에서 실현된 고전 신화적 주제의 재건/재통합은 일반적인 진화의 발동기이자 특징이었고, 상징주의와 관습이라는 보호막이 벗겨진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재발견으로 막을 내린다.” 아마도 모든 팽팽한 긴장이 제거된 것은 아닐 것이다(그리고 이 점에서 파노프스키와 작슬은 반-종교개혁, 말하자면 르네상스의 끝을 일깨운다). 그러나 생존의 기간들이 결핍된 것들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목도하던 예술적, 문화적 위기를 극복했다는 찬사를 받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오직 '고전적 조화' 뿐이다.
오직 하나 개념적 난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르네상스라는 개념은 생존이라는 개념과 쉽게 조율되지 않는 두 가지 측면과 대립되었다. 위계적 대립이 필연적으로 연대기적 연속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파노프스키는 “르네상스”라는 단어 안에서 두 가지 다른 개념적 지위/등급으로 구분하여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았는데, 여기서 그가 “혁신”이라고 부르는 공시적 지위와 “잘 정의된 역사적 현상”인 “르네상스”로 구분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는 파노프스가 보기에, “혁신”일뿐이다. “진정한 의미”라는 말을 쓸 수 있는, 르네상스는 15세기와 16세기의 르네상스뿐이다. 생존은 한편으로 상대적인 불확실성의 그림자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1944년부터 파노프스키는 이때까지 ‘혁신’이라고 불렀던 것을 지칭하기 위해-불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리네선스renascence/부흥’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체계는 1960년에, 『서양 미술의 르네상스와 리네선스』를 통해 최종 마무리를 짓는다. 그가 1952년에 행한 강연을 토대로 8년 간의 오랜 성찰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다. 파노프스키는 카롤링거의 “혁신” 또는 갱신, 그리고 일반적으로 중세가 경험한 모든 “원시적 인간주의” 순간은 결코 엄격한 의미에서 “르네상스”가 아니라 다만 “부흥”, “고대로의 회귀”하는 단편적인 순간일 뿐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이제 우리는 서두에서 밝힌 기본 문제-역사의 연속성과 변화 사이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3원적 구조로, 파노프스키가 『도상학 연구』의 서문에서 제시한 ‘일차적 주제’, ‘관습적 주제’, ‘내재적 의미’ 사이의 유명한 '기호학적' 구분과 유사한 개념적 틀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파노프스키에 따르면 전체 '역사적 시간 이론'은 세-기간의 위계로 체계화할 수 있다. 그 정점에 르네상스가 있으며, 그 첫 대문자는 연대기적 중심성과 시간무관한 존엄성을 모두 나타낸다. 파노프스키는 ‘자아실현’, ‘자각’, ‘현실융합’, ‘전반적 현상’ 등, 사실상 헤겔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이러한 존엄성에 힘을 실었다. 파노프스키에게 르네상스는 예술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각성, 다른 말로 자신의 역사와 자신의 '실현' 또는 이상적인 의미에 대한 자각이었다. 그래서 결국 같은 말을 한 바사리의 말이 옳았다는 뜻이다.
이 단계에 앞서 예견처럼, 중세의 긴 과정에서 고전주의의 각성을 경험한 그 순간들은 양식의 역사를 뒤흔들었던 다양한 부분적인 “갱신” 혹은 ‘리네선스/부흥’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순간들과 동떨어져 자고 있는 ‘잠’이라는 배경이 있다. 파노프스키는 이에 이름을 붙이기를, 이론적 지위를 부여하기를 주저하다가, 겨우 한 페이지 귀퉁이에 “인큐베이션 기간”이라고 언급하는데, 여기에 관련된 것이 다름 아닌 바르부르크의 ‘생존’ 개념임은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르네상스와 리네선스』의 마지막 문장에 이 생존의 '구원받지 못한 유령'을 이제 마침내 부활-소생한 고대인들의 고전주의의 영혼-이상적이고 막연하고 불멸하며 편재하는 영혼-과 대치를 시킨다:
중세는 고대를 묻지 않은 채로 두었다가 번갈아 가며 그 시체에 전기충격을 주고 퇴마술을 행했다. 르네상스는 그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 영혼을 부활시키려 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상서로운 어느 순간, 성공했다. 다 이런 이유로 중세의 고대 개념은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불완전하고 왜곡된 반면, 지난 삼사 백년 동안 점진적으로 발전한 근대의 고대개념은 포괄적이고 일관성이 있지만, 감히 덧붙이자면 추상적이다. 이것이 바로 중세의 리네선스가 덧없고 일시적이었던 반면, 르네상스는 영구적인 이유이다. 부활한 영혼은막연하지만 불멸성과 편재성이라는 장점이 있다.
이 문장들에서는 하나는 바사리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빙켈만에서 비롯한 두 가지 대칭적인 칭송의-이쪽도 저쪽도 이상주의자-의 메아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릇된 유령과 생존자들에게 죽음을! 부활한 불멸의 영혼이여, 만수무강하라! 물론 이 모든 표현들은 단순히 미학적 선택이다. 환상적인 선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정당한 선택이다. 그러나 그런 말이 여기 진실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미술사를 객관적인 과학으로 정립하려는 의도를 꾀한 담론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 귀결은 미술사를 다양한 생존의 불확실한 시간보다는 “잘 정의된 역사적 현상”에 대한 연구로 향하게 된다. 불멸의 발상들은 옹립하고서 모든 유령의 이미지들은 멀리 보내버렸다. 이 접근법은 르네상스에서, 불순물이 없는 시대를 보기를, ‘표준’으로 역할을 하는, 그 속에 균질성, 형식과 내용의 '재통합'을 또렷이 읽을 수 있기를 바랐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바르부르크의 직관을 거부했다.
“진실은 시간의 딸이다[Veritas filia temporis]”라고 고대 격언은 말한다. 그러나 역사가에게 문제는 정확히 어느 시간이, 또는 시간의 복수로, 어느 시대의 진실이 “딸”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바르부르크의 제자로서 파노프스키는 이미지를 논의하는 데 있어 시간의 복잡성과 시대착오성을 인식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따라서 역사적 시간 문제에 관해 그가 독일 시절에 쓴 글[Zum Problem der historischen Zeit]에서 그는 미술사에 사용될 수 있는 어느 진화 모델이건 따라붙는 이론적 어려움을 소개하기 위해 중세의 예를-전혀 우연이 아니다- 사용했다:
특히 랭스 대성당 조각품들은 끝없는 다색 거미줄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그 안에서 아주 다양한 실가닥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때로는 나란히, 때로는 반대로 달린다. 이러한 개별적인 양식 방향들은(현저한 품질 차이로 하지만, 선형적 진화를 의도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듯해도) 상호 연결들에는 개의치않고, 단순히 평행하게 진행하지 않고, 서로서로 뚫고 들어가며, 그뿐만 아니라 반복해서 되돌아간다... 따라서 이 끝없는 준거 틀의 다중도는, 미술사학자의 세계를 주로 구성하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정형화할 수 없는 혼돈에 이른다. ... 그렇다면 우리는 짐멜의 용어를 사용하여, 자급자족 고립과 비합리적인 특이성에 동결되어 고정된 그러한 준거 체계가 병존하는 곳에서 균일성 없는 세상에 직면하지 않는가?
파노프스키는 실제로-바르부르크와 함께-시간의 불순함을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제거하고 해체하여 (르네상스가 하나로 포함된) 황금시대의 미적 야망과 “준거 시대”라는 역사적 야망을 되새기는 질서 정연한 틀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따라서 1931년 그의 글은 랭스 대성당 조각의 '연대기'가 언젠가 그 다양한 양식 참조 체계를 명확히 하고 위계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마무리된다. 이것은 모든 이상주의자나 실증주의 역사가의 열망을, 일단 관련된 시기들이 다 분석된다면 다시 ‘순수’하게 되리라는 열망을 표현한 것이다. 좋은 와인에서 ‘앙금들’이 제거되는 것처럼 역사에서 생존들이 논리적으로 제거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가능할까? 어떤 의미에서 이상적인 와인이란, 아무것도 없는, 그 양식과 ‘생명’을 부여하는 불순물이라고 전혀 없이, 즉 맛이 전혀 없는 와인이다.
역사적 생명:형식, 힘 그리고 시간의 무의식
바르부르크에서 파노프스키로, 그리하여, 한 단어가 더 이상 쓰이지 않고 잊혀졌다. “생존”, 나흐레븐이란 단어이다. 그와 더불어-그 단어의 근본적인 불순물과 함께-그 단어 안에 포함된 두 번째 낱말, 레븐Leven, “살다”가 사라졌다. 파노프스키는 딱 봐도, 이미지의 ‘의미’만을 이해하려 들었던 반면, 바르부르크는 또한 이미지의 '생명', 즉 그가 가끔 언급하지만 대체로 정의하기를 거부하는 비인격적인 ‘역량’ 또는 ‘힘’(Kraft, Macht)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거의 공리화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매우 중요한 이 어휘를 그는 어디서 얻었을까? 제일 먼저 부르크하르트에게서 비롯되었다. 그에 관해서 그는 곧잘-르네상스 시각 문화에서 수명 짧은 장관의 구경거리에 대한 역할로 지칭을 하며-“삶에서 예술로의 진정한 전환”(ein wahrer Ubergang aus dem Leben in die Kunst)을 찾으려 했다고 말했다. 부르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바르부르크에게도 예술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필수적인’ 문제였다. 마찬가지로 그에게 역사는 단순한 연대기적 질문이 아니라 상당한 소용돌이, 오랜 기간동안 문화를 통해 계속되는 ‘생명’에 대한 논쟁이었다.
따라서 바르부르크에게 이미지의 역사는 이미 부르크하르트 때문에 일찌감치 존재했던 것으로, (하지만 파노프스키 이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생명에 대한 문제” 그리고 –이 “생명” 안에 죽음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생존에 대한 문제”였다. 여기서 개진된 ‘생체표현/biomorphisme'은 바사리나 심지어 빙켈만과도 공통점이 없다. 여기 문제의 “생명”은 부르크하르트와 바르부르크가 보기에 문화 개념으로 요구되는, 비자연적인 요소 없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불순물이라는 요소’ 없이는 존재하지도 않는데, 그들 각자가 다, 역사적 시간이라는 바로 그 개념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수수께끼 “생명”을 간략하게 정의해 보겠다. 이는 내가 보기에 (인류학적 접근이 필요한) 기능의 놀이이자 동시에 (형태학적 접근이 필요한) 형식들의 놀이이며, 마지막으로 (역동적 또는 정력적인 접근이 필요한) 힘의 놀이로 이해될 수 있는 것 같다.
“생명"은 한 문화의 생명인 것처럼 기능의 놀이이다. 이 점은 부크하르트의 철학적 인류학을 아직은 모호한 용어로 “영혼” 또는 “문화”를 “사람 의식의 내밀한 상태”로 이해하며 읽은 그의 첫 번째 독자들의 관심을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1887년 에밀 게브하르트는 르네상스의 비밀을 찾아다니는 대상은 “이탈리아 영혼”이라고 썼으며 그리고 ‘문화’라는 단어로 사람 의식의 내밀한 상태를 표현하고 싶어했다. 그에게 “정치, 학식, 예술, 도덕, 쾌락, 종교, [그리고] 특정한 ’활력forces vives’의 작동을 나타내는 미신이, 이 모두가 역사의 위대한 사실”이었다. 우리는 부르크하르트의 컬투르그슈히테가 사회사로 새로운 시선을 받았고 그와 똑같이 바르부르크의 쿨투르비센샤프트Kuturwissenschaft가 파노프스키식 도상학과 예술의 사회사로 재조명받은 것을 안다. 이 과정에 그의 모호성 중 일부는 내버려 두었지만 (그리고 그건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런 모호성들과 함께 그의 주요 이론적 가설과 아주 적절히 들어맞는 비평적 표현 중 일부도 제쳐두었다. 바르부르크 자신의 설명으로 어느 정도 명시적으로 다시 갖다 넣은 몇 가지를 언급해 보겠다.
부르크하르트에게 기능의 놀이로 간주했던 ‘생명’은 애초에, 사실들의 생명도 아니고 체계의 생명도 아니다. 문화에서 ‘생명’과 문화 속에서 구체적인 움직임에 대해 꼭 되짚어보고 넘어가야 하는데, 왜냐면 실증주의 역사는 연대기적 사실을 확립하려고 다급히 서두르느라, 다른 모든 것을 애써 가리고 지우는 경향이 있고, 이상주의 역사, 특히 헤겔의 역사는 거창하고 지나치게 추상적인 진리를 공표하려는 욕심에 모든 것을 다 모아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단순화하려는 욕망의 결과로, 즉 복잡성을 부정하려는 욕망의 결과로 시간 그 자체가 육신/물질세계를 벗어나게 된다. 반면 '문화로서 생명'은 자연으로서의 역사 대 아이디어로서의 역사라는, 진짜 오직 도식적인 그래서 사소하지만 생긴 딜레마를 넘어서기 위해 고안된 대단히 중요한 공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역사는 자연과 같은 대상이 아니며(die Geschichte ist aber etwas anderes als die Natur) 다른 방식으로 생성하고, 태어났다가 썩어 없어진다. 원초적 본능에 따라 자연은 한결같이 유기적으로 매우 유사한 개체들을 포함하는 무한히 다양한 종을 창조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물론 호모라는 한 종 안에서도) 다양성은 아주 그리 크지 않다. 명확한 경계선은 없지만 개인은 보상 유인이 큰, 발전을 부추기는 불평등을 느낀다. 자연은 몇 가지 원시 모델(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 종자식물 및 민꽃식물)에서 작동하지만, 인간의 경우 사회적 신체는 유형이 아니라 점진적인 산물이다... 나아가 우리는 체계를 만들 어떠한 시도(wir verzichten ferner auf alles Systematische)도 벌이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역사적 원칙”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방향에서 역사의 횡단면들을 관찰하는 일에만 국한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역사철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헤겔은… “영원한 지혜의 목적”에 대해 말을 하며, 그의 연구를 부정적인 것(대중적인 용어로 악)이 사라지고 종속되어 극복하는 긍정적인 것을 인정한다는 이유로 신정론(神正論)이라고 부른다…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지혜의 의도에 범접하는 일도 허용되지 않는다. 신의 섭리 구상에 대한 이러한 대담한 가정은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오류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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