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
2019-11-16
노래, Song
나도 한때는 대단한 가수였다. 사람들이 나를 꼬맹이 카루소라고 불렀다. 리틀 데어 빙글이라고. 빙 크로즈비나 시나트라 같은 간들간들한 봄바람 같은 가수들이 그 시절에 여전히 잘 나갔다. 내 레퍼토리에는 “딸랑, 딸랑, 딸랑, 트롤리가 지나갔네.”가 들어있었는데, 노면 전차 차장이 되겠다는 내 포부에 디딤돌이 된 노래였다. 우리가 엘 고가전철을 기다리고 있으면 어머니가 흥얼거리는 이름 없는 곡조 “이른 아침에 정거장에 내려가, 나란히 줄을 선 칙칙폭폭 기차를 보고”를 부를 줄도 알았고, 외삼촌 레프티이 바꿔 가르친 “선원 포파이/뽀빠이”도 알았다. “나는 선원 포파이, 차고 쓰레기통에 산다네, 나는 모든 고물을 먹고 스컹크처럼 고약한 냄새가 나, 나는 선원 포파이, 그게 나,” 이런 식으로 나간다.
하지만 내가 유명세를 얻은 곡, 다들 청하고 또 청해듣던 곡은 저런 곡들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나를 바 위에 올려놓으면, 나는 발을 조심해서 맥주병과, 큰 맥주잔과, 작은 술잔들 사이에 단단히 붙이고, “올드맨 강”을 힘차게 불러 젖혔다. 나는 이 노래를 아버지가 수염을 깎으며 구슬픈 바리톤으로 부르는 것을 귀로 듣고 배웠다. 그 시절에 인기 있던 곡은 아니었다. “그건 아모레,” 혹은 “너무 뚱뚱한 폴카”가 거의 십중팔구 나란히 “사냥개” 스피커에서 쿵쾅거리는 그런 술집에, 깡패단이 억지로 들여 놓은 주크박스에서 찾을 수 있는 노래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서 술을 마시는 남자들은 바지선을 나르고 짐짝을 부렸고, 술 한 잔 하고서 철창신세 진 사람들이었고, 이를 증명하는 문신을 지니고 있었다. 시끄러운 선술집은 조용해지고, 객쩍은 이야기들은 가사에 자리를 양보했다.
“어린 녀석치고 상당히 깊은 목소리를 가졌어.” 누군가 입에서 꼭 이런 논평이 나오곤 했다.
내가 강바닥으로 깊이 잠수로 내려가듯 마지막을 길게 빼며 노래를 마치면,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동전들을 우르르 던지고, 가끔은 두어 장 지폐도 던졌다.
“이 꼬마 신사는 무얼 마시나?” 그들은 레프티 외삼촌에게 물었고.
“뭘 마실 텐가, 챔프?” 레프티가 그 말을 전달했다.
“루트 비어,”라고 말하면 떡 하니 루트 비어가 나왔다.
나는 바 위에서 다리를 달랑거리며 앉아, 무거운 스테인(큰 맥주잔)을 벌컥거리며 비웠다. 노래 부르면 늘 목이 말랐다. 그러면 역시 한두 잔 공짜 술을 걸친 레프티 외삼촌은 니코틴에 찌든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빗기고, 조율이라도 하는 듯 내 단추들을 바로하고, 꾸리고 있는 악기라도 되는 듯, 살살 나를 바에서 내려놓았다. 그가 술집에서 술집으로 순번을 돌며 지니고 다니던 악기-가끔은 목마 태우듯 지고 다니던-악기처럼.
23번가 듀스 와일드Deuce Wild에서 세인트 카스미르 건너 풀러스키 클럽으로 가곤 했고, 거기에서 짚 인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대전쟁에서 오른팔을 잃은 짚이 바의 일을 보았다. 짚은 항상 그의 흰 색 셔츠의 텅 빈 소매부리를 깔끔하게 접어 플라스틱 빨래집게-붉은 색, 파란 색, 노란 색, 푸른 색-로 집고 있었는데, 사내들이 넥타이 색깔 바꾸듯이 그 색깔을 바꾸었다. 그의 술집 벽에는 그가 후원하던 소프트볼 팀의 사진들이 액자에 담겨 걸려있었고, 또한 권투 글로브를 몸에 바짝 당기고 있는 레프티 외삼촌 젊은 시절 사진도 있었다. 외삼촌이 골든글로브 토너먼트에 출전했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오 내 친구, 좌익수.”하고 그는 우리를 맞아들이곤 했다.
“진짜 왼손잡이 투수인 척 좀 그만 해.” 레프티는 그렇게 맞받았다. “아무도 안속아.”
“인정해. 나 변절자야. 어이, 하지만 변절자가 진짜 신실한 신도라고. 사실이지, 내 오른팔이 오늘은 쑤셔 죽겠네. 비 온다는 뜻이지.”
“짚, 벌써부터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어.” 알아서 바의 그릇에서 삶은 계란을 까먹으며 레프티 외삼촌이 말했다. “흠씬 젖지 않았으면 이런 싸구려 칙칙한 술집에 우리가 납셨겠냐고.”
짚과 나는 둘 다 놋쇠 타구를 문버팀쇠처럼 받쳐 놓은 문 밖을 흘낏거렸다. 파란색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는 햇살이 희미한 선술집 안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짚는 나를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레프트 외삼촌은 짚의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던 체크무늬 행주를 낚아채고 젖어 뚝뚝 물이라도 떨어지는 듯이 내 머리카락을 닦았다. “헛통증이 헛 비를 불러들였네.” 그가 설명조로 말했다.
“페리, 네 외삼촌 진짜 이상한 사람이다,” 짚이 말했다.
“짚, 이 꼬마가 노래 잘 한다고 내가 말했던가?” 레프티 외삼촌이 물었다.
그리고 나중에 내 주머니에 팁으로 받은 동전을 짤랑거리며, 우리는 보이지 않은 우산을 펴들고 짚에서 나와 헛비 속으로 발을 들이고, 데이먼 대로의 레즈(Red’s) 가는 길에 오르거나 체막 볼링장에 있는 아주 추운, 민트 블루 바에 갔다. 에어컨디셔닝이 여기서 창안되지 않았나 생각되는 곳이었다. 아니면 타코도 나오는 화니타로 가거나, 슬롯머신들이 있던 VFW로 갔다. 인근에 오후 반나절로는 우리가 다 방문하지도 못할 정도로 바가 넘쳤다. 들르는 곳마다 같았다. “올드맨 강,” 박수갈채, 술집 잔돈, 그리고 루트 비어, 내가 한 잔 마실 때마다 보일러메이커(위스키 한 잔에 입가심 맥주 한잔)을 두 번 꿀꺽이던 레프티 외삼촌이 “너 그러다 오줌에 맥주거품 나오겠다. 네가 몇 잔이나 마셨는지 엄마에게 말하지 마, 안 그러면 우리 둘 다 눈 밖에 날 거다,” 경고장을 날릴 때까지 이어졌다.
어머니는 외삼촌의 손윗누이였다. 외삼촌이 아이일 적부터 얼마나 음악가가 되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는 말은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어릴 때부터 외삼촌은 만성기관지염을 달고 살았는데, 어머니는 그가 병이 나 학교 안 가는 날에는 진공청소기 부착품들로 악기를 고안하는데 쓰더라고 기억했다. 그는 밤에 가족들 앞에서 콘서트를 열곤 했고, 홈메이드 관악기로 입으로 훗훗 소리를 내며 음계를 오르락내리락 손가락을 바삐 꿈지럭거렸다. 어머니 말로는 레프티 외삼촌은 진공청소기 분사구이든 판지 대롱이든 부는 척 흉내 낼 수 있는 뭐든 들었다하면 아무 관악기 소리라고 완벽하게 흉내낼 수 있었다고 했다.
외삼촌이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외삼촌은 신문 배달에서 트럼펫을 살 수 있을 돈을 충분히 모았는데, 트럼펫 사고 일주일 후에, 학교 운동장 싸움판에서 앞니 두 개를 잃었고, 이 때문에 그의 취구법이 영 망가져버렸다. 그래서 그는 트럼펫을 테너 색소폰과 맞교환을 했고 몸조심의 예방책으로 세인트 비투스에서 권투수업에도 등록했다. 여기서 전직 헤비급 선수 출신인 페른 허엄 신부가 가톨릭 유청소년회 권투시합(CYO)에서 싸울 소년들을 훈련을 했다. 외삼촌은 몇 달 동안 엄마의 침실 문에 있던 전신 거울을 독차지하고 땀에 절도록 자신을 보며 섀도우복싱을 했다. 거울 속의 상대는 레프티의 이빨을 부러뜨린 바바 바차타였다. 레프티의 권투에 대한 집착이 보복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외삼촌이 바차타를 묵사발로 두드려 패고 이 일로 머리끝까지 화가 난 허엄 신부가 집으로 득달같이 달려올 때까지는 아무도 의심하지 못했다. 레프티는 세인트 비투스 CYO에서 퇴출당했고, 그 다음해 외삼촌 신문배달 수익금은 바차타 이빨 치료비 대는데 들어갔다.
외삼촌이 새도우복싱을 하고 있지 않을 때면 레프티는 줄창 지하실에 있으며 “외삼촌 색스를 연습을” 하였다. 걔는 연습을 한다고 했지만, 비록 진공청소기 부착물 연주 못하듯 실제로는 이 악기도 연주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 말씀이 그랬다. 가족들은 외삼촌이 여러 음을 이어 연주하고 빵빵거리고 길게 흐느낄 때는 난방용 도관을 통해 올라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흉내 내는 소리가 어찌나 진짜 같은지, 실정을 몰랐다면 저 아래 어떤 노래든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는 무슨 거장이 있나 싶을 게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의 손가락이 아직도 상상 속 음계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 모사의 연주가 예전에 삼촌이 저녁 식사 후에 콘서트를 열어줄 때 귀엽게 받아 줬겠지만, 더 이상은 어머니에게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그 모든 음악에 즉시에 표현되지 않는 무언가가 그러면서도 동생에게서 분출되는 무언가가, 외삼촌 머릿속에 쉬지 않고 소용돌이치는 그 모든 소리에, 어머니는 그가 영 염려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어머니는 외삼촌이 “달이 어찌나 높은지” 즉흥 연주를 하다가 갑자기 멈추는 것을 들었다. 침묵이 흐르더니 금속성의 끽끽 소리가 따랐고 그런 뒤 다시 끽 소리 다시 끽, 음들이 자꾸 멈칫거리며 끽끽거렸다. 마치 귀 먹은 사람들이 노래 부르는 법을 배우면 아마 그런 식으로 가사의 발음이 흘러나올 것이다. “어디…인가에 음악이 있는…가 달이 어찌나 높은지?” 어머니는 레프티가 마침내 리드를 마우스피스에 맞춰 넣었구나, 그리고 부는 법을 혼자 깨우치려 하고 있구나, 깨달았다.
고등학교 마칠 무렵에 레프티 외삼촌은 웰터급으로 자랐고 케지에 있는 곤조 체육관에서 골든글로브즈를 목표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더 몸이 가벼운 멕시코 싸움꾼들이 권투를 하던 데였다. 그는 독학으로 한때 가짜로 연주하던 때와 엇비슷할 정도로 능숙하게 색스를 연주했다. 패러것 고등학교 출신 몇몇 단짝들과 그는 블루버즈를 시작했다. 레프티 외삼촌는 묘비밥 폴카 밴드라고 묘사했다. 이들은 술집에서 파티와 결혼식에 연주를 했고 레프티 외삼촌이 색스와 보컬을 맡았다. 외삼촌이 말할 때 그 탁한 쇳소리로는 노래하는 모습이 상상하기가 영 어려웠지만, 어머니 말씀으로는 레프티가 젊었을 적에 벨벳 안개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가수 멜 토르메처럼 달콤하고 부드럽게 노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레프티 외삼촌은 한국 POW(전쟁포로) 수용소에서 돌아왔는데, 만성적으로 거칠고, 걸쭉한 쉰 목소리로 이후 한해 내내 캘리포니아 VWF(해외참전보훈) 정신병원으로 우회하여 들어가 있었다. 록앤롤 가수라면 부러워할 목소리였지만, 록앤롤은 외삼촌이 자랄 적에 연주하던 음악이 아니었다. 외삼촌으로 한국 파병으로 배에 오를 적에, 세계2차대전 시절에 나온 노래들이 갈피를 못 잡고 공중에 미적거리고 있었다. 외삼촌 전쟁시절에 그 자신의 음악이 없었고, 몇 년 후, 외삼촌이 미국에 다시 발을 들이자, 나라의 충성도는 또 다른 비트로 옮아간 뒤였다. 걸걸한 목소리는 내가 실황으로 들었던 유일한 목소리였지만, 외삼촌이 샌디에고에서 군인 수송선이 일본을 향해 항해를 나서기 전에 얻어 나온 휴가 때 어머니에게 보낸 긁힌 소리 투성이 45 rpm 레코드는 들은 적이 있었다. 레프티 외삼촌은 아카펠라로 “나는 어디서든 너를 보겠지,”를 달콤하게 불렀다. 조잡한 아세테이트의 디스크에서조차, 막판에 “내가 달을 보고 있겠지만 나는 너를 보겠지,” 이르자, 외삼촌 목소리 속 벨벳 같은 비브라토를 들을 수 있었고 그 말을 하려고 몸을 돌려보니 어머니는 이미 방을 떠난 뒤였다. 그게 내가 그 레코드판을 본 마지막이었다.
어머니는 외삼촌에게 절대 전쟁에 대해서 묻지 않겠노라 내게 다짐을 받았다. 나는 이 약속은 꼭 지켰는데,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나가는 외출을 위태롭게 할 어떤 일도 하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그가 마침내 한국에서 돌아왔고 하니, 모두들 외삼촌이 밴드에서 다시 연주를 재개할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현재로는 레프티 외삼촌이 관심 있어 하는 유일한 플레이가 포니(경주마)인 것 같았다. 부모님이 레프티 외삼촌이 나를 경마장에 데려가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에, 때로 토요일 오후에 외삼촌은 마을 건너 컵스 경기에 갈 거라는 말을 하고, 대신 우리는 시서로로 향했다. 거기 스포츠맨 파크에서 설키(일인용 마차경주)들이 달리고 있었다. 스포츠맨 파크 후에 우리는, 우리가 지든 이기든, 우리의 승리를, 시서로의 술집들을 향해 정례적인 노래 부르기 코스를 따라 자축을 했다.
나중에 우리는, 거의 세간이 없는 대리석무늬 파란색 리놀륨 바닥 레프티 외삼촌 셋방에서, 드럼가죽처럼 팽팽하게 깔끔하게 정리한 침대의 군용 담요 위로 우리의 주머니를 비웠다. 우리는 수익을 세고, 레프티 외삼촌은 “우리 이제 땅콩하고 캐러멜에 둘러싸이겠다야,” 말했다. 외삼촌이 영 승산 없던 내기를 맞혔을 때도 같은 말을 썼다.
어머니조차 블루아일랜드 대로 3층에 위치한 방 한 칸짜리 외삼촌 셋방에 들른 적이 없었다. 블루아일랜드는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사는 거리는 아니었다. 나는 그 구역 저 한끝으로 보이는 호수를 상상하곤 했다. 가냘프게 끼룩거리는 갈매기들, 마치 선창처럼 나무로 지은 뒷마당 포치를 때리는 호수 물을 그려보지만, 외삼촌이 이 거리 이름은 유령 같은 섬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는 이야기해줘서 머리에 떠오른 환영이었다. 지금도 가끔 호수의 수평선에 이 섬이 떠오르는데, 블루아일랜드 인디언들이 한때 정착해 살다가 마지막 전사가 죽었을 때 눈에 안 보이게 가라앉았다고 했다. 아마 내 평생 동안 섬을 향한 동경은 그런 거리 이름이 전하는 희망같은 약속에서 나왔을 것이다.
갈매기가 아니라 비둘기들이 창문턱에 서성였다. 레프티의 멕시코인 이웃 한 명이 지붕에 우리를 놓고 비둘기를 키웠다. 끊임없이 구구거리는 비둘기 소리가, 외삼촌의 방을 통해 퍼지는 시원한 무풍의 한줄기 산들바람 같았다. 두어 번 외삼촌은 지붕들창을 통해 비둘기를 보러 나를 데려갔다. “드림즈빌에 온 걸 환영한다.” 말하곤 나를 뜨끈뜨끈한, 자갈박이 모르타르 지붕 위로 끌어올려주었다. 블루아일랜드가 굽어보이고, 성스러운 첨탑의 도시 저 너머까지 조망 가능한 곳이었다. 어머니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외삼촌이 술이 취해 색스를 연주하기 위해 비틀거리며 지붕으로 올라간다고 말하는 것을 엿들은 기억이 났다. 그를 내려오게 하느라 경찰들까지 불려왔었다.
“그런 미치광이 동생을 돌보지 않는다고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아버지의 말이었다. “그는 제 나름 알아서 삶을 꾸려가고 있고 어쨌거나 누구 말 들을 사람은 아니야.”
나는 뭐가 그렇게 미친 짓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드림즈빌에 올라가 비둘기들과 듀엣으로 연주하는 일이 내게는 완전 사리에 맞는 일로 보였다.
비둘기 그리고 곤히 잠들었다 새벽 3시에 깨는 이웃들 청중들을 제외하고 레프티 외삼촌은 더 이상 대중들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옛날 컴보(소규모 악단), 블루버즈는 외삼촌이 한국으로 떠났을 때 해체되었다. 외삼촌과 가장 단짝이던 블루버즈 출신, 우리가 브루저라고 부르는 덩치 큰 사내는 웨딩에 연주를 해주는 지역 밴드에서 여전히 드럼을 치고 있었다. 네가 한 블록 떨어져서도 브루저가 치는 드럼 소리가 들려. 브루저 베이스 비트는 음속 폭음이었고, 그 사람 림숏은(rimshot, 드럼 타면과 후프를 같이 치는 타법) 총소리처럼 날아가. 우리는 그 비트를 따라 열린 술집 홀 옆문으로 들어가 무도장 주위로 춤추는 사람들이 우와 함성을 지르는 동안 쌕쌕거리는 요령부득의 폴카 밴드 뒤에서 브루저가 천둥처럼 우르릉거리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그외(뻘짓) > Stuart Dybek' 카테고리의 다른 글
Live from dreamsville (0) | 2023.04.08 |
---|---|
I sailed with Magellan PDF (0) | 2023.04.02 |
노래 2 (0) | 2023.04.01 |
Undertow (0) | 2023.04.01 |
병뚜껑 bottle cap, 고양이 여자 (0) | 2023.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