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2 - [그외(뻘짓)/the Public Burning] - the public burning p127~
대부분 블로크의 실수들은, 사실, 겁먹고 허둥대고 있음을, 자칫 한발 잘못 움직이면 모두 가라앉는다, 암시했다. 요컨대 로젠버그 부부는 실제로 유죄임을 암시했다. 틀림없이 뻔했지만. 그들을 보기만 해도 된다. 엉클 샘이 말했듯이: 그들은 죄의 악취를 풍겼다. 그들의 오만함, 어설픈 거짓말, 수정 제5조 뒤로 숨어 증언거부하는 행위, 그들이 인정하려 들지 않아도 명백한 공산주의자들과의 고리들, 그들의 아첨과 아부, 핑계로 꾸며낸 나쁜 건강 넋두리, 단순한 사실들도 자주 “소환”하지 못하고, 눈길 끄려는 모든 정치적인 행위, 증언석의 증인들을 관찰하는 상당한 경험에서 내가 배운 바로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무언가 감추려고 드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그들은 대체로 과장 행동을 하고, 사건을 부풀렸다. 그들이 증언거부하는 방식조차 무고한 사람이 원칙 하에 이를 취하는 방식과 달랐다. 앨저 히스처럼, 그들은 속이 뻔한 기만적인 행동, 그들의 거들먹거리는 부정, 결백한데 상처받는 양 부리는 허세들로 스스로 목을 매었다.
일부 그들 증언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듯한 부분은, 물론, 그들이 스스로 끼워 맞춘 가짜 역할이었다. 평범한 중산층 미국인 커플, 낭만적이며 근면성실하고, 자애로운 부모, 기만적이며 비정상적인 동생이 누명을 씌웠고, 괴물 같은 주정부관료들이 뒤를 대고, 무슨 아연실색할 오류로 희생자가 되었다. 줄리어스는 신사복을 입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모든 규칙에 순종했다. 비록 빨갱이로 의심을 사 군대 관련 일에서 한번은 해고당한 적은 있어도 어느 법도 어긴 적이 없었다. 에설은 입술을 볼쏙이 내밀고 패트처럼 직물 외투를 입었다. 아이들은 깔끔하게 머리를 깎았고 얼굴을 문질러 씻었다. 줄리어스는 턱을 항상 치켜들고 있었다. 에설은 증인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혼동으로 제정신이 아닌 그들 동생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세이폴의 몰상식하고 예의 없는 말장난에 충격을 받았다. 철망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손을 잡고 서로 키스했다. “우리 생애 내내, 우리는 품위 있고, 건설적인 삶을 살았다…” 에설은 국제 공개출판문에 썼다. 그들은 아마 무의식적으로, 아주 고맙게 여기며, 그들의 체포 후에 이런 중산층 상투적인 삶으로 옮아갔는데-나는 그들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위안과 보호를 잘 이해했다-하지만 그들은 이를 어색하게 걸치고 있다. 줄리어스는 뻣뻣한 파란색 정장을 입고 파랗게 질린 얼굴의 자동기계처럼 움직였다. 배심원단은 에설의 법정 침착함을 “강철같다” 그리고 “돌처럼 차갑다”고 했다. 그들은 잘못된 종류의 친구들을 갖고 있어서, 대학시절 연을 맺어 여전히 그들이 신의를 지키고 있는 시끄러운 좌익파들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 친구들이 귀를 바싹 기울이고, 배반하는지, 영웅적인 면모에서 조금이라도 못 미치면 경멸조로,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서, 그들은 그저 부르주아 연기를 정직하게 해낼 수 없었다. 줄리어스가 “귀하,” 말을 할 때마다, 풍자인가 의심을 받았다. 그들은 증인석에 공공연히 선뜻 나서서 서는 모습이나 모든 혐의에 대범하게 부정하는 일이 아주 인상적이었지만 이데올로기적 질문에 증언거부를 하는 일은 그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었고 지속적인 정당의 정통파임을 시사했다. 한편 그들 목소리 깊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억누를 수 없는 비미국인 말씨, 3등선실 승객과 봇짐 도부상의 시큰둥한 주절거림 녹아 흘렀고, 제대로 된 영어를 말하지 못하는 부모 아래 영민한 아이들의 현학적인 정밀함으로 간신히 숨겼다. 유권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속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 이들의 역할-연기 뒤에 진짜 로젠버그 부부는 누구였던가? 아마 결코 모르리라 FBI 보고서에 포르노그라피와 신파조 과장된 행동에 취향을 있다고 넌지시 비쳤다. 그들 아파트는 싸구려 고물이 채워져 있고, 그들은 비인습적인 삶을 사는 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패트와 나는 어떻게 말을 걸지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들은 어떤 체계도 없고, 뿌리도 없이 살며, 그래도 어디라도 성과를 거두는 데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짐타운 내 멕시코인 빈민가로부터 나오는 강 건너편에서 자랐고, 그래서 빈민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았지만, 빈민가에서 사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왜 사람들이 그냥 이사를 나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상력의 결핍이나 그런 일. 거기 끔찍한 삶, 그들은 수많은 난폭한 괴롭힘을 당하고 살았다. 에설은 막 열여섯 살에 나가서 직장에 지원했고 경찰 소방호스에 맞아 녹다운이 되었다. 그녀의 빈민가 과거가 그녀를 뒤쫓았고 그녀의 극장계 출세에 좌절감을 주었다. 나 역시 캘리포니아 촌구석 과거로 뉴욕시 법률가로 출세하길 바라던 마음에 좌절감이 들었던 것과 똑같다. 줄리도 많은 벌을 받았고 더 나쁜 상황도 겪었다. 그는 대학에서 좌파가 되었지만 대부분 우익들은 유대인 박해자이던 그 당시에 빈민가 출신 유태인은 좌익이 아니 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내가 휘티어 대학에 돌아온 것처럼 그로서는 관례를 따른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젊은 번드파(유대인 사회주의 운동) 폭한들이 슈어드 공원에서 체스를 두는 수염 기른 늙은 유대인들을 두들겨 패는 모습, 인종살해에서 총 맞는 흑인들을 보았다. 그는 어느 밤 유니언 스퀘어 근처에서 갈색 상의를 입은 두 남자가 길을 막고 CCNY가 무슨 뜻이냐고 그에게 물었다. “뉴욕시립 대학교(City college of New york),” 그들에게 말했다. “아녀!” 그들은 웃으면서, 그를 보도로 밀쳤다. “Christian College Now Yiddish라는 뜻이지!” 그런 뒤, 일이 줄을 이었다. 좌파 친구들에게 그들은 계속 충실하였고 그 친구들은-말하자면 그들의 지지층-그들을 존중했고, 어느새 세월이 흘러, 전쟁을 하고 있는데, 공산주의자들이 놀랍게도 우리 동맹들이었고, 줄리어스는 군대를 위해 일하고 있고 에설은 핵폭탄 프로젝트로 나가 있던 남동생이 있었고, 다른 공학기술진 친구들은 비슷하게 흩어져 있었다-그러니 요청이 들어왔다고 가정해 보자. 어떻게 안 된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대학 시절의 공공연한 활동에서 벗어나서 전율 흐르는 이단의 바로 그 중심으로 철수하는데, 왜 안 해? 어쨌거나, 아주 다르지 않은 우연한 상황의 사슬을 따라 나는 미국의 부통령이 되었으니 한 가지 일에서 떠돌아 다음 일로 접어들고, 그들과 흡사한 욕망을 따라, 일의 핵심에 다다르고, 깊이 삶에 참가한다.
아마 줄리어스는, 나처럼, 어떻게 그의 어머니로부터 이런 특질을 물려받았으리라. 소피는 열넷의 나이에 미국에 왔고, 하루에 열한 시간씩, 일주일에 6일을 한주에 팔 달러 받으며 일했으며 그 돈으로 어떻게 저금을 해 폴란드에서 어머니와 네 남동생들을 데려왔고, 그런 뒤 해리 로젠버그, 동료 일꾼과 열여덟 살에 결혼했다. 그들은 대담하고 낭만적이었고, 옛날 폴란드 문화를 완전 사랑했지만 지지리도 가난해, 브룸즈 거리 5층 셋집 꼭대기 층에 살았는데 여기 지붕이 샜고 겨울에 고드름이 천장과 창문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 아버지처럼, 해리 로젠버그는 계속 가게를, 드라이클리닝 사업을 유지해 나가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극도로 비참하고 빈곤한 처지로 떨어졌는데 그러다, 근면과 집념을 통해 식량배급 줄과 무료 급식소를 뚫고 강력하게 맞서 싸워 가족들에게 증기난방이 되는 아파트 한 채 마련할 여유의 지점까지 이르렀다. 해리는 사회주의자인 점만 빼면 호레이쇼 앨저 이야기에서 나온 그런 이야기같다. 옛날 모자챙의 머릿니처럼 구세계에서 날라온 팬텀 씨앗. 또한, 유대교는 앨저 주인공들의 지배적인 믿음이 아니었지만, 이런 점에서 로젠버그의 정통파 신앙과 헌신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줄리어스는 소년 시절 자신의 종교에 아주 심각했다-우리는 이를 공유했다-게다가 그는 철저한 근본주의자였다. 유대교회당에서 그들은 그를 “요나”라고 불렀고 청년 유대교회당 단체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크리스천 인데버에서 나처럼. 그는 강습을 이끌었고 랍비가 되는 일도 고려했다. 어머니가 항상 내가 퀘이커 선교사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던 일과 꼭 같다. 그는 나보다 어리고, 내가 열두살 때 죽은 아서, 내 막내 동생뻘의 나이였다. 줄리어스는 시력이 나쁘고, 툭하면 알레르기들과 갑작스럽게 병에 걸리는 허약한 소년이었고 열 살에는 터진 충수로 거의 죽을 뻔했다. 그 딱 1년여 전에 나는 파상열(브루셀라증) 심한 발병에 시달렸고 그는 천식과 다른 정신신체 질환들로 고통받았다. 2차 세계 대전에서 빠지고 그의 스파이 임무에 들이게 되는데-그는 민간기업이 제조하던 육군 통신부대용 전자 제품들의 조사관이 되었다.-하지만 그의 징병유예에 나는 열을 받았다. 그는 독일에 있던 불쌍한 동료 유대인들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나? 어쨌거나 이게 누구의 전쟁인데? 그가 재판에서 편지에서 말했던 수많은 말들이 내 혐오감을 유발했지만, 최악의 일 하나가 그가 러벌리(기상나팔)을 탶스(소등나팔)과 혼동하던 때였다. 물론 나는 고초열로 나 자신이 고통받았지만, 내 문제는 엄격하게 신체에 국한되었고, 나는 해군에 어쨌든 입대했다. 그의 문제는, 그가 아팠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작은 소년이었을 때 시작되었고 아마 그의 어머니는 그와 함께 밤에 불을 켠 초를 들고 화장실에 가야 했을 것이다-화장실은 불 없는 아래 복도에 있고 그는 어둠을 두려워했다. 그 층의 모든 이들이 쓰는 냄새 고약한 장소. 쥐가 벽 뒤에서 바스락거리고 현관에는 취한 사람들이 대자로 누워있다. 아마 그들 한 명은 지금 변기에 잠들어 있으리라. 아니면 칼을 쥐고 있거나. 과거 부모님 침실에 지내던 밤에 나는 아버지가 나를 아기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그 문을 통과해 발을 디디면 깊은 구멍에 떨어지리라 두려워했다. 어머니는 화가 나서 서두르라 재촉했다. 수지양초가 낮은 의자에 뚝뚝 떨어졌다. 시작할 수가 없었다. 뭔가 아래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시작할 수가 없었다. 내 죽은 동생이 벽 뒤에서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놀라 벌떡 일어섰다. 내가 어디 있었더라?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무실은 비었다. 서류들만 주변에 흩어져있었다. 아 맞다, 로젠버그 부부…. 나는 흐릿한 눈으로 어지러운 쓰레기들을 죄 응시하며, 패트가 집의 아이스박스에 무엇을 담아 두었을까 궁금증이 들었다. 난장판이 따로 없다. 누군가 지금 여기 들어와 이와 같은 나를 본다면? 생각했다. 적어도 꼿꼿이 똑바르게라도 앉아 있자, 뭔가 생각하고 있는, 집중하는 모습으로 보이게. 스파르타인의 외모. 하지만 너무 지쳤다. 등은 뻣뻣하고 엉덩이가 아팠다. 너무 오래 앉아 있다가 물집이 생겼을까 궁금했다. 아니 종기나-누군가 유명한 이에게 그런 일 있지 않았나? 늙은 내 엉덩이 옛날 그랬던 만큼 강철적이 아니야, 벌떡 일어서서 오줌을 누러 비틀비틀 가며 골똘히 혼잣말을 했다. 이 말에 미소를 짓고 큰소리로 되풀이했다. “늙은 내 엉덩이 예전만큼 강철적(아이러닉, ironic)이지 않아…” 입 밖에 내고 보니 웃긴 것 같지 않았다. 재판에서 세이폴의 말장난처럼. “‘러시아 장사’이라고 하였어요 ‘번창한 장사’라고 하셨어요?” 블로크조차 이를 재미있는 척했고 카우프만 판사는 “또 다른 밀튼 벌리가 되겠다는 욕망은 자제하도록 하세요,” 말했다. 꾸짖는 소리를 들릴 수 있지만 사실 관대한 찬사여서, 그 자신과, 코미디언, 세이폴 사이의 애정어린 관련성을 짓고, 판사, 배심원, 변호사들, 관중, 바깥세상을 통합하기 위해 아우르는 유머 속에 담아내었다-따돌림 당하는 두 명 피고인들 제외되어, 그래서 갑자기 더욱더 고립되었다-한편 동시에 카우프만의 이전 고객과 오래된 친구들 한 명인, 미묘하게 엉클 밀티를 위해 살그머니 조금 홍보도 겸하고, 그를 미국식 위트와 유머의 그 전형으로 추켜세웠다.
나는 냉장고를 다시 체크했다. 마흔번 째. 빈 여송연 상자, 빈 코티지 치즈 갑, 반 남은 케첩통, 거의 비어가는 메이플 시럽 깡통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시럽의 뚜껑을 벗기고 이를 기울였다-아래로 흘러내리는데 엄청 시간이 걸렸고 얻은 것이라고는 한번 핥고 오래 퀴퀴하게 남은 맛이었다. 깡통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죽은 세포를 흔들어 깨우려고, 이 일을 끝판을 내고, 결론을 내리고, 깨끗이 치워버리기에 충분하게 정신이 들도록, 몇 번 다리굽혀펴기를 했다. 늦었다. 아주 조용했다. 사실 으스스했다. 아주 멀리서 목소리가,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다, 국립미술관 오케스트라가 이번 주에 올드 사우스 (Old South 13개주 중 남부 식민지)를 경축하는 무슨 새로운 작품을 공연하고 있었음을 알았지만, “오늘 밤 포토맥에 모두 조용하게 혼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런 공연하기에 너무 늦었다. 아마 시위자들이리라. 그들은 캐피탈에 일주일 내내 잠입해 들어왔다. 관대처분 밤샘이 오늘 밤 오드 펠로우즈 홀에서. 저 밖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집에서 침대에 들었어야 했다. 내각 모임이 내일 아침 일찍 있었다. 하지만 실제, 사실을 말하면, 나는 밤새 지새며 깨어 있는 일을 좋아했다. 찾아 가던 종루가 있던 고등학교 시절 든 습관이었다. 나는 공중에 떠도는 뭔가 압력이 있는, 항상 밤에 더 효율적이었고, 나는 내 주변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걸 좋아했다. 카우프만도 분명 그랬다. 그는 스트레스받는 동안에 밤에 오직 90분만 잔다고 툭하면 뻐겼고, 그는 하루에 몇 번씩 회당에 방문했다. 아마 명상적인 토막잠을 위해서겠지. 나는 하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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