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15일
가격에 심상치 않게 비쌀 때부터 알아 봤어야 되었다.
A3 만한 크기의 총천연색 양장본임을, 무작정 사고 받아 보고서야 깨닫다니
안은 물론 아카이브라고 칭한 만큼 자세하고 섬세한 도록으로 넘쳐나고 있으니
행복한 놀람이었다고 말을 아니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아래 글은 "잉마르 베리만의 열정 중 "초반기"에 관한 내용이다. 당연히 무단...
스물 여덟 쪽이나 되니 함부로 열지 않기를
어린 시절
어린시절의 구렁
“영화를 만드는 것은 어린시절의 구렁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것이다”라고 베리만 되풀이해서 이야기했다. 그런 어린시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화니와 알렉산더 이다. 여기서 그는 40년간의 영화를 요약을 의도하고 그의 예술을 거대한 최종적으로 표현하면서 예술가의 기원과 결합하는 상징적 원을 보여주었다. 베리만은 자신의 집안과 비슷한 스웨덴 한 집안의 드라마를 사뭇 매혹적으로 펼쳐 보이면서 경이에 휩싸인 풍부한 감성의 소년을 재창조했다. 확실히 영화에서 엑달 집안은 베리만 집안을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지만, 어린 알렉산더 엑달은 언뜻 보아도 어린 잉마르에 해당한다. 영화 제작자가 상당히 긴 시간동안 묘사하고 있는 가족은그가 행복하고 특별했다고 종종 묘사하던 따뜻한 기억들을 나타낸다.
그의 창조력은 어린시절에 있다고 베리만이 말한 것은 영화 제작에서 흉내내고 재조직하는 외형적 현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것의 작용 양상을 갖추는 정신학적 원동력을 말한다. 수차례 그가 그의 어린시절은 황금기였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많이, 더 생생하게 그 시절의 공포, 체계적인 굴욕, 뿌리 깊은 죄의식, 고통스러운 불안,현저한 거부에대한 감정 등을 이야기했다.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라고, 마침내 부모로부터 독립을 이루었을 때 “그것은 마치 기계 폐로 숨쉬다가 그제서야 혼자서 숨쉴 수 있게 된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화니와 알렉산더의 시작과 끝의 분위기는 가장 온화했던 베리만의 기억을 반영하는 거라면, 예술가 만들기의 초상에서 고딕풍의 중간 부분은 의식 내부로의 돌입이다. 이는 사실상 그가 쓴 모든 이야기, 연극, 영화의 중심이었다.
베리만은 그의 영화가 고찰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항상 심각하게 느끼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의 실행은 굿판이며, 제례의식이며, 신에대한 간구이며, 내적인 요구의 만족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기능들로 표현되어 보여진 은유적 유형을 밀접하게 고찰하면, 굿거리를 하는, 제례의식으로 중계되는, 혹은 충족되는 필요가 있는 것이 무언지 부모님과의 관계형성까지 되짚어 추적 들어가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베리만의 생애에서 어떤 다른 요소도 강하게 혹은 지속적으로 그의 꿈 같은 창조력에 영향을 미친 것은 없다. 그의 영화에 작용하는 상상력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가 그의 어린시절로 맞닿아있고, 그런 어린시절의 이해는 그의 부모님에게로 맞닿아있다.
그의 아버지, 에리크 베리만은 그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돌아가신 약제사의 아들이였다. 부친의 죽음에 이은, 누이의 죽음 그의 기질뿐만 아니라 장래 성직의 선택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장례 의식의 장엄함에 호기심을 느낀 외로운 소년은 가짜장례식에서 사제 역할을 하고 노는 장난을 좋아했다. 종국에 이 놀이는 신학을 연구하겠다는 결심으로 성숙했다.
웁살라 대학에 입학한 후에 그 도시에 살던 친척인 오케르블롬가에 방문을 했고 재종형제인 카린과 바로 사랑을 하게된다. 구애는 순조롭지 못했다. 양쪽은 조상이 비슷했지만, 양가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는 사제와 저명한 교수였지만 오케르블롬가는 사회적 계층에서 베리만가보다 위에 있었으며, 카린의 어마니, 안나는 웁살라 어느 곳에서 불어를 가르칠만큼, 지식 여성이었으며 신심이 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스무살 위인 홀아비 요한 오케르블롬과 결혼을 하였는데 그는 세 아들이 있었고, 진취적인 사업가였다. 그의 업적 중에는 남부 달라나 철도 회사를 세운 것도 있었다. 그러나 신학도의 구혼에 장애물은 사회적 계층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안나 오케르블롬은 그녀의 딸을 방문하는 이 청년을 아주 싫어했으며 그도 아주 똑같이 싫어했다. 카린과 에리크가 결혼을 생각하기 시작하자, 모친은 개인적 적개심을 넘어서 반대를 하였다. 요한 오케르블롬은 희귀한 진행성 근위축증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이건 에리크의 가문에도 존재하는 유전질환이었다. 이 사촌끼리 결혼한다면 그들의 아이들에게 이 특성이 발현될 확률이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에리크는 이 질환보유자 였으며 그의 말년에 발현하여, 결국 이 질환으로 사망하였다. 안나의 걱정은 예언인양 들어 맞아서, 이 커플의 첫번째 아이인 다그는 이 질환의 희생자로 1984년에 죽기전까지 거의 20년간 완전히 마비되어 지냈다. ) 게다가. 가족은 :신경과민적인 불안”이라는 심상치않은 역사도 보이고 있었다. 요한 오케르블롬의 첫결혼에서 얻은 역시 요한이라는 이름의 아들은 사춘기에 계모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정신분열증이 발병하였으며 남은 일생동안 과대망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카린은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에는 실제로 그녀의 어머니에게 맞서 에리크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의 성직수임식 이후에 포스바카 교회에 자리를 잡게 되자 결혼을 하였다. 그곳은 괴블 근처에 철노동자들의 작은 마을이었으며 여기서 베리만은 그의 어린시절의 많은 부분을 보내게된다.
몇 년이 지난 후, 부부는 시골마을을 떠나 스톡홀름으로 갔다 에리크가 외스테르말름 구의 헤드비그 엘레오노라 대성당 부사제로 고용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수도에 있다는 것은 흥분되는 변화였으며 그는 그의 직업에 크게 만족하였다. 그러나 카린에게는 여기는 고난의 세월이었다. 웁살라에 있는 어머니에게 항상 재정적 지원을 기댈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남편의 급료는 조금씩 늘어나는 가족을 근근히 부양하는 정도였다. 게다가, 세계대전으로 스웨덴에 식량공급이 달렸다. 스웨덴은 요즘엔 더 그렇지만 예전에도 일용품의 수입에 의지하던 나라라서, 배급량이 아주 빡빡해서 나라의 많은 지역이 심각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확언컨대 베리만 가족은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운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두번째 아들, 에른스트 잉마르가 태어났다. 1918년 7월 14일, 보롬스에 있는 안나 오케르블롬의 시골 별장, 케익을 구울만큼 달걀도 풍부한 시골에서 세례식을 축하하였다. 그렇다해도 젊은 목회자의 교구민들이 처한 우울한 상황의 결과는 그의 에너지를 혹사시켰다. 1918년 유월부터 1919년 2월사이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인플루엔자 대유행의 거도로 상황은 더 나빠졌다. 가을에 또 겨울에 에리크 베리만은 끊임없이 아픈 사람을 문병하는데 매달렸으며, 그가 묻은 사람들의 가족을 위로해야했다.
결혼한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내부적 긴장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에리크 베리만은 모든 사람의 애정을 받았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제였으며, 모든 나이대 여성의 찬탄을 끌어 모으는 잘생긴 사람이었다. 집에서는 그는 부수적인 인물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움직이는 것”은 그의 아내였다. 비록 “전적으로 그의 직업과 직위에 의해 구축되어 제한된 기본 도안 안에서 항상”이었지만. 그들의 기본적으로 비슷하지 않은 감정적 지적인 특징으로 이런 긴장은 점차 악화되었다. 잉마르의 여동생 마가렛타의 소설에서 “일종의 원시적인 전후 외스테르말름에 관한 민요”라고 소개한 구절에서 분위기를 살펴보자.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 예술적인 방면으로 재능이 있었다. 어머니는 비극여배우라할 수-이었으며, 아버지는 시인이었다. 두 분의 서로 맞지 않은 기질! 두 절망적인 불행, 불완전한 존재였으며 두 분 다 혼자이거나 혹은 좀 다른 생애 동반자였으면 웅장한 성과를 아마 가져왔을 사람들이 그들의 재능은 `왜소해지고, 빛바래가고, 약해져서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상호 파괴적인 생활 양식으로 짓부셔졌다
이 민요를 인쇄업자에게 보내야겠다 마음먹은 이후에, 나는 먼저 점잖은 독자들에게 아버지의 일상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명랑한 상태에서 어떻게 시작되는 지 설명해야만 할 것 같았다. 물을 철퍽거리며, 휘파람을 불며 환호에 차서 주기의 성가곡 일부분을 부른다. “이새의 지팡이에서 장미가 피었다네 혹은 지금 이 사랑스러운 여름 시간에 같은 것들이라 하겠는데 얼음같이 찬물에 샤워를 하고, 똑 같이 열정적으로 면도를 하고 이를 닦았다. 상당히 다른 문화적, 사회적 부류의 남자들은 아마 그들의 아내 아니면 정부와 그 이른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아마 이 비교는 보기보다 지나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쉴새없이 불쌍한 아버지, 정부 루터파 교회의 사제 그 모습대로, 성적인 실존 최소한의 수준에서 살고 있었다.
반면 어머니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밤의 절반을 그녀의 얼마 안되는 악덕-책읽기 같은-중의 하나에 탐닉하다. 잠시의 잠을 긁어 모으기 위해 수면제의 도움을 받아 짧은 시간 용케 잠을 잔다. 반만 깬 채로 더듬더듬 아침식사지리에 더듬더듬 나와 극도로 신경과민인 불안정한 상태에서, 그녀의 남편이, 금방 몸을 씻고, ….횔기하게 아침식탁의 의자 뒤에 배고픈 사냥꾼처럼 서있는 것을 발견한다. 손에는 황금 시계를 들고 포리지가, 잇따라 나올 다진 햄과 볶은 달걀이 든 볶은 감자, 절인 근대뿌리, 라라의 마녀 비약-보통 커피라부르는-이 차려지길 버티고 서있다. 아홉시, 딱 그 시간! 치명적인 충돌 경로가 차려졌다, 두 천상의 존재가 만나서 일으키는 충격은 거대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가끔씩 신이 개입하여 비껴가기도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대부분은 그분의 마음은 다른 문제에 돌아다니고 있나 보았다. 그러고나서, 이 두 정반대의 아침 체질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견디기 힘든 긴장이 피어올랐다. 처음엔 어머니의 하품으로 제어되다가 아버지의 한층 더 부자연스럽고, 성마른 활기가 조만간, 우리 어린아이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침묵으로 바뀌었다. 침묵은 이제 식사가 점차 끝나갈 무렵이면 웅장한 싸움으로 폭발할 것이었다. 말린과 나는 꼼짝없이 증인, 더 나쁘게는 동참자로 끌려 들어가 누가 이 말을 했느냐 누가 저 말을 했느냐 누가 틀렸느냐 그리고 누가 옳으냐라고 반대심문을 당했다.
성직자의 만족스러운 아내라는 허울 아래 그녀의 불행을 숨겨야하는 압박에 더하여, 그녀의 정열적인 천성은 결국은 토스텐 보린에대한 사랑으로 해방을 발견하였다. 보린도 성직자로 나중에 주교가 되었으며 어느정도 명성이 있는 신학자였다. 이 로맨스는 1925년 경 공공연하게 터져버렸다. (감정적으로 카린에게는 뒤틀린 한 해였다. 그녀의 유일한 친오빠 에른스트 가 8월에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잠시동안 그녀와 보린은 함께 도망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그리고 광포한 분쟁 속에서 베리만 부부는 이혼할 거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애인은 아마도 일어나게 될 손상을 헤아려보고는 다시 생각을 고친 것 같았고 그녀 역시 이혼이 아이들에게 가져올 결과와 그녀와 같은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스캔들의 오점이 무얼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 사이의 감정적 불화는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이미 성직의 의무라는 무거운 짐을 나르는 데 지쳐버린 과민한 에리크는 “병적으로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 되었고 잇따른 오년간 그의 건강에 계속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카린도 반향을 계속해서 느꼈다. 마가레타는 양친은 종종 아버지는 요양원에, 어머니도 역시 이처럼 동시에 아주 오랫동안 집에 없었으며 그시간의 정신신경적 파란은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1966년 모친이 죽은 후 옷이 든 서랍에서 발견된 일기에서 성직자의 아내 역할을 연기하려 분투하며 비통에 잠긴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 고통스러운 고백을 읽으면서 잉마르는 “ 어떻게 어머니는 그녀의, 기진맥진, 자포자기, 지루함, 절망을 숨기고 인내했는지” 놀라워했다 “… 그녀는 매일 매일 간결하게, 약호와 현미경 같은 예증으로 신비롭게 가장 위대한 비밀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것보다 이른 시기의 다른 일기에서 그녀는 한층 더 허심탄회하게 그녀의 가장 내밀한, 죄의식에 얽매인 감정을 이야기하는 비밀노트를 몇 년간 써내려갔다.”
카린과 볼린간의 로맨스가 불거지기 바로 직전에 가족의 환경에 주요한 변화가 생겼다. 여왕이 에리크 베리만이 집전하던 예배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소피아헤멧 신부에 임명할 것을 건의했다. 이 사설 병원은 18세기 지어지던 시기부터 왕실 부속으로 유지되던 것으로 임명자는 나중에 주교로 승진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획기적으로 금방 나아진 점은, 스톡홀름의 근무처에는 처음으로 그들의 사제관이 제공된다는 것이다. 시내 중심에서 아주 잠깐만 걸으면 되는 거리에 있었으나, 그당시에는 가장 먼 가장자리여서, 집에는 넓직하고 편리한 농장형 부엌과 어마어마한 거실 난로도 있었고 병원 공원 내에 자리잡아서 거의 시골 같았으며 바로 옆에 작은 얀의 숲도 끼고 있었다.
그러나 소피아헤멧에서 보낸 10년간에대한 잉마르의 기억은 목가적인 주위환경보다 뼈아픈 외로움, 다른 소년들과 두드러지게 다르다는 느낌, 가족에게 부여된 아버지 집무실 의례에대한 행복하지못한 순종,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두려움에대한 인식에 더 영향을 받았다. 소피아헤멧은 어린아이의 상상력에 광범위하게 공포의 원인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이었다. 건물 중에 하나엔 매장지로 가기 전의 시체를 보관하던 곳이었고, 병원의 지하실에서 소년은 수술에서 모아온 팔, 다리, 장기가 든 상자들이 소각로 속에 타오르는 석탄 위로 던져지는 것을 보았다. 이런 광경은 그러나 병적으로 매혹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두려움은 대신 사제관에 집중된 것이었다. 그곳의 어둠은 그의 불안감과 죄의식에대한 극장으로 바뀌었다
육아실은 평범한 검정 블라인드가 있었는데, 블라인드를 치면, 모든 게 살아 있는 거 같아 무서웠다. 장남감은 변형되거나 비우호적으로 변하거나 아니 알아보기도 힘들어졌다. 그곳은 어머니가 없는 다른 세상, 소리도 없이, 고립되고, 외로운 세상이었다. 그 블라인드가 움직인다거나 장난감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해도 거기엔 형상이 있었다. 특별한 형태의 소인이나, 동물, 혹은 머리 혹은 얼굴이 아니라 지칭할 단어도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희미한 어둠속에서, 그들은 커튼 뒤에서 살금살금 기어나와 푸른 전등갓으로, 마실 물이 놓인 탁자로 움직였다. 그들은 상당히 무자비하였다. 그들은 냉혹하였으며 힘이 쎘다. 정말로 깜깜해지거나 아주 환하거나 잠들지 않으면 사라지지도 않았다.
위층 복도에 있는 장롱은 훨씬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의 말을 빌면, 그의 집에 왔던 십대 소녀가 그에게 그곳에는 날카로운 이를 가진 작은 난장이가 숨어 있는데 잘못을 한 어린이의 발을 물어뜯는다고 말했단다. 잉마르는 그 말 그대로 믿었다. “무언가 용서를 빌거나 아무 잘못을 기꺼이 고백하게 만드는 것 중 다락방으로 난 계단 옆의 어두운 장롱 안에 몇시간 동안 갇혀 있는 거보다 더한 것은 없었다.”
이 고문실에 관한 언급은 그의 영화와 인터뷰에서 나오고 또 나온다. 개인적 신화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가 줄곧 틀리지도않고 기술하는 그 징벌의 과정은 아버지가 거짓말이라고 부르는 죄를 들켰다는 당황스러움, 장롱에 투옥된 동안에 겪는 말할 수 없는 놀람, `아버지가 집행하는 매질로 인한 육체적 고통 그리고나서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라고 지시를 받은 다음, 어머니가 입맞춤으로 응대하였다는 기쁨으로 묘사된다. 그가 우기는 대로 그가 고통받았던 처우가 정확하게 의례적인 규칙성을 띠고 이루어졌는 지는 의문이다. 그의 네살 많은 형 다그는 자주 아버지의 화를 샀다. ( 비록 마가레타는 그가 스웨덴 텔레비전에서 형이 아주 심하게 아버지에게 맞아서 어머니가 고통을 덜고 부은 것을 가라앉히려고 채찍자리를 담궜다는 기억은 없다고 하지만) 재능은 있지만 공부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고 부모 사이에서 분쟁을 불러 일으키던 다그는 한번은 가능한 가장 낮은 성적을 가지고 집에 왔다. 당연하게 아버지는 격분을 하였다. 그 시대의 스웨덴에서 학교 성적이란 아이의 장래가 달린 운명결정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카린은 다른 아이들보다 다그를 좋아했다. (그점에 관해 잉마르는 그녀를 결코 완전히 용서하지 않았다.) 에리크는 아내에대해 느끼던 노여움을 그녀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전이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다그가 그의 처벌을 금욕적으로 참아내었다는 사실은 더욱더 아버지를 성나게 하였다. 그러나 잉마르는 완전히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마가레타에의하면, 그는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대드는 것은 피하였으며 곧 아버지의 격노를 누그러뜨릴 기술을 개발했다고한다. 1941년 딸을 위해 쓴 비망록을 보면, 에리크는 두번째 아들이 그를 얼마나 놀래키는지 기록하고 있다.
잉마르는 성격이 좋고 활기차고 친근한 아이였다. 그에게 정말 엄격하게 대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였다. …..너희들 다른 누구도 잉마르처럼 우리에게 비탄과 걱정을 끼친 아이는 없다. 그는 쉽게 이끌린다. 내가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 나는 그의 난폭한 기질과 불안정한 성질에 대한 많은 우울한 경험 때문에 나의 기분이 쳐진다. 한순간은 무서울 정도로 앙칼지고 무정하지만, 다음 순간, 온순하고 감성적이며, 무기력한 작은 아이가 된다. 나는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이 아이를 오로지 신의 손에 맡길 뿐이다. 나자신은 그의 행실에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것 말고는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다.
마가레타는 꽤 확실하게 잉마르의 전설적인 옷장 수감은 오직 한번 밖에 없었으며 때리는 것은 수반되지 않았고 그를 가둔 것은 그들의 할머니-그의 아버지가 아니라-였다고 한다. 에리크는 정답고, 예민한 영혼이었으며, “실제 연약하달까, 뭐라해도 쉽게 놀라는 사람”으로 그런 신경과민증으로 쉽사리 도발되곤 하였다. 그 시기의 대부분의 스웨덴 아버지들처럼 그도 신체적 징벌을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면, “그는 아주 분명히 공황상태에 빠져 독재자는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악명높은 옷장 사건은 완전히 가공의 이야기라고해도, 디킨슨스러운 공포는 그의 어린시절에관한 정신학적인 “사실”을 표현한다. 베리만은 “은쟁반위에 사는”(그의 어미나가 자주 사용했던 구절)것과 사제의 아들이라는 공식적인 존재와 비교하곤 했다.
(우리는) 고통스런 검열과 끊임없이 상반되는 조언을 받아야 했다…. 형과 여동생과 나는 결코 적절한 사제의 아이들이 되지 못했고 우리의 양육은 (우리 부모의) 신경질적인 절망으로 포위당했고, 그건 우리가 훌륭한 시민이 될 것이며, 그들 모임이나. 친구 무리들이 보기에 자랑거리가 되기를 바라는 헛된 희망이 사그라든다 데에 기인하였다. 사람들이 무어라 말할지에 대한 부모님의 공포는 그들의 의지와 힘과 완전히 동격이었다. 완전히 그들의 권위를 세우는 미치광이같은 필요의 노예로, 그들이 생각하기에 아이들에게 최선이 무엇인지 같은 가련한 동기로, 그들은 (확신컨대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하나 하나 계속해서 우리에게 비난을 가했다. 징벌의 위협은 모든 일에 놓여 있었고, 징벌은 가차없이 정확하게 주어졌다.
처벌보다 더 나쁜 것은 벌을 과하고 아이가 잘못을 빌 때까지 침묵이 뒤따르는 감정의 분리였다. 베리만이 부모님이 무의식적으로 정신적 피해를 야기했다는 것을 가끔은 용서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도 자비로운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1970년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스웨덴 텔레비전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 부모님은 자식의 삶을 망가뜨리는 데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런 공개적인 발언과 그의 영화에 반영된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모습은 가족 구성원뿐만아니라 그의 기억과는 상당히 다르게 그들을 기억하던 가까운 친구들까지도 충격을 받았고 또 분노하였다. 같은 인터뷰에서 베리만은 그의 부모님은 그가 계속 밤오줌을 가리지 못하자 이걸 고치려고 그런 다음날이면 그에게 창피의 상징으로 빨간 웃옷을 입게 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마가레타는 이 에피소드에대해 “지극히 회의적인”인 표정을 지으며 그랬다면 약간 미치거나 완전히 가학적이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왜 베리만은 이런 상상적인 사건을 퍼뜨리고 그리고 그의 영화에 그런 것을 암시하는 걸까. 분명 이런 허구가 그의 심리에서 발효된 악몽을 확증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베리만의 첫번째 아내, 엘세 피셰르는 어린아이일때부터 그는 그가 말한 거짓말을 확신하는 경향을 길러왔다는 이론을 내세워 “잉마르는 여전히 이야기를 꾸며내고 그 자신의 진실을 믿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 의견의 증거로, 그녀는 그의 아주 어린 시절 놀이동무의 “잉마르는 결코 거짓말과 진실, 환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했다”는 말을 인용하였다.
마가레타는 특히 오빠가 아버지를 혹독한 권위주의자의 초상으로 그리는 것에 불편해했다.
내가 보기에 가끔 잉마르 오빠는 리어왕의 딸들이 리어에게 했던 행동들처럼 소급하여 상상하여 처신하는 것 같다. 그가 이제껏 한 모든 행동은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부정”이다. 우리에게 끼친 모든 어머니의 힘이 아버지에게로, 실제로는 약하고 어떤 면으로는 쉽게 두려움에 빠지는 아버지에게로 “전위”된 것이다.
잉마르는 아버지가 편애하던 아들이었으며 그의 눈에는 무엇이든지 용서가 가능해 보였다….그는 처벌이라는 문제가 인다면 천재적으로 비껴갔다. 그는 매혹적이고 애교가 많았지만 비록 그의 놀이동무였지만, 가끔 나를 격분시키는 정도까지 가기도했고 아마 다그도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에게 희생자라는 관념은 없었다. 우리 세 명 모두 시달리던 만성적인 긴장과 불안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여름에는 그런 긴장들이 완화되었다. 그 계층의 다른 스웨덴 가정과 마찬가지로 베리만가도 도시로 떠나, 카린의 아버지가 지은 달라나의 집으로 갔다. (역사적이며 풍광이 좋은 곳이며 그 지역의 지세는 뉴잉글랜드와 닮았다고 할 수 있고 주민은 독립적이며 민주적인 기질이 있다. 최근까지, 스웨덴에서 유일하게 회화체에서 you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였으며그곳의 토박이들은 왕도 du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 삼는다.) 잉마르는 그 곳을 사랑했다. 스톡홀름은 겨울, 압제. 교실의 지배, 급우들과의 쉽지않은 교제, 종교에의해 지배되는 곳을 암시하는 반면, 달라나는 사회적 감시로부터의 자유, 북쪽 지방 여름의 거의 지지 않는 긴 낮, 다양한 자연, 어머니같은 라레스(가정의 수호신)을 의미했다. 놀랍지도않게 잉마르는 그 지방을 정신적인 집으로 간주했다.
안나 오케르블롬이 머물며 지내던 다른 집은 상대적으로보면 거기서 거의 시간을 보내지 않은 거지만 그에게 훨씬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 집은 웁살라에 있는 방 열네개짜리 플랫식 공동주택으로 이야기책 같은 주위환경 한가운데 있었다. 한 블록 떨어져, 잔디가 있는 언덕으로 16세기 성곽이 있었는데 측보에는 대포가 있고,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역사적인 구닐라 종이 있었다. 북쪽을 몇 백 걸음을 가면, 웁살라 성당의 쌍둥이 첨탑이 구도시와 북유럽 초창기 대학의 하나인 대학가와 연결된 비툴비툴한 길 위로 솟아 있었다. 다른 방향으로 더 가까이 백조 연못이 놓여있고 한쪽은 화려한 19세기 여관인 플루스트렛과 맞닿아 있었다. `성당과 플루스트렛 사이에는 피리스 강이 `웁살라의 켜켜이 쌓인 과거의 유물들 사이로 흘렀다. 순교한 성 에리크의 우물 위에 지어진 양수기, 중세 학생 감옥, 옛날 학원의 물레방아 등. 과거가 소년의 환상의 재료를 제공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면, 스웨덴 아주 초창기의 영화 극장 중의 하나가 모퉁이를 돌면 있었다. 그중 뭐니뭐니해도 매력적인 건 할머니 오케르블롬이었는데 그녀는 단단하게 동그랗게 말아올린 머리에, 빳빳하게 풀먹인 하얀 옷깃에, 전통적인 검정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 플랫은 그녀와 남편이 달라나에 이사해 들어오던 1890년 그 시간에 그대로 얼어붙은 듯 보였다.
여자아이들은 거의 좋아하지 않고 여성들의 사회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안나 오케르블롬은 잉마르에게 특별히 애정을 쏟았다. 그래서 그는 매혹적인 주위환경에 놓인 젊은 왕자가 된양 하였다.
그곳은 온갖 종류의 기이한 물건들이 있었다. 얼음상자, 장작 넣는 통, 색깔 든 유리 판넬이 끼워진 부엌 문, 항상 삐걱거리고, 씨근거리고, 갈라진 다락방으로 난 디딤대 같은 것들 말이다. 착칵거리는 시계들, 굴절된 광선을 드리우는 샹들리에 수정유리, 자그마한 민중들이 살았던 생활 깊이 마르지않는 이야기를 지닌 엄청난 량의 도자기 벽장이 있었다. 통 박달나무의 냄새와 새로 구운 빵과 할머니의 장미수, 금방 문지른 바닥 냄새가 있었다. 거기서는 큰 안전감이 들었다. 할머니는 손님을 정찬실의 오토만에 재웠는데, 밤중에 거리의 가스등이 비춰 들어오면, 천장에, 배를 숲이, 혹은 움직이는 낯선 초목을 그렸다. 벽지의 무늬 속에서 역시 얼굴들이 있었는데, 집과는 달리 할머니의 집에서는 결코 위험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온화한 마법을 부려 놓은 것 같았다. 한번은 비너스의 설화석화 복제품이 살아있다고 상상하였다. 혹은 성당 종이 울리 거나 근처 플랫에서 피아노로 왈츠를 연주를 하는 그런 때는 베니스 그림 위에 춤추는 햇살이 소리로 바뀌었다고, 그림의 인물들이 몸을 움직이고 대화를 하거나 운하가 흐르고, 산 마르코 광장의 비둘기가 날아오른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베리만의 저작에서 종종 꿈같이 근심없는 달라나의 여름과 웁살라 피난처에서 발행된 환상을 언급하긴했지만, 소년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일시적 집행유예라해도, 그의 상상력의 본질적인 실마리는 사제관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심리학적 드라마에 있다. 그 작은 배역들을 가지고 어머니는 몇 가지 역을 연기하였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역은 아들이 한없이 숭배하는 애인이라는 역할이었다.
어린이었을때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였다. 나는 어머니가 아름다우며, 탐나도록 매력적이지만 얻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녀의 친절을 사기 위해 거의 모든 일을 했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린 소년은 사회에서 강하고, 용감한 남자로 주형되어야 한다고 적힌 관습 하에 자라신 분이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겁 많고 회피적이며, 거짓말하는 버릇이 있고, 산만하고, 전반적으로 사랑에 목마른 아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인형을 가지고 놀고 싶었다. 다른 소년들이 무서웠다. 나는 소란스런 곳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화하는 곳에 있기를 원했다. 나는 보듬어 주고 어루만져 주기를 원했다. 어머니가 계집아이처럼 굴지 말라고 엄하게 꾸짖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왜 그러면 안되는 지 결코 이해하지를 못했다. 왜냐면 실제 그게 훨씬 즐거웠기 때문이다. 분명 어머니는 대단히 다정다감의 재능을 가졌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엄격한 양육과 일생동안 견딜 수 없는 결혼 생활이 그런 재능을 방해했다. 어머니는 그녀의 두 아들에게 다소 거칠게 대하게 되었다. 그녀의 따뜻함은 순식간에, 갑자기, 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이 나타나기도 했으며. 그러고나면 나는 그것으로 가득 차서, 눈이 멀고, 멍해져 있었다. 또다시 재빠르게 따뜻함의 섬광은 얼음으로 바뀌었다. 그러면 완전히 닫히게 된다.
한번은 그가 여섯살 때 그녀의 어머니가 여행 준비를 하고 있는 데, 그가 떼를 썼다. 그런 격발은 자주 있었지만 어머니의 굳건한 결의로 아무 소용없었다. 베리만이 기억하길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아픈척 해보자라는 꾀를 내었는데 기쁘게도 그녀의 의지가 꺽였다한다. “나는 어머니 무릎에 앉혀졌다. 그건 드문 호의였다. 나는 어머니가 긴 짙은 갈색의 머리를 빗을 때 함께 있어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나를 포옹을 하고 걱정스런 눈으로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그것은 나의 비밀스런 즐거움이었다-나는 오늘날까지도 그걸 기억한다”
의심할 바 없이 그녀의 영향력은 아들의 문학적, 예술적 관심이 발달하는 데 어느 누구보다도 지대했다. 그가 아픈 동안 육아실에서 이야기를 들려 주거나, 난롯가 일요일 가족유흥회에서 지휘할 때 그녀는 자카리아스 토펠리우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셀마 라거뢰프 같은 작가의 작품을 크게 읽어, 그의 환상을 부추겼고, 아버지를 경쟁의 모델로 바꾸어 놓았다. 그를 그의 경력으로 이끈 것 뿐만 아니라. 그녀 역시 광범위하게 그의 예술의 내용과 뜻의 상징에 영향을 주었다. 그가 상상하는 세계의 여성은 마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반복하자면, 어머니와 애첩의 두 가지 역할을 끌어안고 선 여성은 환상을 통해 불행한 현실에서의 도피를 제공한다.
마가레타는 어머니를 이따금 아버지보다 훨씬 더 무서운 지배적인 부모라고 기억한다. 그러나 잉마르의 상상에서 카린 베리만은 기쁨과 자비라는 덕목과 연결되어 있으며 아버지는 반면 정의와 처벌-에리크 베리만의 성직 때문에 훨씬 더 강렬하게 관련된-로 상징된다. 사제관이라는 곤혹스런 한계 밖에서는, 그러나 즐거운 친밀함의 순간이 있었다. 베리만이 기억하는 가장 달콤한 기억 중에는 목사와 웁란드에 있는 시골 교회까지 자전거로 여행하며 보낸 시간이 있다. “아버지는 내게 꽃, 식물과 새들의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를 뒤흔드는 외부적인 강요에 방해 받지 않고 단란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친밀한 감정은 아버지가 예배의식을 집전하는 시간이 되면 빠져나가 버렸다는 것도 기억한다. 잉마르 자신은 가족석 의자에 배치되거나, 2층 노대를 어슬렁 거리며, 종종 그런 교회에 전형적으로 그려진 중세말기의 벽화를 유심히 바라보는 동안, 제단 앞에, 설교단 안에 있는 남자는 낯선 사람이 되었다. 집회에 열중하여, 머나먼 신에 관해 다른 언어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 어린아이의 생각에 아버지는 신의 대리인처럼 거대해 보였다. 그리고 나서 차츰 신은 아버지의 연장 그리고 갈망과 분개 양쪽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영화처럼, 그리스도가 하늘의 아버지에게 십자가형에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을 때처럼. 그러나 베리만이 자신을 버림받은 예수로 여겼다면, 그는 역시 그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는 예수에게, 자신에게 향해야한다고 느끼는 사랑이 성직의 사랑으로 아낌없이 주는 사람에게 적의도 품었다. (이에관하여, 성체배령자에서 도마가 “완전히 사적이고, 아버지 같은 신”에게 관심받고자 하는 라이벌로 “예수를 질투어린 증오”를 보이는 것은 베리만의 개인전인 고백처럼 다시 들린다.) 에리크 베리만은 아들 견진성사의 준비를 떠맡았을 때 이 양면가치의 충돌은 잉마르의 첫번째 신앙위기를 야기한다.
소년의 예수의 선망 아래 놓인 관심과 확신의 요구 역시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계속해서 그의 유약함과 부적당을 상기하고, 는 그의 힘과 가치를 확신할 방법을 찾아 다녔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과시하고자 했던 욕구를 기억한다. 능숙하게 그림 그리는 것, `벽에서 공을 되튀어 받아내는 기술, 수영을 배워 최초로 팔젓는 것을 자랑하였다. 나는 내가 이러한 표시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른들이 알아채도록 하고자 한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음을 기억한다. 나는 결코 내 친구들에게 충분한 관심을 얻지 못했다. 그러므로, 현실이 더 이상 만족스럽지 못하면, 나는 공상을 하기 시작했고, 나의 숨겨진 위업이라는 전례없는 이야기로 내 또래의 아이들을 즐겁게했다. 이것은 곤란한 거짓말이었다. 곧 어쩔 도리없이 내 주위를 둘러싼 이들의 냉정한 회의론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그 무리에서 물러나와 나 자신의 공상을 나자신만 간직했다. 인간적인 접촉을 바라고 또한 환상에 휩싸인 아이는 아주 쉽게 상처받고 은밀하고, 의심스러운 몽상가로 바뀌었다.22
베리만이 이 백일몽을 예술로 바꾸는 중요한 첫발은 원시적인 연극 실험이었다. 어린이 방의 탁자를 거꾸로 세우고 천으로 늘어뜨려 무대로 바꾸었으며 인형과 마분지에서 잘라낸 인물들로 배우를 삼았다. 그 극장은 마가레타와 그녀의 친구 릴리안 아그렌이 시작을 하였지만 그러나 잉마르에게 그 게임을 알려주자, 그것에 그는 절대적인 관심을 쏟았다. 12살이 되어서 그는 드라마텐 (왕립 드라마 극장)에서 알프 쇠베리가 연출한 아동용 내용의 연극을 처음으로 보았다. 얄궂게도 쇠베리는 13년 후 그가 처음으로 쓴 각본으로 영화를 찍는다. 완전히 압도되어 그는 그런 경험의 경이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였던 마가레타와 함께 그는 꼼꼼하게 계획된 연출을 개발했고, 축음기 음악으로 완벽도 기했다. 해가 점차 가자, 그 극장은 점차 더 정교해졌으며 그것의 상연목록은 스트린드베리와 메서링크 혹은 다른 이의 드라마까지 포함되어 복잡해졌다. 취미를 넘어 드라마에 휩쓸려 들어 이제 도제의 양상을 띠었다.
상상력의 장으로 펼쳐지는 미니어처 극장의 가장 치열한 경쟁자는 영화에서 나왔다. 여섯살 때 블랙 뷰티를 보게 되었는데, 불나는 장면에 충격을 받고 열까지 났었다. 그러나 그 같은 환영에 대한 감수성 때문에 영상 위의 이야기가 역시 유별나게 사람을 끌어들였다. 곧 그는 형을 따라 토요일 오후에 어린이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자연 영화를 보러 다녔고, 웁살라 방문 때는 슬롯츠 비오의 상영실에 몰래 숨어들어 갔다. 십대 초반이 되자 베리만은 좀더 흥미진진한 상영작으로 옮아간다. 30년대 초반의 공포 영화는 서투르고 그나마도 스웨덴에서 심하게 검열에 걸렸지만, 프랑켄슈타인, 미이라, 혹은 그들의 보기흉한 동족을 그린 다른 영화들은 이미 악마를 보고도 남을 아이의 마음에 강하게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펼쳐보인 장면들 때문에 잠도 못들고 밤새 그를 쫓아오지만, 그러나 그 괴물들이 후속작으로, 혹은 유사물로 돌아오면, 그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진격해 들어갔다는 그의 증언은 허튼 말이 아니리라 믿을 수 있다. 어린아이 정신에 가해지는 두려움의 대리물에서 아이들은 일상생활의 표면적인 사실보다 좀더 “실재”를 느꼈다. ( 60년대 말, 스웨덴 영화 기구에서 시리즈로 몇몇 감독에게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영향을 준 영화를 물었을 때. 베리만은 프랑켄슈타인을 골랐다.)
1927년에 받았다는 환등기(lanterna magica)는 영화관의 자극에 비하면 하등의 대체물이긴 하지만, 그건 손닿는 데 있고 무엇 보다도 그의 제어 하에 있다는 두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사제관 문안에 문제를 안고 있는 교구민과 가족 양 쪽 면의 실생활에서 아무 힘도 없는 증인으로서 베리만은 그런 장면을 조작할 수 있는 힘을 구체화할 특별한 필요를 느꼈다고 한다. 이 “작은 양철 상자”는 그의 마술 조수 역할을 하였다. “빨간 두건 소녀”의 이야기를 하는 판유리에서 그는 늑대란 “뿔은 없지만 꼬리는 달린, 붉은 턱을 크게 벌린 악마”라는 형이상학적인 상징을 추론했다. 악마란 호기심에서 만져볼수 있지만 그러나 이해할수 없으며 악을 대별하며, 꽃으로 덮힌 아이들 방 벽지 위의 유혹자였다.
일년이 안되어 환등기의 경이는 다그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친척에게서 선물로 받은 영화 프르젝터의 광휘 앞에서 시들해졌다. 잉마르는 프로젝터가 잘못되어 형에게 선물로 간 거라 느끼고 그 문제를 바로 잡으려는 교환품으로 거의 모든 그의 양철 병사를 희생하였다. 그가 얻은 첫 필름-한 여자가 들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펴고 화면의 오른 쪽 귀퉁이로 사라지는 삼 미터 짜리 세피아색 필름에 무아지경으로 매혹되어 그걸 틀고 또 틀어 보는 바람에 고치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가정 영화 극장은 곧바로 인형 극장 때처럼 열중하였다. 좀 더 큰 기계장치들이 조악한 장비 대신 들어오자, 그는 동전을 조르고, 용돈을 모았다가 웁살라의 쿵스가탄에서 필름을 팔던 늙은 유대인 상점의 계산대에 저금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잉마르는 단지 이런 단순한 영화만 상영하지 않았으며,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의 첫 “영화”는 그와 릴리안 오그렌의 오빠 롤프가 서로 치고받는 스냅사진으로 이루어졌다. (롤프 오그렌은 그의 소유물로 아직 지니고 있다.) 나중에 그는 셀룰로이드는 이어 붙일 수 있다는 걸 발견하였다. 관람에 싫증난 한 무더기 릴을 모아다가, 필름줄을 여러 조각으로 싹둑 잘라, 화면을 재배열하여 붙여 그만의 이야기를 창조하였다. 또다른 편법으로 노출된 필름을 소다수에 담가 유액을 제거하고는 프레임에 바로 먹으로 그림을 그려 조잡한 만화영화도 만들었다.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가공의 꾸밈에 빠진다. 그리고 많은 기구들로 그것을 표현할 독창적인 도구로 삼는다. 그의 환상을 자아내던 베리만 집안 가정환경의 심리적인 압박 역시 상당히 평범한 것이다. 베리만의 가장이 별난 이유는 그것을 추구한 그의 강도와 바깥 세상으로 자신을 현실에 맞추어 제방향을 찾는 청소년기를 지나 오래 시간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창작열의 폭발로 두드러졌던 그의 이십대를 회상하며 그는 그 시기를 “막혀있던 어린이의 허기” 덕분이라고 말했다. 비평가들이 종종 그의 초창기 극본들은 사춘기 성숙과정 같다는 비난을 단다고 격분을 하기는 하지만, 그도 가끔 그 극본들은 뒤늦어진 성숙이 행동화하는 도구였다고 인정은 하였다.
열여섯이 되자, 가족은 멀지않은 외스터마름 구에 있는 최신유행의 아파트형 집으로 옮겨갔다. 아버지는 거기 헤드비그 엘레오노라의 주임사제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그 교회가 왕족과 연결되어 있어서 왕실 교회의 목사 자리가 예약된거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그의 환경은 그러나 그의 고립을 키우기만 했다. 성직자의 집에서 자란다는 것은 문화 환경이 다른 나머지 사회보다 적어도 한 세대는 뒤쳐졌다는 인장이 박히는 것이며, 그가 기묘하다는 것을 그는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밤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못했다, 그는 고전 음악을 사랑했지만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되는 재쯔는 어리둥절하기만 하였다. 다른 소년들은 물 속에서 대담함을 자랑했지만, 그는 잠수가 두려워 뒤로 물러나 있었다. 다른 소년들은 테니스 코트에서 자신의 근육을 드러내 보였지만, 그는 그의 신체 구조를 부끄러워만 하였다. 그는 말도 더듬거렸다(라고 그는 기억을 하지만 마가레타는 오빠가 언어장애를 어려움을 겪은 기억은 없다고 한다.) 그는 여자아이들에게 인상을 주거나 유혹하겠다는 시도에 실패했다고 느꼈고 그는 어떻게 춤추는 지도 몰랐으며, 그의 관심사는 거의 대화를 쉽게 풀어 나갈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최근 몇 년전에 그는 학급 친구와 가진 성의 입문식에 관해 이야기하였는데 그녀는 그만큼 외로운 뚱뚱한 여자아이였는데, 완전히 육체적인 접촉일뿐 로맨스의 후광같은 장식물은 없었다한다. 그러나 그의 남성성의 자신감을 찾게 하고 그를 제정신으로 유지해주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고 말하였다.
실제로는 그는 아마 그가 생각한 만큼 기묘한 것은 거의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의 눈에 그는 미운오리새끼였다. 그 자신 속으로 은거하며, 그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거나, 그의 인형 극장 일을 하거나, 영화 극장의 어둠에 숨거나 오페라 극장 세번째 줄 늘 앉는 자리에 앉아 있기도 하고 손에 넣은 가극 가사로 공연을 따라 해보기도 하였다. 개인적인 갈망이 과하게 로망스적인 식사로 배를 채웠다. 의심할 나위없이 그의 생애에 문학적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스트린드베리에 대한 열망은 점점 커져 갔고, 한편 바그너에 대한 사랑도 지속되었다. 니체를 새로 발견하고, 열심으로 니체로 개종을 추구하였다. 그의 다정한 친구 한 명은 잉마르가 어디에서나 니체의 예언자적 저작을 인용하였으며 분명 “니체의 초인이 되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고자 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전한다.
이런 배경과는 달리 1936년 기독 청년 교환 프로그램과 연계되어 한달간의 긴 독일 여행을 한 데에 대한 의미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도착했을 때 그는 정치적 상황을 알지 못했고, 그가 머물던 사제의 집에 있는 나찌 부속 장신구들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곧 그는 히틀러에게 받은 영감을 열정적으로 드러내었다. 그 마을은 아마도 달라나 농장 지역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몰라도, 스톡홀름과 반대로 기꺼웠다. 그는 히틀러 청년단 중에 친구도 만들었으며 그들 중엔 독일인 집주인의 아들 중 한 명인 하네스도 있었다. 도처에 그의 아이돌 바그너의 음악과 신화에 존재한 것도 그의 흥분에 기여하였으나 그런 것은 강력한 인상을 남기겠다는 목적 하에 이루어진 전국가적 원기와 감각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집단 수용소의 영화를 보거나, 스웨덴 항구 정박지에서 본 참혹한 생존자를 보고나서야 그는 그가 잠깐 얼이 빠졌던 유대인 은행가의 딸이 겪었을 운명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는 짓누르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전쟁이 끝난 후 30년간 그 체류의 기억을 억눌렀다. 그러나 30년대의 그는 나찌의 허세가 가장 감동적인 극장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에서 보낸 여름과 달리 파름그렌스카 학교에서 보낸 김나지움 세월은 숨막힐 듯 지루하였다. 학교의 담임은 베리만을 유쾌하고 능력있는 학생으로 기억하지만 그는 의지를 말려버리는 경쟁, 그의 기질과 맞지 않은 학자연하지만 단순암기식 배움이라고 묘사하였다. 예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학교를 무슨 시설마냥, 체계처럼, 원칙인양 싫어했다.”라고 썼다.
“문제가 있는 소년, 게으르고 (어느정도) 재능은 있고, , 꿈꾸는 보헤미안이 처음에는 학교에 만족하다가, 나중에 씩씩거리고, 스트린드베리 방식에서 안정을 얻고, 온건하게 반항적이고, 증오로 주목을 끌어보려는 덜자란 십대….마음의 평정과 사회적 적응력이 없으며, 패기도 없이, 전형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종류의 염세주의자”에게는 맞지 않은 곳이었다. 그렇긴 해도 그의 부모의 기대치를 만족시키고, 성적도 상위를 기록했다. (그의 유일한 일탈은 그가 좋아하던, 라틴어 시험을 통화 못한 것인데, 그의 부모가 한 사제의 장례식의 참석을 종용하여 감정적으로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베리만이 김나지움 졸업시험 겸 대학 진학을 평가하는 시험에 통과할 때까지, 그는 극장 감독을 천직으로 삼으려고 이미 작정을 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35년 올로프 몰란데르가 연출한 스트린드베리의 꿈의 연극을 보던 날 결정하였다한다. 그 연출은 약 25년 뒤에 베리만이 무대에 올리기까지 교본으로 유지되던 가장 고전적인 해석이었다.) 그러나 그 일에 종사하기 위해서 두가지 의무가 방해가 되었다. 하나는 인생의 삽입장 같은 의무적인 군복무였다. 모든 나라의 군대가 항상 그렇듯 부적절한 기술을 사용하여 군대는 이 젊은이를 정교한 귀를 가졌다며 포병대에 배치했다. 다행스럽게도, 의사가 위장 문제가 있다고 진단하였고 (아마 후년에 그를 괴롭히던 위궤양의 시초일 것이다) 그는 집으로 돌려 보내졌다. 베리만은 자신의 군대시절을 아주 형편없는 병사 역할을 하던 희가극이라고 회상한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그의 군복무가 부모의 지배권 하에서 풀려나고, 그의 육체적 만족감을 주는 수단이 되었다며 완전히 유감스러운 경험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두번째 의무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웁살라 대학을 택할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 그 도시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가 거기서 학위를 땄다는 전례 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옥스포드로서, 가장 명문교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스톡홀름에 등록했다. (그당시는 대학교가 아니라 “고등” 학교 였다.) 이것은 집에서 다닐 수 있다는 경제적인 잇점도 있지만 아마도 교수진 중에 스트린드베리 학자로 유명한 마틴 람이 있다는 것에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이유가 어떻든, 학교는 그의 관심을 오래 끌지는 못했다. 그는 문학 및 예술역사학 학생으로 등록하였지만 그가 세미나에서 스트린드베리의 “하늘의 왕국으로 가는 열쇠” 긴 연출적 분석이 통과되어 가까스로 학위를 받았다. 대학입학한지 일 년이 안되어, 그는 책과 시험에 열중하는 거 보다 배우로 바쁘게 일했다. 아들의 미래를 다르게 계획하고 있던 그의 부모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극장에서의 기반
베리만이 해외에서의 명성은 전적으로 영화때문이긴하지만, 스웨덴 (그리고 요즘에는 독일에서) 그가 연극을 제작하면 적어도 새 영화를 배급하는 것만큼 관심을 받는다. 그 자신은 무엇보다도 연극 극장의 인간이라고 언제나 강조해왔다. 50년대 말, 그를 인터뷰하러 스톡홀름으로 줄지어 몰려들던 외국 언론인에게 “영화는 정부이고, 연극공연은 고귀한 본처이다”라고 말하길 좋아했다. 그당시 국제적으로 놀라움을 주던 유명 영화제작자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의 발언은 좀 괴짜 같은 면이 있어서, 많이 인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시점까지 그의 관심사의 배분치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기술한 것이다. 일 년의 대부분을 무대에서 전념하였다. 영화는 연극 극장이 문을 닫는 주로 여름 동안만 빠져 있었다.
학위가 없는 대학교 학생이 언젠가는 연극공연장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겠다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공교롭게도, 길이 그에게 열렸다. 스톡홀름의 구시가 구역에, 아마추어 연극으로 실험을 해나가던 매스테르 올로프스고르덴 청년 선교단이 있었는데 이미 그 첫 기획에 실패하고. 그 모험을 구제해보려고 그를 초청하였다. 그는 즉시 받아들였다. 그는 살아 있는 배우와는 작업해본 적이 없고, 극단에서 다른 이들보다 나이도 별로 많지 않은 스무 살이었지만, 그의 인형극으로 실제 극장의 리허설을 해본 터였다. 아마 어린 시절 동안 정신적으로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상황을 통제하고자하는 욕구, 엄중한 존중과 활동의 중심에 서겠다는 욕구는 감독이라는 역할에서 쉽게 충족됨을 발견하였다.
대부분의 그의 경력에서 베리만 “악마 같은 감독”이라고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는 그런 별명을 그 시작부터 바로 얻었다. 마음을 찢는 비평과 달래는 말들을 번갈아 가며 분노와 변명 사이에 꼼짝없이 갖힌 배우들을 길들여 갔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만큼 두배로 자신에게 심하게 했다. 고열이 나도 리허설에 나갔고, 모두들 다른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소리질러대는 것에대해서도 그는 모든 실패를 최종적으로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극단은 차츰 모양을 갖춰 갔다.
1938년 늦은 여름 그들의 첫 연극의 공연은 열렬한 대중적 반응을 얻었고, 스톡홀름 신문의 평론가에게서 짧지만 관대한 비평을 얻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관객은 그러나 그의 부모님이었다. 그는 대학공부를 희생하여 그의 시간과 노동을 투자한 것은 정당한 것임을 확신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알려진대로 목사와 그의 아내가 그 저녁을 즐겼다면, 그들의 즐거움은 그건 분명 그들의 아들이 이제 좀 더 학위를 따는데 힘을 쏟을 것이라는 희망에 대한 볼모일 것이다. 물론 그는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다.
아들과 부모 사이의 불화에대해 극장만 문제 삼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보다는 극장은 그들의 가치와 사고방식에서 항상 벌어져 있던 차이의 상징이 되었을 뿐이다. 피할 수 없는 파열은 격심했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다툼은 주먹질로 번졌고, 어머니가 둘을 떼어내어 놓으려하자, 잉마르는 그녀를 손바닥으로 쳤다. 갑자기 그런 행동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는 즉시 그의 소유물을 챙겨 스벤 한슨, 그를 마스터 올로르프스고르덴에 고용한 사람의 집으로 이사 들어 갔다. 완전히 단절되었던 것은 아니었다-부모는 작은 액수나마 그에게 생활비를 계속 보냈고, 한슨을 통해 쪽지는 계속 오고 갔지만-그러나 4년간 만나지도 말을 나누지도 않았다. 분명 그의 어머니로부터의 독립은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관계의 상황이 성숙하는 걸 그의 어머니가 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의지가 강할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자유롭게 잘라내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수월내기가 되었거나 사회적으로 뒤떨어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라며 후에 한슨이 동정적으로 말하였다.
매스테르 올로스프고르덴 극단에서 제작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맥베스였다. 왜냐하면 선교단의 극장을 버리고 고등학교 강당을 빌렸기 때문이다. 독일 군대가 유럽으로 진격하자 스웨덴은 그들의 전통적인 중립성이 존중받을 것이지 초조하게 생각하였다. 그가 보여준 맥베스는 중세의 박물관 작품이 아니라, 시기적절한 우화, “악의 약동”을 드러내는 “반나찌”드라마였다. 그가 얼마나 나찌에 분개했는 지는 사실 여전히 의문이다. 핀란드의 겨울 전쟁이 발발하여, 많은 그 나라의 동포들이 유린당한 나라에서 아이들을 구하고자 핀란드 부모들이 양도한 어린 아이들을 입양했을 때, “어떤 정부가 권력을 지고 있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극장에서 연극을 계속할 수만 있다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리허설 중의 그의 관심은 히틀러의 희생자도 아니고 독일 전쟁 기계의 스웨덴 공모도 아니라, 전쟁의 공포가 공연에 미칠지도 모르는 영향에 쏠렸다. 첫공연날 밤 바로 직전에, 침략의 소문이 돌아 극단 내 징집적령자들의 소집명령이 떨어지자, 그는 한슨더러 부대장과 접촉하여 히틀러가 “자신의 프리미어를 망치지 않도록” 출발을 조정해 달라고 했다. 사실, 정치적인 게 아니라 실무적인 동기로 그 프로그램을 좌우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익스피어의 비극이 잘 제작되면 극단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망도 높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맥베스를 가장 잘 다룰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도, 역시, 그가 연극에대한 논평에서 비친 것처럼, 어떻게 “강력한 독재자가 산산조각나는지” 그리고 “부당한 권력의 점유가,… 히스테리성의 절망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의 갈망 그리고 종국의 피비린내나는 화해”의 심리적 복잡성을 이 이야기로 보여 주고자 한 개인적인 이유였는 지도 모른다. 베리만은 직접 던칸의 역할로 출연했다.
맥베스의 성공은 손꼽히는 스톡홀름 일간지에서 젊은 감독의 상상력과 정력, 훌륭한 미감을 칭찬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에서 가장 훌륭한 아마추어 극단이라고 단언하는 논평으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 신간비평으로 그의 가슴도 부풀어 올라 베리만은 이제 옥죄는 마스터 올로프고르덴과의 제휴할 극단을 찾기 시작하였다. 한가지 방법은 선교단에서 나와 다시 제자리인 대학으로 돌아가는-좀 더 정확히는 그 세계의 위성 중 하나로 가는 것이다. 40-tal (40년대)라는 떠오른 문학세대의 주요 잡지의 편집자가 베리만의 맥베스에 감명을 받고 `그를 “자음”이라는 학생 지식인들 모임에 초대를 하였다. 이 무리에서 처음으로 스트린드베리의 펠리칸 그 다음 아버지를 학생 극장에서 열릴 작품을 감독할 기회를 얻었다. 그 다음 해 일년 안에 극단의 공연장 역할도 하던 식사 회관이 곧 그의 본루가 된다. 동시에 베리만은 도서관 기관이 스톡홀름 시민 회관에서 그가 감독으로 있는 사고테아테른 극단을 후원하여 어린이 연극을 공연할 수 있도록 설득하여 전문 극장으로도 서서히 진출하였다. 그의 열정은 무대의 경이를 아이들에게 전달하자는 순수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아흔 아홉 석의 극장을 자신의 재량 아래 둔다는 더 원대한 복안도 있었다.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의 동화를 드라마로 각색한 부시통으로 데뷔한 후 바로, 그는 실험적인 레퍼토리의 극단으로 시민 극장을 만들겠다고 공표하였다. 그는 성공의 확신에 차서 (공식적인 인가도 받지 않고) 전문 배우를 모집하였으며 시즌에 대한 일정표도 공지하였고, 이번에도 물론 스트린드베리의 연극 (그녀가 )를 무대에 올렸다. 그는 “ 모든 계층, 연령대, 온갖 종류의 스톡홀름 사람들이” 곧 “극단에 관심을 둔 우리의 가장 훌륭한 작가 두 명이 쓴 두 개의 아주 강력한 새 연극”의 첫공연에 참석할 것이라고 확언까지 했다. 그러나 유령소나타는 관객을 끄는 데 실패하였고, 삼 주 후 한여름밤의 꿈의 요약판도 더 나을 건 없어서 시민 극장은 금새 무너져버렸다.
사고테아테른 극장은 시즌 끝까지 살아 남아서 그러나 다른 방향으로 그의 미래에 영향을 끼쳤다. 1942년 3월, 스물 세살 난 무용수 엘세 피셰르는 한달 간의 코펜하겐에서 고용 일을 끝내고 스톡홀름에 돌아왔다. 새로운 무용을 안무하기 위해서 리허설 장소를 찾으러 그녀는 그녀 집 근처의 학교로 갔다. 그녀가 교장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데 몇 분 후 베리만이 나왔다. 비록 그들은 지난 가을 사고테아테른에서 그녀가 토펠리우스의 파랑새 안무를 맡았을 때 서로 알고는 지냈지만, 지금은 서로 대화를 터기엔 어색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교장이 그녀의 목적에 적합한 방을 찾으러 복도 저리로 걸어 가는 걸 낡은 코듀로이 바지를 걸친 젊은 감독은 서서 지켜 보았다. “갑자기”
나는 내 검은 털겉옷의 등에 잉마르가 커다란 물음표를 쓰는 걸 느꼈다. 그는 혼자서 이렇게 물어 보고 있었나 보았다. 5월에 있을 극장의 마지막 프로그램에 가능하다면 그녀를 쓸 수 있을까? 그 날 저녁 전화를 해서 정확하게 그렇게 나에게 물었던 말이다. 그는 사고테아테른을 위해 판토마임을 창작해 주기를 원했다. 나는 정말 기뻐서 아이디어를 상의하러 한번 들르라고 그에게 청했다. “전 차 한잔은 대접할 수 있어요” 라고 내가 말하자 ‘ 좋아요. 그럼 전 비스킷을 들고 가지요.”라고 그가 대답했다.
라고 그녀는 기억한다. 베리만은 엘세가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 란디가 십대였을 때 안방극장을 위해 연극을 고안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자 정말 동족의 영혼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 연극을 결코 글로 쓴 적은 없었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그 중 특히 아름다운 줄타는 아가씨 (자매는 바닥에 놓인 줄을 깡총거리는 춤으로 묘사하였다.)와 그녀를 사랑하는 광대, 보프벤(즉 비열한)이란 이름의 악한의 이야기가 판토마임의 아주 훌륭한 기초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녀에게 갑자기 떠올랐다. 베리만도 동의하였으며 그녀는 단순한 “서커스 발레리나”를 네 장으로 이루어진 광대 벱포: 혹은 납치된 카모밀라로 가공해 나갔다.
우리의 (원래) 연극에서, 악당은 광대를 납치하였다. 나는 그 착상을 바꾸어 주연을 광대에게 주는 것이 훨씬 극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비록 어리석을 망정, 카모밀라를 아주 사랑해서 납치된 무용수를 구해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보프벤씨에게 마술로 그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여 다른 상황에서 다른 종류의 안무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첫 장은 서커스 안에서 이루어진다. 두번째 장은 보프벤은 장난감 가게를 가지고 있어서 카모밀라는 그의 가장 정교한 인형이다. 세번째 장은 동양의 파샤의 궁전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네번째 장은 보프벤이 윈터 스트리트* 53번지에 있는 별들 사이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벱포는 보프벤과 무시무시한 싸움에서 이겨 함께 사랑하는 고향인 서커스로 돌아온다. 선량하며 위험한 일을 하지 않고 전통적인 마술사로 서커스에 종사하겠다고 맹세한 보프벤을 사로잡은 채로.
바로 성공하여 판토마임은 한달 간 마띠네(낮공연)로 상연하였다. 코믹 솔로 공연을 전문으로 했던 엘세는 (어떤 평론가는 후에 그녀를 “스웨덴의 유일한 여자 광대”라고 하였다) 벱포의 역할로 춤을 추었고 , 베리만은 몇분마다 78회전 레코드를 갈아 가며 축음기 옆에 앉아 있었다.
엘세는 직업적인 존경과 개인적인 호의가 급속하게 사랑으로 무르익었다. 그러나 베리만은 구녀를 오로지 신뢰가는 동지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도 그녀와 같은 마음이 되어 가기 시작하였다는 걸 그녀는 몰랐다. 그녀는 또한 그가 쇠데르말름 아파트를 일년 전 “자음”을 통해 만난 여자와 같이 쓰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었으며 모험에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스페인 내전에 병사들과 야영한 것으로 유명한 여자였다 프랑스의 종교적인 풍조의 벽 안에서 살았지만, 나중에 그녀의 짧은 삶 중엔 시실리 마피아 단원의 정부가 된 여자, 그녀는 부르주아 태생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이 젊은이를 매혹시킨 카린 란드뷔였다. 그녀 역시 그의 자신감을 높이고 그가 크게 출세하겠다는 믿음을 북돋아줌으로 그의 깊은 욕구를 들어주었다. 사고테아테른의 생존은 그와 거의 비등할 정도인 그녀의 활동력 덕분이었다. 연기를 하는 것 외에도(그녀는 부시통에서 마녀의 역할을 하였다.) 선전을 책임지고 있었고 무리들 사이에서 모험에 흥미를 보이도록 도발하기도 하고, 행정상의 허드렛일을 관리하였다. (얄궂게도, 엘세 피셰르를 파랑새에 기용한 것도 그녀였다.)
그러나 1942년 봄이 되자, 베리만은 그들의 어울림에 점차 신경질적으로 바뀌었다. 벱포의 리허설을 하는 동안, 그는 그의 공동작업자 엘세에게 랑비와 일하는 것이 점차 힘들다고 이야기를 했다. “아, 그러면, 그녀를 파면하지 그래요?”라고 그녀가 말하자, “그럴 수 없어요. 그녀는 극장에 긴요한 사람이에요”라고 그가 대답했다. 사실, 그 문제는 극장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고 그녀가 그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 극장에 “긴요한 인물”이라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였다. 얼굴없는 여인의 룻 쾰러 같이 카린 란드뷔를 묘사하는 나중의 그의 저작 중에서, “그의 동정심과 혐오감을 일으키는 방탕하고, 가학적인 존재”, 현실 세계의 “퓨마”의 대응물이라고 부르곤 하였으며, 사적으로는 그녀를 색정광이라고 헐뜯었다. 이런 중상에는 무언가 다른 사단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녀가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행동을 보인 거 외에도 정신적인 병으로 입원하였다는 보고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특성이 그렇게 비난할 만한 거였다면 왜 베리만은 그렇게 되도록까지 ㅏ. 오랫동안 그들의 관계를 유지하게 놔두었을까? 그리고 관계가 끝난 지 수년이 지난 이후에 왜 얼굴없는 여인에서 공적인 축귀 굿과 마찬가지인 일을 해야만 하겠다고 느낀 걸까?
그의 작품에 잠겨있는 –특히 늑대의 시간에서- 증거는 애초에 카린 란드뷔에게 끌렸던 매력이 그녀를 비방하는 원인도 되었다고 암시한다. 그녀 속에서 그가 본 지옥의 피조물은 그 자신의 성적 죄의식을 반영하고 그 자신이 저주 받은 영혼이라는 자각을 뒷받침하는 데 일조 하였다. 자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육욕의 탐닉은 비뚤어진 안도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심리적 고통을 야기한 죄의식을 없애지는 못했다. 엘세 피셰르가 그의 인생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바로 정신적 재생의 가망성 그 자체였다. 그녀가 보이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상상력에 이르기 위해, 그는 다른 여인을 숨겼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반영하는 형편없는 자아의 모습도 거부하여야 했다. 카린 란드뷔를 그래서 호색적인 주문을 걸어 그를 사로잡은 위장한 마녀라고 여겼다.
어쩌면 의미심장하게 베리만은 어머니와 여동생을 벱포의 마지막 공연 중 하나에 초청을 하였고 그들을 엘세에게 소개했다. 아버지는 1929년에 돌아 가셨지만, 노르웨이 공학자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산업 예술 학교에서 직물 디자인 선생인 중산층의 딸이어서, 그녀의 집안 배경이 베리만과 어울린다고 생각되었으며, 그녀의 성격과 재능은 가족의 승인을 얻기에 충분하였다. 비록 엘세에게 그의 사랑을 고백하지는 않았다해도, 그는 이미 결혼을 청할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나 보았다. 벱포의 장기공연이 끝나자마자, 그는 도망치듯 쇠데르말름 아파트를 나와 외스테르말름에 있는 친구가 제공한 방으로 옮겼다. 그 무용수는 이제 그의 사고의 었면 자신은 1942년 5월과 6월부터 자신은 순수한 광대에게 정복당하고 악마적인 본성이 깍여 기꺼이 선한 마법사로 묶일 작정을 한 보프벤으로 여겼던 것 같다고 말할 것이다.
여름이 되자 우울한 통고가 날아들었다. 벱포 공연의 마지막 막이 내리자, 사고테아테른의 종언이 발표되었다. 그 기획은 베리만이 가장 애착을 보이던 것이라서 그는 너무 실망해 다른 시즌을 새로 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스웨덴의 “시민 공원”에 있는 야외 극장에서 그에게 아무도 일을 제안하지 않았다는 것에 그는 더욱 풀이 죽었다-반면 엘세는 민속 뮤지컬 순회 공연의 무용수로 고용되었다. (한번은, 그자신에 낙담하고, 아마 어느 정도는 질투를 섞어 “당신은 직업을 가졌지만, 난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몇 주 동안에 그는 자신의 미래를 고심하면서 엘세의 순회공연지 마다 닿을 만큼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는 한여름날, 그는 결심을 굳힌다. 엘세가 있는 욍괴핑으로 여행을 하면서, 그의 생각을 온통 차지하고 있던 한가지 질문을 하기 위해 용기를 끌어 모았다. “제가 감히 결혼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그제서야 그녀는 그의 애정이 친구와 동료에 대한 따뜻한 감정 이상으로 뻗어나갔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청혼의 어투는 좀 더 불안하였을 수도 있다. 7월 엘세의 순회 공연이 달라나에서 갖게 되자. 그녀는 보롬스에 있던 베리만 집을 방문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장래의 며느리를 기쁘게 받아 들였다. 그리고 그 젊은 한 쌍은 산책을 나갔으며, 엘세가 기억하길, 그들이 초원을 가로지를 때 그가 진지하게 “당신은 분명 천국에 가겠지만, 나는 지옥으로 가는 겁니다.”라고 단언하였다한다. 그 여름 이후 그가 보낸 편지에 비슷한 암시를 담고 있었다. 손글씨는 거의 알아 볼 수 없게 갈겨 썼고 종종 일부러 그의 서명 옆에 작은 악마를 그려 넣었다. 엘세는 “그것은 그렇게 다정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가 장래 남편의 악마적인 면을 보기를 그가 원하는 것 같았다”고 그 의미를 추정해 볼 뿐이었다. 여기에는 무언가 어린애 같은 장난이 들어 있었는 지도 모른다. 소년은 행실이 좋은 착한 소녀의 동정을 얻기 위해서는 그의 끔찍한 면을 과시해야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잉마르와 엘세는 비록 스물 네살 이었지만. 그들의 표면 그리 깊지 않은 곳에 어린이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베리만은 그 존재의 악마적인 힘을 확신하였나 보다. 그녀가 “과감히” 그와 결혼을 한다면 그가 그녀의 행복을 파괴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여름 동안, 그녀는 또한번 놀랐다, 7월의 어느 날 달라나에서 온 익숙한, 그러나 보통보다 두꺼운 베리만의 편지에서 그는 자신은 극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전하고, 그의 첫 노작을 동봉하였다. 그녀에게 평가해달라고 보낸 것은 한스 크리스쳔 안데르센의 이야기 “길동무”를 각색한 드라마였다. 한 젊은이가 자신의 삶을 그림자와 동반하여 여행하는 이야기로 죽음에서 베리만은 나중 후기 저작에서 분명하게는 제 7의 봉인에서 자주나오는가장. 은유를 발견하였다. 엘세에게 그 드라마는 잉마르가 한번도 그들의 토론에서 드러내지 않았던 죽음의 공포를 표현한 것이었다. 다른 극본이 계속 왔고 (그중의 몇몇은 엘세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 기억한다.) 몇 개는 잭 카스퍼슨이라는, 엘세는 그의 페르소나라고 여긴 인물이 주인공이었고, 그가 한참 빠져있던 인형 극장 착상과도 섞여 있었다. 후에 베리만이 그 여름에 완성한 연극 수를 과장하곤 하였지만, 아마 적어도 여덟 개는 되게 썼을 것이다. 모든 게 완전판의 드라마는 아니었고, 이 후 오직 두 개만 무대에 올려졌다. 이래저래보아도, 여전히 막대한 산출이다. 게다가 그는 엘세에게 푸른 학생용 공책(예전 시기에 만든 것을 암시하는)에 적힌 단편도 읽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그것을 좋아해 좀 더 전개시켜 보라고 그를 부추겼다. 2년이 지나고 한 학생과 잔인한 라틴어 선생이 동일한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 이야기는 영화 역사상 위대한 출세자 중의 한 사람으로 튀어오르는 도약대가 될 것이었다.
연극을 쓰는 베리만의 당장의 목적은 가을 시즌 시작을 맞아 학생 극장이 그에게 가을 공연작 중 하나쯤 감독을 맡기게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성과가 있었다. “길동무”가 9월 상연예정작에 올랐다. 실제로 리허설 저녁에 그러나 그는 안데르센에 기초한 드라마는 관두고 며칠 전에 집필한 완전히 창작인 극본으로 대체하였다. 그 시절 끓어오르는 그의 창작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새로운 연극의 도안을 막 마치고 난 후 가진 엘세 피셰르와의 대화 덕분이었다. 커플은 그녀 어머니의 응접실에 있었다. 신에대해 토의 중이었고 “나는 잉마르에게 내가 여섯 살 때 신을 어떻게 상상했는지 말했다. 그는 턱수염이 나서 노인 같은 사람으로 나는 작은 걸상을 가리키며 저런 로코코식 걸상에 앉아서 구름 위에 있다고. “거기에서 영감을 받았어요.”라고 나중에 잉마르가 말했다.” 베리만은 집으로 가 서둘러서 연극을 수정하였다.
펀치의 죽음, 엘세 피셰르가 안무를 한 2 막짜리 연극이 9월 24일 초연되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초연공연이었으면 하였을 것이다. 스물 네살 난 작가는 대체로 비평가들이 말을아끼자, 그는 조금 실망하였지만, 그들 중 가장 열렬한 비평이 역시 가장 영향력이 있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스벤스카 다그블라뎃의 스텐 셀란데르는 스트린드베리나 라게르크비스트의 빚지고 있음을 탐지할 수 있지만 개인적 시각을 그의 근원을 초월하여 발달시켜 나간 새로운 극작가라고 칭송하였다.
스웨덴 극장에 꽤 오랫동안 그처럼 장래가 촉망되는 데뷔가 없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최소한 연극에서 한 장면은… 완전히 독창적이며, 상당히 큰 그릇의 소름끼칠 정도의 익살을 보여준다. 대화는 견실하게 다루어지고, 만족스럽게 자연스럽다. 작가는 타고난 경기장이 극장이 될 수 있는 상상력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공교롭게도, 촉망받는 미래를 즉각적으로 활용하고자 애쓴 곳은 스웨덴 연극 무대가 아니라 부활하고 있던 스웨덴의 영화계였다. 스웨덴은 활동사진의 초기 발전의 선구자였고, 주요한 두 명의 무성영화 감독, 모리츠 스틸레르, 빅토르 쇠스트룀을 배출하기도 하였지만, ‘30년대’의 영화산업은 급격하게 내리 미끄러졌다. (부분적으로 내부적인 다툼과 질투로 재주 좋은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갔고, 또 부분적으로 유성영화의 출연으로 외국 시장이 감소되었다.) 칼-안데스 뒤므링이 1942년 영향력있는 회사인 스벤스크 필름인두스트리(Svensk Filmindustri) 의 수장으로 임용되자 회춘의 과정이 시작되다. 뒤므링은 세계 2차 대전을 기회로 인식했다. 전쟁이란 현실도피를 자극하여 모든 연예 사업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교전국과의 영화와의 경쟁이 제한되므로 스웨덴 영화에겐 특히 잇점을 주게 된다. 뒤므링은 그러나 당장 눈 앞의 이득을 바라지 않았다. 해외로 이주했던 많은 수의 스웨덴인이 해외의 영화 제작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을 SF로 끌어 모아, 뒤므링은 끊어진 전통을 이어붙이고, 새로운 세대가 자라도록 육성하였다.
‘30년대’ 스웨덴 영화의 주요한 약점이 재미없는 이야기라고 인식하고 뒤므링은 문학적인 재능을 지닌 신인을 모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펀치의 죽음 논평 기사를 읽고나서 대본 분야의 수장인 스티나 베리만에게 이야기를 하였고, 그를 조사해 보라고 지시하였다. 젊은 극본가는 그러나 그녀의 문의에 다소 냉담하였고 그가 마침내 인터뷰에 나타났을때에는 기회의 협정서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헙수룩하고, 거칠고, 무례하고, 수염도 깍지 않고, 지옥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나오는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녀는 그와의 첫만남에 대한 그녀의 수기에 그렇게 적의 었다. “그러나 부러 꾸미지 않는 매력을 지닌 천상 광대로 아주 빼곱 빠지게 웃겨서, 한두 시간의 대화가 끝난 후 제정신을 차리려고 커피를 세 잔이나 마셔야 했다.” 그럼에도 그의 강렬함이 인상적이어서 그녀는 그에게 일자리를 제안했다.
베리만은 꾸물거렸다. 그는 영화가 아니라, 무대 경력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그가 원래의 자리에 머물 것에 찬동 하듯 몇 개 고무적인 진전이 있었다. 학생 극장에 잘나가는 덴마크 극작가 소야의 스웨덴 초연작인 악마가 제안을 할 때를 무대에 올리도록하는 승인이 갓 떨어졌기 때문에 그는 그 기회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게다가 펀치의 죽음에 호의적인 리뷰로 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산파 역할이나 하게 될 대본 분야에 그의 창조적인 기력을 전환하는 게 과연 현명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망설인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로열 오페라의 제 삼 감독 자리에 고용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초라한 직위이지만-그는 예행연습 쉬는 시간에 맥주와 간식을 갖다 나를 것이고, 공연 중에는 입장 신호를 전달할 정도이겠지만-그 자리는 재정적 안정을 주고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명망 있는 오페라 극장의 감독 순위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자 뒤므링 자신이 내키지않아하는 후보자에게 직접 나서 그의 상황을 논의하였다. 베리만은 그가 만약 작가로서의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고자 한다면, 영화는 무시 못할 정도의 기회를 줄 거라는 점은 인정하여야 했다. 게다가 그와 엘세는 곧 가족을 꾸릴 예정있었으며, SR는 매달 500 크라운의 월급을 제공하였다. 결국 그는 그 기회를 받아 들이기로 결심하고, 영화의 장래로 로얄 오페라에서의 장래를 단념하였다. 계약서에는, 처음에는 일 년간, 그의 의무를 일 월에 시작하도록 되어있었다.
한편, 그와 엘세는 그들의 결혼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녀는 보수적인 기독교 가정이 무용수를 며느리로 삼는다는 데에 어떻게 반응할 지에 대한 조금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베리만 가족은 단숨에 그런 두려움을 일식시켰다. 8월에 그들의 약혼이 발표되자, 어머니는 엘세에게 이 날을 기념하는 기념물로 사파이어 반지를 그녀에게 주었다. 스톡홀름에 주택이 부족해서 아파트를 얻을 때까지 결혼 날짜를 정하는 것은 뒤로 미뤄야만 했다. 4 개월 후, 그들은 방 두개 짜리 플랫을 발견하고, 1943년 4월 25일, 결혼식이 베리만 목사의 교회 헤드비그 엘레오노라에서 열렸다. 부모님 댁에서 축하연일 열린 후 부부는 고텐보리, 스웨덴에서 가장 훌륭한 극장이 있는 곳이기에 선택된 도시로 짧은 신혼여행을 떠났다.
엘세는 2월에 스톡홀름 콘서트후스 (원래는 연주회장이지만, 매년 노벨 시상식이 열리는 장소)에서 첫공연을 가졌지만, 곧 임신을 하게 되어 그녀의 일을 중단하여야 했다 (그들의 딸 레나는 성탄절 3일 전에 태어났다.) 그녀가 좁은 아파트에서만 머무는 동안, 그녀의 남편은 낮에는 SF에서 일하고, 밤에는 극장 공연 준비로 보냈다. 혹자는 의욕적인 예술가로 불공평함에 분개하지 않았을까 지레짐작하겠지만, 그녀는 아주 많이 사랑에 빠져 있던 터라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동화책 같은 행복으로 채워졌다. 그 해 얼마간은 베리만은 벱포를 판토마임에서 연극으로 변환하기 위해 대화 영역 대부분을 보충했다. ( 몇 년 안되어 그건 스웨덴 극단의 주요 공연 목록이 된다.) 그들은 비록 남편과 아내였지만, 작가 내외는 그들을 함께 묶은 이야기만큼 천진난만해 보이는 생활 양식을 유지하였다. 잉마르의 테디 베어가 좁은 아파트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오락은 서로에게 곰돌이 푸우를 큰소리로 읽어 주는 것이었다.
SF에서 베리만의 양성은 소설의 각색에서 시작하였다. 그러고나서 그가 극작의 재능을 지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원형의 착상에서 극본으로 발전시켜보라고 명 받았다. 그다는 라틴 선생 이야기를 골랐다. 보기에 이번에 끝낸 숙제도 다른 극본 연습처럼 어떤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베리만은 극본을 믿었고, 결국 빅토르 쇠스트룀의 관심을 얻게되었다. 쇠스트룀은 무성영화 시대 스웨덴의 가장 뛰어난 감독이며 뒤므링은 그를 총예술 감독관으로 앉혔다. 쇠스트룀의 지지와 뒤므링의 부추김으로 고뇌는 1944년 SF의 제작 일정에 추가되었다. 1년 가량 밖에 되지 않아 완전한 풋내기가 제대로 된 극작가가 되어갔다. 그리고 그런 빠른 성장은 다른 야심도 부추겼다. 영화 극본을 쓰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감독도 하고 싶어졌다.
공연장은 그러나 여전히 근본적인 목표였다. 1943년이 그가 영화 작업의 기초를 닦은 해라면, 훨씬 중요하게 무대 경력을 건립해 나간 한 해였다. 빨간 두건 소녀의 여름 재공연( 이전에 사고테아테른에서 연출을 하였던)으로 유원지 순회상연을 하기 전에 근 새 연출 세 개를 착수하였다. 두 개는 –하나는 소야의 연극이고 하나는 나찌의 점령에 관한 희곡-는 학생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세 번째는 극작가 스튜디오에서하는 루돌프 베른룬드의 U 39였는데 브리타 본 호른이 자국 극작가에대한 관심과 나찌에 저항을 선동하기 위한 두 가지 목적을 우선시하여 만든 용감한 기획이었다. 스튜디오에서 연출을 하는 것은 대학 극장에서 성큼 한단계 올라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원래는 베른룬드의 극은 페르 린드베리가 맡고 있었다. 그는 30년대 이후 스웨덴 극단가을 장악하던 삼인조 중의 한명이었지만 그당시 몸이 안좋아졌다. 아마도 린드베리의 남매인 스티나 베리만의 조언으로 본 호른은 열렬함 하나만 활동력으로 넘쳐나던 ‘미치광이 젊은 녀석”을 고용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건 대담한 도박이었다. 그러나 극장가의 전설로 남을 만한 대단한 일이었다. 초연날 밤에 베리만은 스물 네 살 된 감독이 그가 대신하게 된 걸출한 감독의 수준까지 올라갔다는 엄청난 갈채를 받았다.
그해 가을 그는 학생 극장으로 돌아와 배우들 사이의 잭으로 극작가로서 명성의 봉오리를 틔워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리허설 끝난 후 주요 배역들이 군에 징집되어 어쩔 수 없이 지난 여름 써두었던 다른 극본으로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네 개의 다른 부분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오직 하나의 주제와 배경으로 통합되었다. 티볼리는 배우에겐 많은 융통성이 허용되었지만, 배우들 사이의 잭보다 보잘 것 없었고, 펀치의 죽음보다 흥미롭지도 않았다. 비평가들은 실망감을 표했다. 그러나 이 작은 좌절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그 시즌에 베리만은 성공을 거두었다. 티볼리 바로 앞에, 스튜디오에서 그가 연출한 카이 뭉크의 니엘스 엡베센이라는 중세 드라마로 나찌에 대한 신랄한 공격을 가장한 연극으로 U 39 때 보다 더한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해 초반에 스튜디오에서 연출한 얄마르 베리만의 두 개의 단막극으로 수도에서 제일 촉망 받는 젊은 감독으로 명성을 획득하였다.
엄청난 노력, 대담성과 운의 조화로 베리만은 몹시 짧은 시간 안에 가파른 상승을 이루어냈다. 여전히 당장의 가망은 그가 도달한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유럽 극단의 힘과 영향력은 형세가 확립된 극장에 임용된다는 데서 나온다. 스웨덴은 인구가 적은 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지위의 극장은 거의 없었고 설사 빈자리가 난다해도 경쟁에서 그런 젊은이는 사실 배제되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운이 베리만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스톡홀름에서 500 마일 떨어진 헬싱보리 시립극장이 몰락의 끝자락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근대화한 극장이 스웨덴 세번째 큰 도시, 말뫼에 들어섰고, 정부는 이 새로운 시설이 그 지역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여 이웃인 헬싱보리의 보조금을 철회하였다. 스톡홀름이 결정을 번복하도록 움직여보려는 마음에, 시 의회가 일년간 도박하듯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당혹스럽게도 그러나 어떤 감독도 죽어가는 사업에 지원하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을 상 싶었다. 작가이자 비평가인 헤르베르트 그레베니우스( 후일의 베리만의 협력자)가 베리만을 추천하자, 의회는 스물 다섯 살 짜리가 극장을 통솔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저런 가능성을 재어 볼 입장이 안되었다. 그들이 스톡홀름에 전화를 건 바로 그 날, 베리만은 남행 밤기차를 집어 탔으며, 가는 도중에 그의 기획안들을 대강 추렸다. 1944년, 4월 7일 8:07분, 시 발행 신문이 “미래의 학자들이 헬싱보리 시립 극장의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판명될 것이 분명하다”라고 기록한 시간에 베리만은 “유럽에서 가장 젊은 극장 책임자”로 만들어 줄 계약서에 서명을 하였다.
엘세는 그와 흥분을 함께 나누었다. 그들은 함께, 극단을 쓸 배우를 골랐고, 연극의 선택을 의논했으며, 새해 전날 공연할 촌극과 무용으로 이루어진 익살극도 같이 계획했다. 시 공원에서 짧게 가진 벱포의 재상연 순회공연에서 그런 공동협력을 더욱더 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짐을 다 싸고 나자, 엘세는고열로 몸져눕게 되었다. 검사 결과는 곧 그녀의 아버지가 고통받은 질환인 결핵으로 나왔다. 헬싱보리로 떠나는 대신, 그녀는 그들의 아기 레나를 그녀 어머니 집에서 돌보도록 보모를 마련하고 결핵요양소로 들어갔다.
그다음 여섯 달 동안, 그녀는 남편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썼지만, 돌아오는 편지는 하나도 없었다. 일견 이상해 보였지만, 그녀는 신문에서 시립극장의 재기 기사를 읽고 그의 책임이 막중해 그의 남은 일분까지도 빼앗기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제 회복되어 그들이 다시 가족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들뜬 그녀의 소식에대한 그의 반응이었다. 어찌보면 강압적이라 할만큼 어려운 시기의 재조정 때문이라며 그녀와 아기는 스톡홀름 그녀 어머니 댁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그녀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5월, 그녀는 그녀를 멀리 떼어 놓은 진정한 이유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와 이혼하여 엘렌 룬드스트룀과 결혼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녀는 엘세가 요양소에 들어 갈 때 그녀를 대신하여 고용된 안무가였다. 아주 심하게 상처를 받았지만, 그녀는 반대 소송에 휩쓸리는 것은 거절하였다. “물론 나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자문했다.” 1985년 그녀는, 그 때를 회상하며. “잉마르와 내가 너무 행복해서였나? (가끔은 너무 어린애 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그게 너무 목가적이었던 걸까? 나는 (지금) 그에게는 부끄럼 잘 타고 소년 같은 모습의 순진한 여성에서 좀더 여성스럽고 성적인 여자로 바꿀 시간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엘렌 룬드스트룀에게 끌린 것만이 결혼의 파열을 가져 온 것이 아니다. 몇 년이 지난후 베리만은 첫부인에게 사실 부부 생활을 하는 상대가 다수 있었다고 “자신은 그렇게 많은 삶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헬싱보리의 자리를 맡아야겠다 생각한 그 순간부터, 다엘세 피셰르는 이미 과거의 사람이 되었다고 보인다. 그에게는 사명이 있었다-시립극장을 살려야 할뿐 아니라 스웨덴이 자신의 재능을 주목해야만 한다. 그 다음 두해 동안 그는 작은 기적을 이루었다. 일부 어질어질한 속도로 무대에 올리는 인상적인 연출을 통해 또한 천재적인 자가 판촉을 통해서였다.
부끄러움도없이 지역적 자존심에 호소하며 그는 브리타 본 호른의 새 연극으로 시즌을 시작하였는데 내용이 18 세기 스톡홀름이 포고한 불합리한 징집령에 충원된 여자 대령인 마가레타 본 아셰보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역 언론은 재빨리 “그녀가 이룩할 수 있는 것을 수도의 신사들에게 보여준 ” 여성의 무용담과 “극내 새 연대의 희생으로 소도시 극장의 목숨이 구제 받을 수 있을 것인가하는 희망 뿐만 아니라 스톡홀름의 권력자들에게 시립 극장은 국가의 신임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드높이 보여주었다”고 꼭 집어 비교하였다. 빗셰브레의 아셰베리 귀부인은 같은 시즌 작가가 직접 소개한 스톡홀름 초연 상연에서는 완전히 망했지만, 헬싱보리에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쇄도하는 관객을 수용하기 위해 공연시간외 부가적인 공연을 따로 잡아야 할 정도였다. 베리만은 언론에 의기양양하게 “나는 스톡홀름 극장이 한달 안에 시 인구의 육분의 일이 드는 것을 기꺼이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재정적 안정으로 시립극장을 재건하기 위한 첫걸음은 정기적인 부르주아의 참석의 양성을 필요하다고 베리만은 인식했지만 그래도 “모든 이를 위한 극장”을 세우겠다는 그의 포고를 이행하기 위해서 그 자신의 전력도 다하였다. 극장을 꾸려가는 한편, 베리만은 두 시즌 동안 열 개의 제작을 감독했다. 어린이들을 위해 (“유일한 실제 연극 관객”인), 그는 토요일 마티네(낮흥행) 일정을 기획하였고, 처음을 벱포로 문을 열었다. 소도시의 지적인 상류인사들을 위해 맥베스와 스트린드베리의 펠리칸을 공연하였다. 그들의 허영심에 기대는 그의 아첨이 너무도 편안했던 후원자들을 위해서는 광견병, 중산층을 통렬히 비판하는 올레 헤드베리의 소설을 각색한 연극을 갖다 바쳤다.
연극 공연 자체로 뜻을 전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한 페이지 길이 가량으로 사람들이 요점을 느껴보라고 그들의 감수성을 아주 심하게 푹푹 찌르며 그렇다고 분개를 살만큼 세게는 아니고 프로그램 안에 글을 실어 대중들에게 직접적으로 설명하곤 하였다. 보통은 자아 인터뷰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제작에 관해서거나 연극에 담긴 포부를 논평하면서 종종 극장 위원회의 회원이나 회계 책임자( 베리만 자신이 고른 연극광인 잡화상인)를 그의 앞뒤가리지 않는 천재성을 빛나게 하는 어리숙한 조연으로 이용하곤 하였다. 극장이란 성상과 성상 파괴자의 충돌에서 나왔다. 그것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설교에서 나온 설교여야만한다. 어리석음과 게으름, 겁, 조잡함, 무감각, 미숙함, 권태에 대항하는 방책이며, 놀이공간, 전쟁터, 매음굴, 말썽 지점, 목욕탕이어야한다” 그는 분명 앙팡 테러블의 태도를 취하는 것 즐겼을 것이다. “악마가 내 지배자이다.”라며 작은 악마 모양으로 서명의 말미를 화려하게 장식하고는 “악마의 꼬리와, 외다리와, 뿔에도 불구하고 그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울부짓었다.
단지 300석인 극장을 지휘하던 젊은 감독이 대중 앞에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뻐기는 것은 우스꽝스럽지만, 그러나 두드러지기는 하여서 남쪽 변경에 있는 전초지에서 수도에까지 죽 가닿는 동요를 일으켰다. 헬싱보리로 순례차 떠나온 사람 중에는 알프 쇠베리가 있었다. 그는 스웨덴 연극 역사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감독 중의 한 명인데, 왕립 연극 극장 (드마라텐)의 수장이기도 하였다. 그가 언론에 언급한 내용은 극찬 정도가 아니었다.
그런 공연을 극장에서 본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나는 즉각 스톡홀름으로 떠나 경보를 울릴 것이다 내 동료 중에 한 명이 요즘 스웨덴 연극계에는 자극이 될 만하게 없다고하더라. 내가 그의 비용을 대는 한이 있어도 그는 여기 헬싱보리에 와 봐야 한다…이 성공은 이런 조화를 아우르는 위대한 영혼의 증거이다… 나는 베리만이 감독으로서 얼마나 갖추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본 치 만큼은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쇠베리가 지난 겨울 끝 무렵에 고뇌를 만들면서 베리만에게 영화 감독의 기술을 훈육하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발언은 동업자간 예의의 표시로 에누리해서 들을 수 있지만 그럴 의무가 없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같은 평가를 표명하였다. 베리만이 1946년 그곳을 떠나 톨스텐 함마렌의 극장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고지할 때 즈음엔, 자축해도 될 만큼 충분한 보증들을 성취하였다. 그의 글에서 “시립 극장은 좋은 발판이 되었음을 고백한다”고 회상하였다. “여기 오기 전에는 무엇이었던가? 주변부에서 놀던 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거 정말 기분 좋지 아니한가?”
고텐보리로 가는 길은 그가 헬싱베리로 가는 길을 처음 탔을 때 상상했던 거 보다 훨씬 더 빨리 영광으로 인도할 것이 확실해 보였으나 그 이후 6년 간은 힘든 나날임이 드러났다. 스웨덴에서 두번 째로 큰 고텐보리는 좀 도도하달만큼 그들의 극장을 자부하였으며 비평가들은 건방진 애송이에게 작은 헬싱베리 저쪽만치 쉽사리 인상을 끼치기는 어려울 거라고 본 때를 보이기로 작정이라도 한 거 같았다. 베리만의 데뷔작 칼리굴라는 허식투성이에 광란투성이라고 험담하였다. 그의 두번째 작 멕베스는 안데스 에크가 주인공을 어울리지 않게 마르크스식으로 해석하였다고 비난을 집중 퍼부었다. 마침내 계약 기간 동안의 마지막 연출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비평가들의 존경을 얻어내었고 그가 다음 시즌의 시작에 초빙 감독으로 상연한 바예-인크란의 성스러운 말씀으로 놀랄만한 갈채를 받았다. 그렇다해도, 그는 결코 그들의 적의를 완전히 용서하지는 않았다. 더 큰 상처는 그러나 극장 조직 안에서 기인했다. 함마렌 아래에서 일한다는 것은 예전엔 극장 총책임자로서 누리던 특권을 희생해야한다는 것 말고도 연극에 대한 접근도 새롭게 적응하여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베리만은 자신의 육감에 의존하는 것에 익숙했다. 함마렌은 아주 사소한 세부사항까지 고려하며 세심하게 준비하였다. 베리만은 그가 원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 배우에게 우레같이 호통치는 난폭한 사람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함마렌은 항상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였으며 배우의 의견을 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그들의 작업을 순조롭게 꾸려나가려고 애썼다. 그들의 서로 덜그렁거리는 기질은 아래 일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베리만이 한번은 화가 나서 컵을 내동댕이치자, 함마렌은 조용히 손실을 적어두고는 그에게 그의 봉급에서 감하겠다고 통지하였다. 비록 나중에 베리만이 고텐보리에서 보낸 삼년간 극장의 규율에 대해 잘 배웠노라고 조직 정연한 함마렌을 입이 마르게 추켜올리지만, 그 당시에는 고의로 창피를 주는 것만 같았다. 그 뒤는 더 나빴다. 로렌스 마름스텟트와 공동으로 스톡홀름에 극장을 세웠지만 ( 스트린드베리를 기리는 절친한 친구라고 이름 붙였다.) 평단이나 대중이나 인기를 끌지 못했고, 그들의 사업은 단 세 개 연출한 후 갑자기 마름스텟트가 그를 해고해버려서 끝났다. 다음해 두 개의 초빙 감독으로 계약된 것도 (처음은 드라마텐에서, 두번 째는 노르괴핑에서) 거의 실망에 가까운 것이었다. 베리만은 드러나게 난조를 보였다. 그는 나중에 그 시절을 하던 일 마다 다 망해버리던 때라고 말했다
그리고 1952년, 말뫼는 새로운 수장으로 그를 뽑았다. 그 임용은 이중의 아이러니가 들어있다. 그가 어마어마한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말뫼 극장이 건설로 헬싱보리가 치명타를 입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헬싱보리의 책임자로 그의 과제는 거대입상의 그늘에 가리더라도 소도시의 극장이 존재할 권리는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거대입상이 활동을 시작하자. 거대한 실수가 되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모든 감독들이 둔중하고, 기술적으로 고도로 복잡한 무대를 한 마리 야생 동물로 간주하였다. 이제 베리만의 도전과제는 그것을 길들여 어쨌든지 쓸모 있는 극장이라는 보이는 것이다. 그는 화려하게 성공하였다. 육년 간의 재임기간 중 가장 연기를 잘하는 극단으로 개발하였고 끊임없이 스웨덴 어느 곳보다 가장 흥미로운 연출을 만들었다. 헬싱보리에서 공표하였던 목표인 가장 드넓은 범위에서 성공하겠다던 포부대로, 그는 모든 기호를 아우르는 극단을 창조하였다. 즐거운 미망인과 8월 달(月)의 차집에서부터 유령 소나타, 돈 주앙, 그리고 성까지 이른다. 1963년 그가 드라마덴의 책임자의 자리를 맡을 때쯤, 그는 이미 스웨덴 극장가의 걸출한 인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모든 명성 때문에 드라마텐은 그가 드라마텐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그를 필요로 하였다.
몇 명의 특출한 영화감독 중에는 -두 명의 위대한 창조적 혁신자 D. W. 그리피스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을 포함하여-연극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이 있다. 그리고 많은 감독들, 특히 유럽 감독들은 무대와 은막 사이를 오갔다. 그러나 어떤 주요 영화감독 중에 베리만처럼 계속해서 연극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무대 경력 또한 탁월한 비교 수준까지 이룬 사람은 없다. 전문적 극단의 주변부에서 시작한 그의 초기 시절부터 그는 끊임없이 과감한 무대연출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공연하는 연극에는 강하게 그자신의 인장을 찍었다. 그가 연출한 많은 무대는 –적어도 스칸디나비아에서는-그다음 판의 비교 대상이 되는 잣대로 자리 잡았다. 거의 필연적으로 한가지 방식의 해석적인 기교는 다른 것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베리만은 기본적인 영향이 극장에서의 작업에서 필름에서 작업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유지하였다. 실제 여러 번에 걸쳐, 영화 감독으로서 예술적인 발전은 영화 자체를 훑어 보는 것보다 그의 무대 연출 발달 과정을 추적해보는 게 더 쉬울 거라고까지 시사하였다. 게다가 몇가지 두드러진 예외를 빼고는 그의 영화에서 꼭같이 확인할 수 있는 그 자신의 무리를 공급하고 훈련하는 것은 그의 극장 극단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극장 배경은 그의 영화대본에서 극화 구조에서 반영된다. 그의 이력 중 중대한 중반기에 좀 더 분명해지고 60년대 중반에는 조금 희미해지지만.
이번 연구의 중심은 그러나 감독으로서 베리만이 아니고 영화에서 영화적인 면에 관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보다는 50년간 펼쳐진 창작의 거대한 꿈작업을 통해 표현된 상상에 관한 것이다. 탐구는 고뇌에서 시작하는 게 적당할 것이다. 그런 창작이 은막에 이른 첫 작품이자 나머지가 태어나게 된 많은 부분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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