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ts of East Berlin 1953
나는 빌 퍼텔, 임시 권한대행인 그에게, 내가 부근에 체재하고 있음을 전달하고, 그런 뒤 공화당 클로크룸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또 다른 내 동기, 에브 더크슨이 안에 있었고, 나를 보자 어깨를 구부리고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머리카락이 구불구불해, 진짜 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를 막아내려는 것처럼 의자를 그러잡았고 상상의 채찍을 철썩 휘둘렀다. 이런 웃기는 행동에 주변에 서 있는 고참들 너털웃음이 터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유머 감각이 있다, 왜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는지 모르겠다), 에브는 깨갱 몸을 뺐고, 겁쟁이 사자처럼 슬픈 얼굴을 해보였다. 그는 최근 신문이며 잡지에서 내가 사자 우리에 사자 시바와 같이 있는 그림, 서커스 팬들의 성인과 죄인 클럽Saints & Sinners Club of circus fans 가입 절차의 일부로 한 행동을 찍은 사진들을 두고 놀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중재자들을 통해, 옛날 다니던 듀크 법대에서 내게 명예박사를 수여하면 풍성한 한 해가 되리라 슬쩍 말을 넣었는데, 무슨 얼척없는 이유로 거절했다-나, 미합중국 부통령인 나를! 악의적인 좌익 민주도당 몇몇이 교수단에 들었나보다 짐작했다. 내가 접한 소문으로는 거기 다니던 마지막 해에 학과장 사무실 침입한 때문이라고 했지만 점잖빼느라 에두른 허튼소리였다. 모든 학생들이 학과장 사무실에 시험을 훔치거나 결과를 알아내러 잠입한다. 세상에 가장 흔한 장난이니, 그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서둘러, 내 스케줄에 틈이 생기게 되어, 우리는 성인과 죄인 클럽 가입 주선하게 되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로 훨씬 더 많은 매스컴 관심을 얻었다. 모든 사진들이 추켜세우는 사진들은 아니었지만. 시바가 약이 오르자-내게서 나는 우리 집 개 체커스의 냄새에 어쩌면-내 자신의 반사반응은 상당히 빨랐고, 뉴스 사내들이 불행하게도 패닉의 순간을 잡았다. 나중에 관계자들이 암사자는 다만 하품하던 거라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어이,” 에브가 우르렁거리고, “로젠버그 부부가 수정헌법 제5조로 들어 증언 거부한다는 이야기 들었지, 아마…?”
“아 그래?”
우리 모두 쫑긋했다.
“그래, 대답하기 거절했어. 그들 소각에 이바지할지 모른다는 구실로!”
더크슨은 우스꽝스럽게 얼굴을 찡그리고 우리 모두 탄성과 왁짜 웃음으로 반응했다. 더크슨은 엄청 표정 풍부한 얼굴을 가졌다. 이를 구경하는 일도 기분 좋은 눈요기였다. 나와는 정반대로, 진짜 광대의 얼굴이었고, 손을 어떻게 이용할 지도 알았다. 지난 여름 정당대회에서 그가 톰 듀이에게 몸을 돌리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치명적인 통증에 숨넘어가듯, “전에도 우리 당신을 따랐건만!” 호통을 치던 때란, 역대급 위대한 손짓을 선보였다. 손가락으로 괜찮다고 가리키고 있었지만, 듀이의 방향에서, 젖은 국수가락처럼, 힘없이 안간힘을 쓰듯, 자그맣게 부들거렸고, 그 발기불능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도 소용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가득 메운 대표단이 이 푹 처진 손가락을 바라보고 또 폭소를 터뜨리고 환호성 지를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우리를 저 아래 패배의 길로 이끌었어!” 나는 그 손가락이 나를 향해 달려들지 않기를 희망했다.
“자,” 그는 눈알을 굴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리틀 미스 머펫(Little miss Muffet, 응유를 먹는 아가씨에 관한 동요)을 빨간 두건 아가씨와 교배하면 무엇을 얻을지 알던가?”
“아이니잇,” 진 밀리킨이 웃었다. “뭘 얻는다고라, 에브?”
“응유-나르는 공산주의자!”
킁킁 코웃음과 깔깔 웃음이 넘쳤고, 에브는 상원 화장실을 향해 터덜터덜 느린 걸음으로 멀어졌다. 나도 소변이 아주 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와 함께 갔어야 하겠으나, 저기는 영 적당한 곳이 아니라는 느낌도 그렇고, 진짜 이런 비공개클럽의 회원이 된 적이 없기도 했거니와, (나는 종종 저 안에서, 어쩐 일이냐는 다른 상원의원들의 놀란 시선을 받았다. 잡역부조차 나보다 더 환영을 받았다) 거기 도달하려면 모든 뉴스 기자들이 얼쩡이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상원 대통령실을 지나야 했다. 전설에 따르면, 최상의 뉴스 원천은 항상 “방광 약하고 심지는 굳은” 상원들이었다-방광이 버번으로 약해졌을 때는 더더욱이나 그렇다. 그곳에 상원의원들이 -알 움켜잡고 서둘러 지나면 웃고 있는 여성 신문기자들도 있었다. 내게는 정말 수모였지만 대부분 상원들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고, 그 악평을 즐기는 듯도 하였다. 간석지 석유법(Tidelands Oil Bill)의 논쟁 중에, 린든 존슨이 젊은 사교계 여류명사 기자에게 붙잡혔고 인터뷰에 동의하였는데 그가 오줌 누는 동안 들어와서 그의 곡괭이를 잡고 있으라는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짐작건대 그녀는 그렇게 했나 보았다. 그해의 특종. 아니, 소변기에 “아가씨, 방금 분유정 터트렸구만!” 발언했다는 말이 있었으니까.
호머 케이퍼하트가 클로크룸에 들어왔고 큰소리로 동베를린에 노동자 폭동들이 와해된 일을 두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처음에 체코슬로바키아, 이젠 이것까지!” 쏘아붙이며 주의 깊게 내 쪽으로 노려보았다. 호머는 오늘 평소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 충분한 이유가 있다. 오늘 오후 빌 노우랜드가 규제법들을 민주당 따돌리고 통과시킬 수 있다면 발언대에 나가, 이를 방어하는 일은 케이프하트의 의무일 것이다. “왜 이런 일을 기회로 삼을 수 없는 건가요?”
속으로 수수께끼 미소로 보이길 바라며 웃어 보였다. 눈에 띄는 것보다 장막 뒤에 진행되고 있는 일이 더 많기 마련이라는 암시의 뜻으로. 하지만 사실 나 자신에 상당히 실망했다. 한 3개월 전에 나는 스탈린이 중풍을 앓고 있다는-그가 중풍만 앓는다면야-그리고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때가 기억났다. 날이 으스스했다. 수도가 중유럽의 도시처럼 보이는 그런 우충충한 3월 아침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일단의 젊은 사내들이 일찍 대통령 집무실에 모여, 어르신네 내려오길 기다렸다. 그는 성큼성큼 황갈색 폴로코트를 입고 갈색 모자를 쓰고 걸어들어왔다. 챙을 눈 위까지 쑤욱 내려 써 연안경비 임무에 나선 해병 같았다. “그래,” 빽 그가 소리를 질러 화들짝 놀랐다. “우리 이 일을 어떻게 할까?” 그래서 우리 몇 가지 생각 짜내었고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때 일이 이렇게 되었다. 불만과 좌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치들 몇은 확신이 흔들리는 게 번연히 보였다. 개중 많은 이들이 선거운동 전술로 엉클 샘의 취약성을 매도했지만 아무도 진짜로 이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 자신이 직접 보게 되었다. 엉클 샘이 뒷짐만 지고 오도가도 못하게 될 수도 있구나.
“우리에게 시간을 줘,” 내가 말했다. “변수가 많아 힘든 경기야. 하지만 우리는 구석에 몰았어, 끝장의 시작이야. 씨는 이미 뿌려놓았지, 그들 자유의 맛은 보았고 금방 이를 잊지는 못하겠지. 조지 험프리 말마따나, ‘아침에 암탉 알을 품게 했다고 점심에 치킨 샐러드는 못 먹어!’” 문뜩 이 말에 내가 쫄쫄 굶어 몹시 허기진다는 생각이 났다. 호머는 뜸직이 고개를 끄덕이고, 두루뭉술 어깻짓을 하고, 시선을 돌렸다. 우리에게 합류했던 허먼 웰거, 수긍이 쉽게 안 가는지, 시큼하게 트림을 했다. 그는 저기 하원에서 돈 휠러가 더글러스 대법관이 “완전 혼자서 권한을 휘둘러 두 명 증거 또렷한 스파이에게 사면을 허락해” 격분했다고 그래서 탄핵 제안 초안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버크 히켄루퍼가 소파에 편히 뻗어 기대고 앉아 아침 우편물을 훑다가 올려다보고서, 그 버터넛 호박출신 완전히 깔끔히 발라버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마 나는 보조원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샌드위치 사러 보내게.
엉클 샘은 버닝 트리 골프 클럽에서 우리 마지막 매치 동안에 실제 이런 위기 대비해 나를 준비시켰다. 하지만 나는 이해하지를 못했다. 다 받아들이지 못했는지도. 그가 많은 것을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음을 이제 알겠다-역사에 관해, 유죄와 무죄에 관해, 죽음과 재생, 전체 나라의 안전과 세상 곳곳 자유인들의 대의에 관해-하지만 너무 투명한 내 무지에 너무 무안했고, 우연히 일치하는 기념일과 망쳐버린 드라이브에 너무 속상해서, 또렷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아마 한시적인 충격 상태에 있었던 모양이다가 가장 적확한 묘사이리라. 나는 아이젠하워가 잘하는 질책 중 하나의 본뜻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사실 그 자신은 주의를 기우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항상 직업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네 자신에 대해서는 그러지 마라.” 그 기념일 언급도 잘못 해석했다-모든 판사들이 심적으로 신비주의자라고 말할 때, 나는 더글라스가 아니라, 카우프만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버렸다.
십사 년. 십사 년 전 오늘,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에설 그린글래스는 결혼했다. 14년 전 같은 여름, 히틀러와 스탈린이 그들 협정에 조인하였다. 그렇다 혼례가 많은 한 해였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장악하였고, 단치히를 합병했고 폴란드를 침략해, 이를 스탈린과 분배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는 그들 자신의 오래 가지 않는 결혼을 축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에 패트에게 구애를 하고 있었고,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 없어, 내 귀 바로 옆에서 무너져 내리는 세상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 얼마나 멀리 느껴지던지!) 나는 쿠바로 가서 부자가 되겠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뉴욕세계 박람회 개막식에 가리라, 혹은 오렌지 주스를 얼려 회사를 시작하자 이런 생각을 했다. 패트를 쟁취할 수만 있다면. 쉽지 않았다. 내가 청혼하자 나를 비웃었고 사람들 앞에서 나를 놀려, 끔찍이도 창피했다. 그녀는 쌀쌀맞기가 짝이 없었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감당하는 일뿐이었다. 그녀는 자꾸 나를 밀어내려고 들었으며, 다른 사내들과 데이트하러 로스앤절러스로 자신을 태워달라고 했고, 2년 동안 나를 쥐락펴락하더니 마침내 항복했다-그때도 그녀도 나이를 많이 먹고 내가 주변에서 여전히 진짜 가망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굴복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그녀를 차지하는 한 상관없었다. 나는 승리가 필요했고 그녀는 일등상이었다. 나는 챔피언처럼 느껴졌다-브라운 보머(헤비급 챔피언)이 된 듯했다. 우리가 결혼하던 전날 밤, 그는 아추로 고도이를 찢어발기고 신문들이 이야기하듯이, “진홍색”으로 갈라버렸다. 이는 1940년 일이었고, 딱 1년 후에 로젠버그 부부가 결혼했다. 많은 일이 세상에 일어났지만 우리는 이를 감지하지 못했다-패트와 나는 어쨌거나, 그랬고, 로젠버그 부부는 어땠는지 알 수 없다. 물론, 패트는 항상 뉴스와 관련이 되는 일들은 회피를 했다. 그녀가 읽은 신문은 유일하게 그녀가 가르치는 고등학교의 아이들이 편집하던 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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