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빛이 강한 대낮에, 마흔 살의 목에 난 짧고 뻣뻣한 털을 긁으며, 갓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어제 시련의 땀을 안전하게 하수구로 흘려보내며, 어젯밤 그러한 연상들 중 많은 것들이 그 당시 그랬던 것보다 악의가 없어 보였다 나는 휴식도 영양분도 없이 너무 오랫동안 밀어붙였던가, 기억 인출 시스템의 회로 몇 개 합선이 되어 나가버렸을 뿐이었다. 문들을 활짝 열었더니 구문 경로가 넘쳐버렸다. 사실, 너무 자주 하지 않는다면 재미있을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침대에 죽은 듯이 납작 누워 있는 패트의 생생한 이미지를 들어보자. 나는 이제 그녀가 내 남동생 아서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항상 거기 계셨는데,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속에 착오로 섞여든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일종의 풍자가 들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패트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평화 가슴 모세를 위하여”라고 혼잣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평화, 빵, 그리고 땅은 볼세비키 혁명 당시 내세웠던 슬로건)
또한 어젯밤에 그토록 수수께끼처럼 보였던 뉴욕의 이미지 중 일부가 어디서 왔는지 이제 깨달았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나는 부모님 가게에 일을 도우느라, 이른 아침 시간에 로스앤젤레스의 농산물 시장으로 픽업트럭을 몰고 가서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다시 가게로 가져와서 8시에 문을 열면 판매할 준비를 하곤 했다. LA가 뉴욕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뉴욕에 대한 나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로 뉴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나 같은 작은 마을 아이들에게 뉴욕은 일종의 예루살렘, 엘도라도 같았다. 그림책들이 있었고 신문의 사진들, 뉴스 영화, 입체경, 나중에는 트루-뷰(Tru-Vue) 영화들이 있었고, 위대한 엠파이어 시티(뉴욕 별명)에 관한 온갖 영화들이 있으니 누가 알겠는가? 내 마음속에 있는 스카이라인은 몇 마일 떨어진 헐리우드 스튜디오에서 그은 그림일지도 모른다. 소위 불야성의 거리: 아마도 워너 브라더스의 발명품. 워싱턴 스퀘어. 배터리 공원. 크라이슬러 빌딩과 애스터 하우스. 그리고 로어 이스트 사이드, 다채로운 이민자들의 벌집처럼 북적이는 신비로운 게토, 정말 용광로가 녹아내린 곳. 그렇다, 우리 모두 거기에 가보았다. 나처럼 야구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그곳은 진짜 꿈의 도시, 베이브와 루, 벌리와 레드 러핑이 사는 곳이었고, 존 맥그로와 잭 휘트, 위대한 세 야구팀들이 모두 한 도시에 적을 두었다 — 내가 어렸을 때 양키스 혹은 자이언츠가 거의 매년 월드 시리즈에 들었고, 둘 다 입성하는 적도 적지 않았다. 길모퉁이에서 우리는 뉴욕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처음으로 피아노를 쿵쾅거리면서 배우던 곡 중 하나가 “뉴욕의 인도”였는데, 지금도 나는 그 곡을 연주하면서 내 상상의 산물인 그 도시를 떠올리는 일을 좋아했다. 나는 뉴욕에 관한 책 역시 많이 읽었다. 제목에 뉴욕이 포함된 호레이쇼 앨저의 책이 있었던 것 같다. 어느 가난한 아이의 진짜 아버지가 백만장자로 밝혀지는 그런 내용인데 월 스트리트가 어디인지, 폭락과 빈민 식량 배급줄에 관해 여기서 읽었다. 바로 그렇다, 때때로 싱싱 사형동에서 보내온 텔레파시 메시지 같았던 어젯밤 일에 극성을 떨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질렀고, 그리고 숨은 수염 그루터기들을 검사하기 위해 턱뼈 위로 뺨을 앞으로 당겼다. “보기 좋을 뻔했는데 놓치다.” 타임 지가 말했다. 뻔하다가 놓쳐!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 호모 새끼 오지에 보내고 어쨌든 리더스 다이제스트나, 뭐든 그럴 자격이 있는 잡지에 계관시인 직위를 부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두 드랜시 거리의 대여 무도장에서, 줄리어스와 에설이 노동조합 무도회에서 만났던 곳의 불가해한 “기억”에서 시작되었다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지금, 내 머리 뒤편에서 딸랑딸랑거리는 오래된 피아노 곡조들도 반짝거리는 왁스칠 광대한 마룻바닥, 베일리 가 공원 건너편 휘티어 여성 클럽하우스, 왔다는 기억이 났다. 어머니 아버지는 거기서 결혼했다. 나는 자라면서 그 장소를 수시로 드나들었다-맞다. 구석에 있던 낡은 빅트롤라, 부엌…후에 목가적인 영상들 일부는 입구 쪽에 있던 공원에서 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부엌 석탄 난로를 둘러서서 옷을 입던 아이들. FBI 보고서 하나에서 바넷과 테시 그린글래스가 그들 세리프 가 셋집에서 얻을 수 있는 난방 열기가 그것이 유일했다는 내용을 읽었다-가족은 추운 오후면 난로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였고, 아침에는 이 옆에서 옷을 차려입었다. 보고서에서, 이는 그들이 얼마나 가난한지 보여주고 가난과 불공평성이 “혁명적인 이상주의의 모체”임을 주장하려는 의도였다-다른 말로, 가난한 이들, 그들의 분개를 감안하면, 믿을 사람들이 못 되며, 어떤 문제라도 있으면, 거기 먼저 뒤져보는 일이 똑똑한 일이란 뜻이었다. 당연히 이로 요더 린더에서 우리가 둘러싸서 옷을 입던 난로가 떠올랐다. 엄마는 당시 막내 아서를 임신해 만삭이었다. 내가 마음속에 그렸던 샘과 버니 그린글래스는 혼잡한 인파 속에 내 남동생들 해롤드와 도널드로 착각할 수 있을 것이고 작은 에설의--- 사실대로 말해서, 내 딸 트리시아-와 많이 닮았다.
내가 FBI 보고서 중에서, 나 역시 겨울 아침에 부엌 난로 주변에서 옷을 입어야 했으니까, 내 삶 역시 수상쩍다는 함축을 담고 있다고 분개하고 있었나? 아마도. 하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리 안 내리는 요다 린더, 캘리포니아 푸에르테 아보카도의 나무의 대왕모의 고향인 곳에 살았고 난방이 필요한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우리가 부자는 아니었지만, 결코 원통스러워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바쁘게 살았고 처지가 향상되었다. “자존심, 자기규제, 자제력, 자수성가!” 어머니 항상 이렇게 채근했다. 내가 그 부엌 석탄난로를 기억하는 일도 기이했다. 아주 오래 전 일인데. 꿈속에 등장하는 물건처럼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 소년 시절이후로 불과 몇 년 사이 이 나라가 겪었던 그 변화를 생각하면! 패트가 부엌에 갖추고 있는 엄청난 기구들만 들어보아도, 그렇게 잘 작동하고 있는 데 누가 변화를 원하겠는까? 이들 공산주의자들은 미쳤다. 내가 스위치를 딸칵 켜고 온도조절장치를 조정하고, 차의 시동을 걸고, 비행기에 탑승하고, 자동문을 걸어 들어가고, 화장실 물을 내리고, 턴테이블에서 떨어지는 레코드를 구경할 때마다, 아메리카 사랑하는 마음이 더해갔다. 그리고 그저 물질적인 조국의 진전만이 아니라, 위대한 전통들 또한 사랑하였다. 추수감사절 칠면조와 성탄절 나무처럼. 교회 야유회와 로즈볼 게임. 연례 회중 야구게임. 휘티어 대학 모닥불-누군가에게 시시한 일일지도 모른다. 열다섯 나이에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톰 무니를 위한 탄원서를 돌리고 있는데, 거의 여섯 살 많은 나는 파이어힐에서 연례 달집 사르기 행사 의장을 맡고 있었는데 전통적인 구멍 하나 변소가 아니라, 진짜 구멍 네 개 수집대상품으로 그 화톳불에 올려 새로운 역대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휘티어에 일어난 가장 강렬한 일,”이라고 불렸다-하지만 미국 주류에 조금이라도 이해심을 지닌 사람 누구든 1933년 톰 무니는 주류에서 한참 지엽적이며 똥간으로 꼭대기 왕관을 쓴 불놀이는 정확한 중심임을 알 것이다. 지금 이십 년 후에,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여전히 바깥에 있었고, 사실 그는 어느 때보다 더 추운 곳에 있는데, 나는 엉클 샘과 골프를 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었다. 자신을 건국의 아버지들, 검은 순교자들과 그가 “인민들”이라고 즐겨 칭하는 이들과 동일시하며. 하지만 그의 감방 벽에 테이프로 계속 붙여둔 노랗게 바랜 독립선언서 신문복사본조차도, 아마 그의 죽지 않은 애국심을 입증하기 위해서겠지만 그저 그의 정신이상의 또 다른 징후였다. 선언서는 절대 주류의 일부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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