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3-19
제프리 유제나이즈
지금 돌이켜보면-나는 다음 주에 마흔에 들어서고, 이 일은 실제 있던 일이다-내가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좋아했던 이야기의 많은 데에 동물들이 들어 있었던 거 같다. 카프카의 『변신』에는 쇠똥구리가 있었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실향민(the displaced person)』에는 공작이 있었다. (그 공작을 좋아했던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몇 년 후에 거의 변하지 않고, 레이몬드 카버의 이야기 『깃털(feathers)』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마음에 들어 하던 동물들은 야생의 험악한 『늑대 개(white fang)』종류가 아니었다. 내게 다가오는 야생동물들은 역시 단조로운 남부 농장에 간 이국적인 공작, 바로크 도시 프라하로 간 쇠똥구리처럼, 난민들이었다. 내가 보기에 신화의 중심 특징이라고 생각되는 이런 동물들의 인간계의 난입은 내 흥미를 활발하게 돋우는 긴장을 창조하였다. 이런 소설은 세계들 간의 교환을 약조하였다. 현대의 소설에서는 쉽게 얻지 못할 일이다. 그 동물들은 그들의 발톱이나 이빨 혹은 집게발에 신이나 인간 본성의 어떤 진실을 붙잡고 있었다. 하여튼 무언가 커다란 것들을 붙잡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내가 왜 글렌 웨이 웨스코트의 『순례자 매』가 처음 읽었을 때 그렇게 나를 사로잡았는지 설명하려 하자 떠올랐다. 책은 올윈 타워라는 사람이 서술한다. 이 이름만으로 여러분들에게 소설이 어떠할까 그 윤곽이, 대가 같은 어조에, 거실 배경에 유럽적인 감수성들 같은 면들이 떠오를 것이다. 타워는 국외 거주하는 미국인으로, ‘절친한 친구 앨리그잔드리아 헨리’의 집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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