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가한 농담 : 성인과 죄인들 사이에 싸우는 퀘이커
내 오랜 캘리포니아 동료 빌 노우랜드는 상원에서 공화당 새 원내총무로 첫 테스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목요일 백악관에서 국가안전보장 위원회 비상소집 모임에서 내 사무실로 돌아오던 길에 내가 힘이 될 수 있나 보려고 의회에 들렀다. 의회 언덕과 몰 공원은 시위자들, 반시위자들, 관광객, 경찰, 개, 아이들로 들끓고 있었고 걱정, 우울, 우려, 불확실의 표현들이 사방에 있었다. 너무 많은 차질들과 역행들이 있었다. 이 모든 것들 한가운데, 노우랜드는 기만의 술수를 쓰기로 결심했고, 소수당 원내 총무 린든 존슨에게 오늘 의안목록 판정요청-상원들이 굳이 등원하는 일도 거의 없는 업무-보다 더한 논란거리 법안은 없을 것이라고 일찍이 못 박은 뒤, 그는 갑자기 나서 공격적으로 새로운 통제법안을 관철시키려는 시도로 그 판정요청을 방해하고 나서 어리벙벙 민주당을 놀래켰다. 나는 빌이 똑똑한 짓을 벌이는 건지 확신이 없었지만, 나는 그의 동기를 이해했고 그 동기들을 존중해 줘야 했다. 그는 병이 든 밥 태프트를 막 이어받았고 그는 지도부 일에 자기 고유의 도장을 찍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당파적 갈등 뚫고 자기 나름 성사되기를 바랐다. 태프트 같은 살아있는 전설의 뒤를 잇는 일은 쉽지 않았고, 빌은 변화의 신호를 보이고 그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대담한 일을 해야 했다. 물론 완전 말아먹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확률은 딱 반반이었다-민주당과 야합해 지금 투표를 하는 웨인 모스까지 치면, 통로 양편 각각에 마흔여덟 표가 있었고 내 한 표가 승부를 결정지었다. 더글라스 덕분에 일들이 지금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로젠버그 사건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 일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니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의회 공화당원들과의 아이젠하워 연줄은 너무 취약해서, 우리는 어쨌거나 그들의 반감을 살 여유가 없었다-나는 참가하는 일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꼭 그래야 한다면 노우랜드가 곤경을 면하게 도와야 했다. 그 외에도, 딱 내가 좋아하는 그런 정치적 전쟁이기도 했다. 아무도 법안 자체에 신경 하나 쓰지 않았고, 원초적이고 단순한, 체스에서 수처럼 철저한 힘겨루기 정쟁이었다.
들어가는 길에, 나는 밥 태프트를 보았다. 불쌍한 노인네, 모습이 아주 처량했다. 미스터 공화당원. 싸움꾼 밥. 일기당천一騎當千 남자. 이제 그는 일기당천 혼자 싸우고 있다. 맞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딱 봐도 허리께 암으로, 아마도 1년을 못 넘길 것이다. 이제 정의의 천사 편에 섰다. 몇몇 기자들이 그의 주변에 얼쩡거리며 아주 동정적인 낯짝들을 하고 있는데 저런 자식들로부터 받는 동정은 나로서는 거의 맛볼 수 없는 대단한 일이라, 나는 싸움꾼 밥이 나와 그 조금 여분을 나눌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는 이런 동정 어쨌든 그리 오래 필요하지 않을 것이니까. “이봐요, 밥,” 외쳐 부르며 접근하였다. “전해줄 소식이 있어요!” 태프트는 내가 그날 아침 어디 있었는지 알았다. 한국과 독일 그리고 로젠버그 위기들에 관해 알았고-의회 전부가 일상적인 소문, 예언, 공포에 분명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그러니 그도 물론 귀를 w종긋 세웠다. 목발을 짚고 있었는데 몸무게가 엄청 빠진 것 같았다 (아마 그래서 온통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는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치유를 향해 뻗기라도 하듯 몸을 쭉 앞으로 뻗었다. 뉴스쟁이 녀석들이 모두 나를 향해 몸을 돌리고 귀 뒤에 꽂아둔 연필을 쥐었고 사진사들은 카메라를 잡아챘다-나는 재빨리 턱을 치켜들고 눈썹을 올렸다. 나의 엄중한 퀘이커 눈과 묵직한 뺨이 불행하게도 종종 사악하게 노려보는 외관으로 비쳐, 내가 말하고 있는 바와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기울어진다는 점을 의식해서였다. (위대한 나라의 운명이 카메라 각도에 달릴 수 있다니 참 가관도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버닝 트리에서 일요일 백점을 돌파했어요, 밥!” 말했다.
밥 상원은 갑자기 늙어버린듯이 도로 쪼그라 들었지만 미소를 짓고 축하해 주었다. 그 인정과 축하에 절을 하고 후하게 미소를 짓고, 이를 최대한 활용해보려고 했지만, 갑자기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갑자기 형제처럼 느껴져, 나의 작은 농담이 후회되었다. 그가 병에 걸렸을 때 그가 알아차린 첫 자각 증상이 지난 초봄에 “골프공을 맹타하기” 시작하면 엄청 지치더라고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니미, 나는 방금 아린 데를 문질러대었다. 나는 팔을 뻗어 그를 감싸 안고, 저 망할 목발 대신 내 어깨에 기대라고 내주고 싶었다. 다시 건강을 찾아주고, 그를 대통령이나 대단한 인물로 만드는 데 힘을 빌려주거나.
우리는 계속해서 골프에 관해 이야기했고, 그는 꽤 유쾌한 듯했지만 나는 죽을 맛이었다. 뉴스 기자들 웃던 얼굴이 굳어, 대부분이 몸을 돌려 멀어져, 나는 다시 오해를 샀구나 알았다. 나는 다만 태프트에게 이런 힘겨운 시절에 웃을 만한 웃음거리를 주려던 것뿐, 해악을 끼칠 뜻은 없었다. 그는 아무튼, 지난 가을 기금 대란 내내 내 곁을 지켜준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물론 이유가 빌 노우랜드가 내 자리를 넘겨받을까 봐 우려해서 우러난 행동이긴 했지만. 태프트는 수많은 실책을 저질렀어도, 그가 유럽에 나토와 집단안전보장에 반대하지 않았다면 백악관에 갈 수도 있었을 사람이었다. 알게 뭔가, 터놓고 말해서, 그는 어쨌거나 우리 몇몇이 도끼로 쳐내듯 쳐내지 않았으면 벌써 갔어도 갔을 사람이었다. 작년 선거에 승리했을 수도 있다. 지금 그건 확실하였다. 그리고 아주 불과 몇 주 전에, 그는 전미에서 백악관 바깥으로 가장 강력한 힘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아마 역사상 가장 강력한 상원이리라. 긴말은 접고. 지난 여름 그는 나의 적이었다. 캘리포니아 대표단의 통합을 틀어버린 사람이 나였고 그래서 아이젠하워로 정당의 지명을 확보하여, 내가 손수 그를 무찌르고 부통령 지명을 꿰찼다. 하지만 지금, 저기, 저 목발에 간신히 지탱해 쪼그라들어, 꿋꿋하게 미소를 짓고, 바지 아래 낮게 배가 늘어진 그를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맙소사, 저 사람 천상 성인군자로구만! 나는 모든 것을 그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국가안전보장회의 모임에 관해, 엉클 샘과 나눈 이야기들에 관해, 차후에 벌어질 조치들에 관해, 내 사무실 주변에 흩어진 로젠버그 편지들에 관해, 내 희망, 내 두려움, 일 전반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나는 그가 내 사무실에 와서 당의 대통령 지명에 나의 지지를 호소하던 일이 기억났다-나, 캘리포니아 갓 입성한 신출내기 상원-그때 만나지 말아야 했는데. 일부 그가 내게 요청했다는 사실에 이론의 여지가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그의 위신을 떨어뜨린 것과 마찬가지 행동이었다. 그처럼 내 사무실에 오는 일은 너무 개인적이었다.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우쭐하기도 했지만, 대략 못내 불편했고, 그와 더이상 엮이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 외, 그와 함께라면 나 자신이 좀 더 뭔가 크게 될 가망이 없었다. 아마 그로서는 하기가 몹시도 껄끄럽고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나는 절대 하지 않을 일, 나는 절대 다른 이의 집무실에 걸어 들어가 대통령이 되게 도와달라고, 요청 못 했다. 다시 태어나도 못할 일이었다. 누구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있지만 내가 직접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오늘 온다면, 아마 그러겠다고 해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까. 그는 희미하게 하지만 친절하게 미소를 지었고, 투명한 뿔테 안경을 고쳐 쓰고, 조만간 게임 할 날 잡아보자고 하고서, 체중을 옮기면서, 그의 대머리진 구석을 마치 광륜처럼 내보이며 목발을 짚고 절룩거리며 멀어졌다. 지금 내 도움이 필요하세요? 그에게 외쳐 묻고 싶지만, 하지 않았다.
이는 종종 내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런 온정이 내가 무찌른 사람을 향해 불쑥 스미거나, 사랑조차 솟기도 했다. 이런 점이 걱정이었고 지금도 걱정이다. 가까운 시일 부메랑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내가 해군에 몸담았을 과거에, 나는 그 문제에 스스로에게 짧은 편지를 썼고, 여전히 갖고 있으며, 내 책상 서랍 안쪽에 테이프로 붙여두었다. 순간적인 충동에 너무 관대하게 굴지 마라! 하지만 자꾸 까먹는다. 이건 약점이었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앨저 히스 사건의 비극적인 측면을 과하게 안타까워 한다고, 너무 고집스레 그의 지능, 예민함, 이상주의를 지적하고 있다고, 진지하게 그는 평화의 개념에 헌신하고 있었으며 보통 사람 자질은 훨씬 능가한다고 나는 생각한다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망할 팬텀을 두고도 아마 그런 말을 하고 말지. 하지만 일단 끝나고 나자, 거짓말쟁이 깔보는 개새끼를 영구히 잡아 유죄를 받고 나자, 나 자신이 어쩔 수 없었다. 해피엔딩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뭔가 충동이 인다. 대부분 갈등들은 해결할 수 없다, 나는 그 점을 안다, 누군가 이기고 누군가 지고, 누군가는 오른편에 있고 누군가는 다른 편에 있고, 어떤 해결법들이 가능한지는 감정들을 거쳐 나중에 얻게 된다. 오래 전 7학년 때 지금은 유명한 곤충 논란에서 저 여자애들을 이겼을 때 처음 배웠다, 나는 변증법, 유물이든 아니 다른 거든 믿는 사람은 아니다. 이 점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 나 개인적으로 아는 한 이쪽이냐 저쪽이냐 가르는 일, 그리고 나인 한해서는 최적임자가 이기도록 하자, 내가 그랬다면, 나는 미합중국의 부통령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이 끝나면 이런 감정적인 해결법들을 원한다.
사람들은 나를 곡해한다. 온통 보복적인 처사들만 사람들은 한다. 그렇지 않다. 개인적인 증오는 큰 낭비이다, 아주 간단하다. 쟁점사안들이 전부이다, 이것들이 의미가 없을 때조차 그렇다, 감정과 성격 같은 다른 것들은 상황을 흐려 운용하기 어렵게만 만든다. 하지만 더 이상 문제되지 않을 때 이런 일을 파고들면 기분이 좋다. 나는 종종 정치에서 화를 못 참고 성질내는 유일한 때가 고의로 그리고 유용할 경우에만 그래도 된다고 말해왔다. 인간이다 보니 나는 항상 그런 기조에 부응하며 살진 않는다만 여전히 이를 믿고 있다. 나는 선거에 맞붙어 싸우기에 힘든 개새끼다. 지금은 모두들 안다, 나는 둥근톱같이 다 갈아버리는 적수라고들 하고 매정하고 부도덕하다고까지 한다. 목을 딸 급소만 노리는 놈이며, 어떤 제약도 없다고, 스티븐슨이 표현하듯, “닉슨랜드는 진열장 깨고 탈취해가는 동네, 뭐든 이겨먹는 땅”이다. 그래서 당파적인 과장법은 에누리해서 들으면, 그 말은 대충 사실인 것 같다. 너는 이겨야만 한다, 안 그러면 나머지는 상관없다. 나는 끝까지 싸우는 일을 믿고, 되받아치고, 받은 만큼 돌려주는 일을 믿는다. 존경받는 원로정치인(statesman) 되기 전에 정치꾼이 되어야 한다, 그런 말을 했고 참말 그렇다. 내게는 주름깃셔츠, 염소가죽장갑, 비열한 술수는 없다. 엉클 샘이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정치는 진짜 피로 겨루는 유일한 게임이다.” 그 당시에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수사법과 근면성으로 겨루고 싶었다. 그래도 심중 깊이 아주 사소한 수준에서도, 정치는 살인과 난동에 꼬리를 치고, 절도와 야만적인 식인과 시시덕댐을 알았다.
하지만-아마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나 자신을 또한 치유자로 항상 여겼다. 항상 형제들 사이 싸움박질을 끝장내었고, 아버지 채찍질 안 당하도록 해주었으며, 학교에서 울화통 터트내지 말라고 다독였다. 설그래이브 클럽 세면소에서 두해 반 전 조 맥커시와 드류 피어슨 사이 험악한 다툼을 멈춘 사람이 나였다. (사람들은 내가 조의 편을 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나는 피어슨 목숨을 구하고 있었다. 조는 어디 인디언에게서 사람이 무릎 꿇을 정도로 대가리에 아주 세게 치면 피가 두 눈에서 터져 나온다고 들어 이를 이번에 시험해 보려 안달이었다), 공화당 내에서 세대 간 다리를 놓는 이도 나였고, 지난 가을에 전쟁 중인 양편의 화합으로 묶어 마침내 승리로 이끈 사람도, 대통령과 적대적인 의회 사이에 평화를 유지하는 이도 나였다. 나는 휴대품보관소(클로크룸)에 있는 아이젠하워 영업사원, 그게 내 직업이었다. 나는 잘 속는 사람들과 구석기 네안데르탈인들 사이 정치적 중개인이었다. 나는 이목 끄는 과격파를 진정시켜야 했고, 완고한 원리주의자들을 구워삶고, 버티고 앉은 보수주의자와 무모한 난폭자들을 동조하게끔 구스르고 머리 뿔난 사람들 달래고 허세부리는 자부심은 오냐오냐 어루만져야 했다. 고사포 잔심부름꾼, 마차의 뒷말(충실한 노력가)이었고, 불화로 깨진 데는 보수하고, 상처를 싸매야 했다. 그렇다. 상처를 싸매는 일, 나는 링컨과 많은 면이 닮았다. 링컨은 어떤 면에서 친절하고 연민이 많으면서, 한편 강하고 경쟁심이 셌다. 예를 들어 1946년에 이겨 부리스의 의회 자리를 꿰찰 때, 나는 부리스에게 인정사정 보지 않았다. 나는 그를 공산주의자들의 꼭두각시라고 불렀고, 더러운 측면공격으로 때리고. 익명의 전화니 온갖 일로 치받았다. 내가 그런 식으로 겨루지 않았다면 지금 있는 곳에 나는 없으리라. 미국의 역사와 전세계의 역사는 아마 다른 경로를 달렸을 것이며, 팬텀은 당연히 우리와 쿵쿵짝이 잘 맞아 재미를 보고, 우리 중 아무도 여기 있지도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 나는 그 잡종의 사무실에 가서 미소를 짓고 악수를 나누고, 거의 한 시간을 그와 보냈다. 진심 그런 뜻을 담아, 제리 부리스 이 친구보다 더 높은 이상을 지닌 이는 드물다고, 비록 여기 변방에 우연히 마주치는 앨거 히스와 수많은 다른 버릇없는 놈팡이들처럼, 예일 출신이긴 하지만, 하고 말해 주었다.
아마 나는 이런 면모를 어머니에게 탁했나 보다. 아버지는 발끈 주먹 먼저 나가는, 아주 경쟁적인, 성미 고약하고 공격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거나 아무나하고 논쟁 벌이길 좋아했고 항상 우리 모두에게 경쟁적인 감정을 불어넣었다. 우리는 내 형제와 나, 때로 그의 배짱을 싫어하긴 해도 아버지에게 많은 면을 빚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딱 그 반대였다. 퀘이커교도, 평화중재자였고, 우리에게 자비와 인내를, 사람에 대한 감정들을 도덕적 의문들과 따로 떼야 한다는 필요성을 가르쳤고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나약하였다. 당연히 그렇지만 그들에게 벌을 줄 때조차, 사랑하는 마음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화증머리 아일랜드 성질이 속에서 부글거리며 솟아 혁대나 몽둥이를 찾으러 갈 때, 어머니는 간섭하지 않으려 했다. 규칙의 필요성과 처벌의 필요성을 이해했고 아버지가 흠씬 두들겨 패는 동안 옆에 서서 지켜보았다. (하이고! 진짜 엉덩이 불붙은 듯 아팠고, 아버지가 진저리나게 무서워서 그 몽둥이찜질을 어떻게 피하는지 배웠다. 비록 거짓말해서라도 다른 이의 탓으로 돌리는 한이 있기는 했어도, 하지만 아버지는 동생 돈 엉덩짝이 무두질 가죽마냥 때렸고, 나는 아버지가 불쌍한 해롤드의 활력을 부숴버리고, 꼬맹이 아서의 기를 팍 꺾어놓겠구나 걱정하곤 했다. 지금도 그 일로 악몽을 꾼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는 항상 아버지에게 우리를 용서해주라고 시켰고-가끔 최고 좋은 가족 한때가 가죽 띠로 때리는 일이 끝난 후 뒤따랐고 어머니는 우리 모두를 다시 함께 모아들였다. 내 속에 두 분 다 조금씩 지니고 있는 것 같다-“싸움꾼 퀘이커,” 타임 지는 지난 여름 내 지명 후에 나를 그렇게 불렀는데, 아마 나를 압축해 보여준 말 중에 가장 근사치에 가까우리라. “리처드 M. 닉슨: 미래를 위해 기차를 갈아타다.” 나는 이 말의 운치가 좋았다. 요바 린다에 보내던 어린 시절이 다시 떠올랐고, 서부로 휩쓸어갔던 엉클 샘의 복음으로 나를 인정하는 말이었다. 물론, 여기 워싱턴에서 열차사고 후 “페드럴 익스프레스 사의 충돌 사고”에 관한 민주당의 악의 담긴 농담들이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돌긴 했다. 얼마 안 되어 내가 받은 우편에 “방구 뀌는 퀘이커(Farting Quacker)” 제목이 붙은 익명의 패러디를 보고 마음이 썩 좋은 건 아니었다. 칙칙 소리 내는 뒤편-궁둥이를 가진 기관차처럼 나를 그린 그림이었다-내가 위장 문제가 많은 게 내 잘못인가? 팬텀의 몇몇 첩자들은 모든 포르노제작자들과 무신앙자들 같은 놈들이라 치부했다. 지금은 그런 일에 익숙하였다. 기억나는 아주 옛날까지 거슬러보면 나는 과히 거의 모든 별명으로 불렸다. 고등학교 다닐 때, 라틴 수업에 베르길리우스의 이니드를 기반을 한 연극을 올렸고, 아마 내게 일어난 가장 낭만적인 일이었지만-나는 아이네아스였고 올라는 디도 여왕이었으며 우리는 하얀 가운을 입고 사랑에 빠졌다-그때도 아이들은 나를 “에이너스(항문)”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올라도 킥킥 비어지는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몇 년 후에 내가 해군에 있을 때, 그녀를 딜도 여왕이라고 부를 수 있었음을 깨달았지만, 우리는 그 당시 그런 걸 알기에 너무 애송이들이었다. 우리가 항문을 알았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대회의실에 잠깐 들렀지만 거기는 활기 없이 죽어 있었다. 빌 랭거는 영주권 취득자로 국내유입이 허용된 외국인들 명단을 줄줄이 읽고 있었고, 조지 스매더스와 은발의 노인 패트 맥캐런은 모든 얼빠진 이름을 두고 경망한 농짓거리를 던지고 있었다. 랭거가 끝나자, 스매더즈가 발언권을 얻고 발표했다. “노스다코타 기품있는 상원이 그의 언어학적 능통함을 칭찬 드리고 싶습니다!” 위 갤러리 관람석에 있던 시골 사람들이 웃었다. 스매더즈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기 와서 내가 사귄 인물들 중에, 민주당이긴 했지만. 가장 친한 친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원 동기였다. 플로리다 봄 예비선거에서, 그는 클로드 페퍼 상원을 레드 페퍼(빨갱이 페퍼)라고 칭하고 깜둥이 두둔자로 불러 물리쳤다. 나는 그의 테크닉을 잘 살피고 배워 캘리포니아 핑크 레이디, 헬런 더글라스 대항에 써먹었다, 허브 브론웰 말처럼 “아주 걸출한 캠페인”으로 지난 가을 우리 당의 전국적인 성공에 기틀을 다졌다. 분명 스매더즈는 린든 존슨이 다가올 선거에 그의 병력을 정렬하고 가다듬는 사이, 소수당 원내총무를 대신하고 있었는데, 장래가 아주 촉망되어 보였다. 노우랜드 역시 공석이었고, 밥 헨드릭슨이 우리 측 원내총무 일을 맡고 있었다. 일들은 조용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들썩였다. 저조한 때 대회의실이라 해도 곧 닥칠 전투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내 자신 참석 그 자체가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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