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뉴욕타임즈로 가는 순례길
도심으로 가는 금요일 아침 통근자들이, 해묵은 그들 관습대로, 거대한 시민 기념비, 뉴욕타임즈 앞에 모인다. 거기 발행에 딱 알맞아 살아 있는 죽은 사람들의 온갖 말들과 행위들로 표현된 「역사의 정신」의 최신 업무들을 교감하기 위해서이다. 돌, 납, 그리고 아연의 커다란 평판 위에, 매일 다른, 다르지만 어떻게 안도감 다지는 익숙한 단어들과 그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마치-우리에게 그 평판들이 이야기하는 것 같다-일정 목적의 불변성이, 비뚤어질 때조차, 인간 대규모 산업의 매일 찌꺼기에 일종의 쉽게 바스러지는 삽화적인 연속성으로 도모하는, 「위대한 불야성의 거리」에서 통하는 말처럼 “취급”하여, 「정신」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같다. 비록 이는 「정신」에 감사할지 뉴욕 타임즈식 기념비적 수화 언어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투르크인 그리스인들에게 급박한 발칸 연대 촉구. 파나마와 프랭크/영화에서 케이를 보다. 서부 완두콩 판매 편파혜택 반박. 일견 사냥의 마술, 무시무시하게 흘러드는 유동에 대항하는 부적이다. 사람들은 오직 기습들만 두려워하니까. 신성한 이름이 브루클린에서 행진하다.
누군가 허기를 이미 채웠고, 누군가는 기념비 앞에서 지금 한다. 진지한 경우에 적절한 상징적인 음식들을 먹는다: 달걀, 훈제 살육, 살아 있는 생명체의 씨앗들, 제 꼬리를 문 베이글과 도넛들. 퉁퉁 부은 ---에서 얻은 자양물, 해군 내 법집행국 지지하는 상원 그룹. 「영국 여자들이 전진한다」, 제작자들 메리 마틴을 뒤쫓다. 의례행사처럼 철로에 윙윙거리는 바퀴소리, 찰칵거리는 회전문들, 공손한 웅성거림과 부스럭거림이 있고, 규칙적으로 갑작스럽게 터지는 경적과 호루라기로 강세를 준다. 공기제동기의 쌕쌕 소리, 코 푸는 소리, 그릇 짜그락 소리와 문이 탕탕거리는 소리, 표를 요구하는 한 남자, 중공 여섯 U.N. 지점을 찌르다. 「우유배달원이 미끄러지고 있다」. 종교 자유 주간 돌아왔다, 처형된 독일/일 없는 도장공. 숭배자들이 평판 사이로 정연하게 움직이며, 빵을 찢어 나누고 뜨거운 흥분제들을 홀짝거리고 전통적인 반응들을 중얼거리고, 콧방귀 뀌고 방귀 뀌고, 순간적으로 혼자 생각에 잠기고, 위치적 은유를 흡수하여 지구의 중력을 하루 더 보존하고 그들 공황에 머무르게 된다. 공장들이 폭격을 / 막으려고 분산되다. 브롱크스 목사의 아들 부름을 받다. 결혼, 살인, 합병, 경야. 조리법과 소요들, 타격 평균과 서평들. 「엉클 샘과 그 적들 사이 냉전」, 덤불 속의 뜨거운 전쟁들. 불길하게, 세상은 체크메이트의 기술 오늘 출간하기로 고르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이 재발행되었다고 평판이 말한다. 재발행? 아주 최근에, 이 책의 19개 출판본이 문자 그대로 불에 탔다. 프랑스 1 차 전쟁에 낡은 스패드 복엽기로 일흔다섯 보슈 비행기를 격추시킨 고수가 죽었음을 알게 되자, 순례자 얼굴에 그늘진 구름이 드리운다. 하지만 그늘이 잠시 후 루스 하세가 두 아들을 이어 딸을 얻었다는 깜짝 공개로 흩어진다. 마사 레이는 극심한 학대를 근거로 닉 콘도스와 이혼 허락을 얻어낸다. 영성체 받은 이들은 이 학대를 상상하려 애쓰고 그 일부를 오늘 밤 타임즈 스퀘어에서 구경할 수 있을지 궁금해한다.
아니면 언제든. 어디 있다면. 오늘 아침 기념비에 동요가 만연하다. 뭔가 잘못되었다. 나라의 모든 책임 당사자들이 한목소리로 어젯밤에 처형이 이뤄졌어야 한다고 고집하였는데, 그렇지 않았고 이제 뉴욕타임즈 지조차, 통상적으로 평범한 공황에 위엄있게 영향받지 않는데, 국가는 이들 죽음이 필요하다 머지않아 필요하다고 인정함이 틀림없다. 왜냐면 깊은 미로 속, 아서 크록이 단언한 것처럼:
미국에서 사법 처벌의 운용은 과도한 유예에 어쨌건, 종속될 수 밖에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로젠버그 사건에서 이런 일로 최대한 활용을 하여 외국의 우리 친구들과 여기 사법 체계의 명성에 해쳤고 그밖에 효과적인 반미 선전을 해댔다. 유예를 허락함으로서, 그리고 그 유예 근거로, 더글라스 판사는 적들이 이 나라를 더욱 더럽힐 방편을 주었다…
사람들은 더글라스 판사 행동의 결과로 대법원은 오늘 긴급특별회기-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된 사건-를 가진다는 내용을 읽는다. 그리고 그전에 원자탄 스파이의 제휴 변호인단은 뉴욕 대법원 어빙 세이폴에 대해 “로젠버그 부부를 심리에 부친 뉴욕 지방검사보다 더 비뚤어진 검사는 전혀 없었다!” 말했다는 기사를 읽는다. 아마, 그들은 바라건대 이로, 팬텀이 욕심부리다가 제 발부리에 채일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로젠버그는 사형/선고가 뒤집어진다면/고발과 싸울 지도. 난무하는 이런 추측들을 빙 둘러 막고 있는: 창살 뒤에서 땀 흘리는 한 남자의 사진을 쓴 B. 알트만 백화점 광고 (“당신은 90일 선고를 앞두고 있는가?”), 악마의 음모 영화 논평, 캐나다로 가는 콜로니얼 에어라인 비행기 좌석에 띠로 묶인 여자의 치마 바닥에서 위로 훔쳐보는 장면. 아버지의 날 지글거리는 안심 스테이크 광고들. “「강력한 원자」”가 죽다. 오늘밤 8:30. “모든 이 입맛에 맞을 일.”
다시 말해서, 정보는 정보지만, 뉴욕타임즈는 또 다르다. 사람들은 무아지경에서 정보를 흡수하지 않는다. 성찬식들은 필연적으로 촉각이지 인식이 아니며, 생명을 생명으로 맞부딪힌다. 눈 못 떼게 관심을 끌고 이런 순례에 예언의 원천수를 따라서 얻는 것은 열여섯, 어린 용커스의 알린 리데트가 뉴저지, 애즈버리 공원에서 28차 연례 구슬치기 토너먼트 여성 최종우승자가 되었다는 발표도 아니고, 라이프치히 광장에 두 명 동베를린 시위자가 러시아 탱크에 돌을 던지는 사진도 아니라, 이런 일들이 서로 닿아있다는 사실이다. 연속적인 사건들이지만, 원인들은 없다. 연속성들이지만 연결점은 없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극장 표값을 25% 줄이라고 명령하고 미국 대통령은 스모키 베어의 커다란 완구모델을 받는다. 베를린 실업자 가옥칠장이의 처형은 새로운 벽지들과 샤워 커튼 콜렉션이 화장실을 장식하기를 바라는 주부들에게 다양한 선택을 제공한다는 보도 곁에 형태를 잡는다. 욕실 벽지들은/닦기가 쉽다. “파노라마”는 벽지 디자인의 하나인데, 고대 서예가 떠오르는 추상적인 모티프들로 된 배경에 시골의 인상주의적 장면들로 이뤄져 있다. 게임으로서 디자인. 디자인으로서 무작위성. 반어적으로 무작위성을 드러내는 디자인. 원칙으로서 임의성은 우리로하여금 비극에 웃을 수 있도록 한다. 꿈속에서처럼, 한 손에 엄청난 양의 응결이 있고, 다른 손에 공력이 있다. 논리적 관련성이 억눌린다. 하지만 위치를 바꿔 재등장한다. 꼬리로 우산을 나르는 고양이들이 든 샤워 커튼 사진들 있다. 가옥도장업자의 아내는 남편이 그 비오던 날 아침 그저 실업수당 수표 가지러 가려고 집을 나갔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심한 감기에 걸려 곧장 집으로 올 계획이었다. 고급 잡역부. “연민과 유머로 내뚫었고…” 에어콘, 여름 양복과 우산 광고들은 도쿄 근처 맹렬한 회전 강하 속에 글로브마스터의 충돌 배경을 제공한다. 산들바람처럼 태평하고 시원한. 차가운 수프와 먹는 색다를 방식들. 905명 넘은 억류자들/수용소에서 탈출 뉴스가 유나이티드 헌트에 대한 광고와 짝을 이룬다. 캠프 막사로 보내라, 베스트의 어린이 이발소 다녀온 후 가장 좋은 모습으로.
단어들과 직접 교감하는 이들이 있다. 졸린 눈으로 게슴츠레 이들을 애무하거나 이들을 제산제처럼 삼키는 이들, 땅이 뒤흔들릴 때마다 지탱 삼아 판석에 기대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 자신 이상을 대변하는지 의심한다. 다른 이들은 투지를 발하며 공간을, 나날의 십자말풀이에 단서가 되는 수수께끼 같은 경곗돌들 (오늘은 뭐가 있나 보자, 첫 번째 단서, 1 가로: 불타는 나무 활동) 비슷하게 여기며, 정돈된 미로에서, 아마 대략 정연한 미로에서 신호들 사이 공간을 찾는다. 그리고 이런 기념비가 애초에 세워진 것도 -아마 언어의 잔여 마법 속에 집요한 믿음-그런 이유였다. 순식간에 달아나는 매일 무슨 패턴을, 뭔가 일관성을 발견하리라는 지나는 시간과 무슨 의미 있는 대화를 하리라는 희망에서 단어들과 도상학으로 재구성하겠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성지는 너무나도 방대하고, 몸짓에서 흐르는 언어로 번역하여 계속 따라잡는 과업이 너무 막대하여, 초월에 대한 의도적인 수색의 모든 의식은 반드시 오래전에 사라져버렸고 잊어버린 모양이었는지, 지나는 순례자에 모든 예지적인 추측들을 맡겨버렸다. 하지만 이런 데이터의 사치스러운 부착물이라도 체계를 시사하고, 단순한 박진법(迫眞法)조차 형이상학을 산출한다. “객관성”은 그 자체에도 불구하고 통찰력 축적을 위한 의지 깊은 프로그램이다: 사실들은 삶에서 나오지 않고 언제나처럼 깜짝 폭로, 계시에서 나오며, 케케묵은 부조화로 옹이지고 육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찼다. 의식하든 하지 않든, 뉴욕 타임즈 조각상들은 도덕적 사회적 질서의 헌장으로서, 정치적 힘의 장을 만드는 이로서 기능한다. 의미있는 행동들을 단순히 보여줌으로써 정의하고, 손을 대고 건드리는 이들에게 특별한 힘을 수여하고, 다른 이들을 갈망할 수 있을 삶의 자세들을 창조한다. 왜 아니겠나? 어떻게 달리 엔트로피에 맞서 투쟁하나? 웨스트베리에서 위대한 그라턴에 /속도를 맞춰라. 「뉴욕 생명보험사들 올라가다」. 워싱턴 화나다. 「학교에서 폭탄 찾기 실패」. 직업여성들을 위해/ 구매한 집.
그들, 일하는 여성들, 종종 여기 온다. 클래스필드에서 서성거리며, 도와줄 요정 대모, 마법양탄자들, 금을 잣는 요정의 비밀이름을 찾아서 온다. 폭파법들이 순진한 얼굴에 친근하게 목표물을 찾아 쑤석거리며 어슬렁댄다. 정치인들 역시 오고. 연금수급자와 지나던 여행객들. 엉클 샘 역시 때때로 대부분 그냥 으스대려고 온다. 그리고 팬텀도, 비록 절대 얼굴을 내보이진 않지만, 평판들 뒤로 검은 응달 속에서, 언뜻 그의 엉덩짝을 노출하고 축축한 방귀 뀌대는 모습이 종종 들킨다. 어빙 카우프만 판사도 그렇게 자주, 여기 의무감에서 우러나, 근본적으로 팬텀의 불손에 감지를 못하고, 균형 잡힌 시각이라고 그가 생각하는 것을 찾아서 온다. 한 눈은 뉴욕에, 다른 눈은 세상에. 태머니 홀은 딱 어빙 세이폴 연결점이 홀이듯이, 세이폴의 은유적인 연결점이다. 톰 듀이 주지사, 연줄이 공화당 동부주류파,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를 백악관에 앉힌 이들과 동일한 국제 은행가들인데, 그는 여기 매일 밀어닥친다, 어깨는 황소처럼 들이밀고, 주먹을 꼭 쥐고, 콧수염을 잘근거리며 싸울 태세로 빈센트 엠펠리테리 혹은 어머니 루스 (아들 타임이 여기를 야밤에 도둑처럼 휘파람을 불며 지난다)같은 공포에 얼어붙은 동물들을 콧대 높이 세우고 내려보거나 아니면 혹은 코를 내려깔고 올려본다. 아이젠하워로 말하자면, 그는 모든 이런 잘못 자리 잡은 신성함에 재미있어하며 콧방귀 뀌고 비켜 간다 – 사람은 모름지기 그런 헛소리에 몇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하지만 그의 부통령, 리처드 닉슨은 자주 경멸을 가장하고 여기 오는데(좋다, 그래 동부 주류층의 유명한 기관지다, 그렇다고 아주 크지는 않다), 그래도 경외심이 없지는 않고 잘 단련된 삼가는 태도를 보인다. 어쨌거나, 그는 여기서 일견 이방인이고, 생경한 땅에서 체류하는 일의 규약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조 맥커시는 그렇지 않다. 그는 공작처럼 으스대며 지나면서, 온갖 훈장들을 자랑스레 내보이고, 격분하여 아무거나 기념비의 표면에 핑크 얼룩은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의 뭉퉁한 손가락을 쿡쿡 찔러댄다. (어떤 이들은 이런 기이한 반점들은 무고한 이의 피얼룩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로이 콘과 데이비드 쉰이 밤에 와서 거기 집어던졌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은 상원의원이 뭘 두고 고함치는지 자신도 알리라 확신한다.)
로젠버그조차 모습을 드러낸다. 낮잡아보듯, 두려운 듯 그래도 간절히. 징표가 혹시…? 에설은 꿈꾸듯 연예란을 거닐며, 패션 광고에 못마땅한 듯 입술을 내밀고, 독자 편지 앞에서 조용한 무아지경에 빠진다. 좀 더 충실한 줄리어스-사실 정기 구독료 납부자-매일 아침 10시에 첫 페이지에 근면하게 출석하여, 거대한 평판에 코를 갖다 대고, 철테 안경 너머로 이런 상관없는 역사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주름을 잡고, 세상에 부여된 이런 기념비적 위엄이 그렇게 미쳐날뛰는 것을 보고서 혼자 부드럽게 흐느낀다. 이런 애통한 눈물들의 그의 약한 시력을 흐리고, 그는 멀찍이, 들어갈 수 없지만 그 때문에 더더욱 위협적인 거대한 회색 위협을 희미하게지각하는 이상의 느낌이 따라붙는다. 아주 빈번하게, 그의 눈물을 통해 그는 여기 이들 평판 위에 자신을, 혹은 그들이 말하는 누군가가 자신이었음을 (“피고인(the accsued)”이라고 불렀지만부르지만, 단어들이 계속 녹아 흐릿한데, 그의 눈에는 “저주받은 이(the accursed)”로 보인다) 발견했지만 그 자신의 이미지를 알아볼 수 없었다. 거인처럼 자라고 내장이 제거되고 눈은 보이지 않는 이미지. 무슨 괴기한 도깨비 집 거울이 사람의 모양을 너무나도 얇게 늘어뜨려 반대쪽에서 다 비쳐보이는 것 같다. 그가 이들 타블렛에 다가갈 방도를 알아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괜찮으리라 생각하곤 했지만 지금은 불가능함을 안다. 살아 있는 존재는 어떤 것도 여기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추정들만, 하루하루 새로이 살을 붙여, 이성적이고 평범한 삶의 사진이 펼쳐질 수 있는, 저 방대하고 복잡해도, 고정적인 타블로-뉴욕타임즈 지의 가장 질 높은 창조물-속에다 온전하게 유지한다. 얼마나 미친 짓인지는 상관없다.
'그외(뻘짓) > the Public Burn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public burning p198~ 피에 굶주린 폭도 (0) | 2024.01.28 |
---|---|
the public burning p193~ (0) | 2024.01.28 |
the public burning p183- (0) | 2024.01.21 |
the public burning 181~ (0) | 2024.01.21 |
the public burning p177~ (0) | 2024.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