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부통령의 수염 The vice presdient’s beard
그날 아침 면도를 하며, 시간 못 맞춰 내가 백년 늦게 태어났구나, 생각했다. 이 망할 수염 자라는 대로 두면, 나는 율리시즈 S. 그랜트처럼 보일 것이다. 그럼 더이상 사기꾼 법인 변호사니 중고차 외판원이니 말들은 돌지 않으리라. 나는 내 수염 위로 도끼눈을 하고 내가 꿀리는 대로 다 말할 수 있고 모든 이들이 귀담아 들을 것이다. 검은색으로 풍성하게, 성베드로나 헨리 8세처럼, 아니면 휘트 뭐라는 사람처럼. 월트 휘트먼. 생채기가 난 코와 앞이마가 오늘따라 유난히 인상이 흉악해 보였다. 화장실 거울 속 나 자신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크아아앙! 미인과 야수, 결혼하기 전에 패트와 내가 하고 놀던 게임, 나의 비밀스러운 자아. 그녀는 재미있다고 생각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내 머리카락을 헝클고, 눈알을 부라리고, 턱살을 흔들고, 그리운 옛 시절이다. 나는 그때 항상 웃음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쪽으로 열심히 노력했으면 나는 제 2의 잭 베니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나는 실제로 그 당시에 두서너 번 수염을 기르기 시작하였고, 항상 남부끄러워, 남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밀어버렸다. 그럭저럭 말쑥 단정하고 빈틈없는 눈매, 그런 초점에서 조금 벗어나는 일-못 미덥긴 해도 늙은이들의 승인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하루이틀 그루터기 수염이 자란 뒤에 내 모습처럼 무책임한 붉은 눈의 회색곰 부랑자로 바뀔 거라는 두려움도 한몫했다. 수염으로 다르게 움직이고 다른 일들을 말하고, 좀 더 냉소적이며 무심하리라 다들 예상을 하게 되어, 나는 내 손과 눈썹과 입술에 의식이 쏠렸다. 나는 일요일 밤에 법전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있을 때 그런 사람처럼 보여도 되지만, 월요일 아침 수업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다 부지불식간에, 지방 검사가 되었고, 지역 사회의 모범을 보여야 했고, 전쟁 중에 OPA 공무원이 되었고 곧 미해군에서 하급 사관이 되었는데, 그곳은 가슴에 난 털이 아니면 털이 임질보다 더 눈총을 받는 곳이었고 해군에서 전역하기 전에 이미 나는 의회에 출마 일을 하는 상태였다. 그것으로 나의 공개적인 얼굴이 정해졌다. 이를 바꾸면 표를 잃었고, 나는 더 이상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후보자가 하는 말보다 어떻게 보이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익어 친숙한 것이다. 우리의 흔치 않은 휴가조차도 공개석상의 등장이 되자, 수염은 마음에서 지웠다. 아침에 면도할 때 가끔 빼고. 언젠가 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링컨처럼. 어떤 어린아이에게 나에게 편지를 써서 제안했다고 하고. 그러면 텔레비전 화장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카메라에 나오기 30초 전에 면도를 자주 하는데도, 분을 바르지 않으면, 여전히 수염이 또렷이 보여 사람들이 이를 두고 나에게 편지를 쓴다. 5시 정각 유령. 내 적들은 어떤 일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우려했던 대로 나는 잠 못 드는 밤을 보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런 시기에 자극제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았지만, 그 순간 몸이 너무 나른하고 몽롱해서 면도기와 얼마나 가까운지 또렷하게 보이지 않아서, 나는 느낌으로 밀어야 했다. 자신을 너무 세게 밀어붙이며 비축 에너지까지 모두 소모하여 나는 영 취약하였다. 그 모든 불안한 유령들, 나 자신의 삶이 아닌 곳에서 나온 그 이미지들.…마치 어젯밤에 이질적인 유전자처럼 뭔가가 나에게 들어왔는데 그것을 막아 떨쳐낼 힘이 부족한 것 같았다. “내부 와해 공작”에 대한 나의 조기 경고 미사여구들이 전부, 갑자기 이해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그렇게 벽에 얼굴을 박은 일은 정말 바보같은 일이었지만, 어찌 보면 좋은 일이었다. 그 덕분에 머리가 맑아졌고, 차에 도달했을 쯤에는 그린글래스 부인의 부풀어 오른 배와 닭과 딜런시 거리의 교통 상황에 대해 거의 잊어버렸다. 부드러운 여름 야간 외출 그리고 어깨 위의 초승달, 나는 창문을 돌려 내리고, “마음의 고통”과 와 “속삭이는 희망”과 같은 오래된 노래를 틀고 있는 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인디펜던스 대로를 미끄러지며, 조금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집으로 둘러가는 먼 길을 택하고서 마음을 나 자신의 과거에서 난 안심할 수 있는 그림들로, 오래된 영화처럼 내 안에서 진동하는 나의 소년 시절로 가득 채웠다. 내가 물놀이를 하러 갔던 요바린다의 애너하임 유니언 수도회사 개천, 부활절 달걀과 5월 바구니, 검프 가족의 모험 만화책, 크리스마스 때 할머니의 크고 꾸밈없는 집, 우리 집회소 첨탑에서 울려 퍼지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 린드버그의 비행과 이에 관해 우리가 수집한 그 모든 사소한 것들, 학대받은 개가 화자인 책을 읽고, 햇볕이 잘 드는 현관에 걸어두었던 청미래덩쿨 양치식물 바구니들, 포 스퀘어 복음회당과 베리 그랜드 안에서 말에서 빙글 굴러 내리는 켄 메이너드 …젠장! 나는 정말 기막힌 삶을 살았구나, 생각했다! 나는 철도 소방관 놀이를 하고, 학교에서 국기에 경례하는 법을 배우고, “올드 블랙 조”를 노래하고, 「지식백과」 책들을 코를 박고 샅샅이 읽고, 에머슨의 “눈에 묶여” 연을 외우고, 제인 이모의 피아노로 “페르시아 장터에서” 치느라 악전고투를 벌이고, 투손의 여름 더위에 땀을 흘리고, 엄마 대신 감자를 으깨던 기억이 났다. 나는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감자 으깨기를 잘했고 엄마는 나는 덩어리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흡족해했다. 다른 소년들처럼 위아래로 움직이지 않고 휘핑 동작을 사용하여 나는 으깼기 때문이었다. 내가 스미소니언 박물관을 지나 워싱턴 오벨리스크를 빙 돌아 차를 몰며, 이 감자를 으깨던 일이 기억이 났는데 그것은 일종의 공현公現같이 느껴졌다. 마치 휘티어 대학에서 거의 3일을 내리 못 자고 일어나 있던 때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어느 날 아침처럼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때, 메릴랜드에 있는 휘태커 챔버스의 집 현관 베란다 낡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그 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맞아 들고 있다는 따뜻한 느낌이 나를 휩쓸었던 그때 같았다.
그때 그 느낌이 맞다고 생각했고, 이런 느낌을, 나는 이에 항거하지 않았다. 역사가 거침없고 냉혹하지만 친절하게도 나를 위해 일들을 풀어나간다는 느낌. 내 남동생이 병에 걸렸고, 어머니는 일과 걱정으로 부담이 과중해 나를 반년 동안 제인 이모와 함께 살라고 보냈다. 나는 이 일이 몹시 싫었고 왠지 속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제인 이모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피아노를 배웠고, 그 이후로 피아노는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내가 어머니를 따라 애리조나로 갔을 때도 똑 같았다. 어머니는 해롤드를 거기 요양소로 데려갔는데 요양소에서 요리하고 청소하는 일로 병원비에 보탰다. 괜히 따라가 도움은 안 되고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었다는 죄책감에 프레스콧 로데오 쇼에서 마구간 청소 일자리를 얻었다. 나는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마굿간 일도 철저히 했기 때문에 그들은 나에게 행운의 바퀴 앞에서 소리치며 호객꾼 일도 맡으라고 요청했다. 내가 발견한 바로는 이는 뒷방에 주사위와 포커 테이블로 유인하는 바람잡이었지만, 나를 세워놓은 앞쪽 모든 것은 합법적이었고, 경품은 진짜 햄과 베이컨이었으며, 나는 시간당 1달러를 벌었고 내가 몰고 오는 모든 실적에 노인들로부터 칭찬도 받았다. 여러 면에서, 버는 돈과 상관없이 이 일은 내가 해본 일 중 최악이었다. 매일 몇 시간 동안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긴장했고, 그 군중 속에 있는 몇몇 사람들은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이건 완전 시간 낭비라고, 나는 생각했다…그러나 그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지난 가을 소위 비자금에 관한 뉴스가 터졌을 때 전국 잠깐씩 기착하며 돌던 선거 캠페인 투어의 잔인함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운명. 아버지는 1922년에 주유소를 열기로 결정하셨다. 산타페 스프링스에 주유소 자리를 잡을 수도 있었지만 이스트 휘티어에 있는 주유소를 선택했다. 다음 해에 산타페 스프링스 부지에서 석유가, 그것도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우리는 백만장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그로 인해 아버지는 궤양 출혈을 시달렸지만, 나에게 백만장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중심에 선다는 일이 만사 가장 중요했고, 이는 균형이 깨질 만큼 과잉으로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다만 힘은 제외하고. 내가 알기로 힘은 전기처럼 우주에 존재하는 뭔가 그런 것이었다. 안내하는 지도자가 될 이유가 없었다. 되지 않을 이유 또한 없었다.
나는 타이달 베이슨(Tidal Basin조수 독)을 둘러 링컨 기념관을 향해 빙 돌아서 포토맥 강을 따라 록 크릭(Rock Creek)으로 향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오래된 노래들을- “혹시 꿈이 걸어다니는 것을 본 적 있나요”… “나와 내 그림자”— 틀어놓고서, 모든 옛 감정, 옛 장면, 옛 꿈이 떠오르는 대로 두었다. 패턴은 없고 그저 향수 어린 달콤한 기억의 흐름이었다…집에서 만든 아이스크림을 먹는 교회 소풍…바이올린 케이스 안 진한 냄새…터니와 뎀프시 시합, 그리고 아일랜드의 반란(아버지가 반란에 반대해 얼마나 격노를 하시던지! “하지만 우리도 아일랜드인이 아닌가요?”라고 나는 물었다. 그는 “그런 종류는 아니야!”라고 호령했다)… 우리 집에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인쇄 그림, 내 생각에 “발산 광”이라고 불리는 에디슨 전구 광고였는데, 한 소년이 연한 장밋빛을 보라색 바위 위에 녹색 풍경을 뒤로하고, 여름 나무가지들 사이에서 빛나는 전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고 있을 때 그러듯이 저 위에서 신을 찾고 있는 게 아닐까 추측했는데… 아니면 거기에 소녀가 앉아 있었나, 잊어버려 정확히 잘 모르겠다. 강의 수문들을 지나느라, “시그마 치의 연인”이 먼 라디오 방송국에서 잡혔다가 나갔다가 하자, 나는 갑자기 프레드릭 마치가 지킬 박사에서 하이드 씨로,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변신하던 일이 완전 세세히 떠올랐는데, 그래도 어째서인지. 「우리 생애 최고의 해」가 조금 뒤섞였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는 아마도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위대한 영화이긴 하지만 내용 상당 부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다 가버렸구나. 휴전 퍼레이드와 서커스, 영화 「가솔린 골목」에서 월렛이 문간에서 아기를 발견하는 장면, 입체경을 통해 본 그랜드 캐니언, 볼셰비즘에 대한 두려움, 일요일 밤 공려회 모임에서 보았던 이상한 빛, 1924년 우리집 새 라디오에서 듣던 월드 시리즈 그리고 내가 14살이었을 때 60개 홈런을 친 베이브 루스. 하지만 대부분 학교 추억, 야구 게임, 여자아이들, 동아리 활동, 자전거 타고 달리기, 집에 있는 물건들, 주유기를 쥔 아빠의 마디진 손, 아빠가 옷을 차려입었을 때 튀어나와 보이던 귀, 학교에서 뭔가 집에 가져올 때 엄마의 미소, 형 도널드와 벌인 싸움들, 해럴드의 짓는 듯 마는 듯한 미소, 아버지가 어느 날 집에 오셔서 병원에 작은 인형, 진짜 살아있는 인형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일 – 불쌍한 아서, 너무 어려서 죽었다. 나는 언제 한번은 아서에 관해 학교 작문을, 일종의 비가를 쓴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내가 지치고 걱정이 앞서면, 살아야만 하는데 살려는 노력을 거의 그만두고 싶을 때면, 위로 올려다보고 반짝이는 눈과 곱슬머리를 가진 소년의 사진을 본다. 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기도를 기억한다 — 만약 제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죽게 된다면, 주님, 제 영혼을 거두어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제 형제 아서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에게도 진실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A를 받았다. 아서의 A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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