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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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 제본 원고가 ‘할 일’ 서가 꼭대기로 간신히 뚫고 오른다. 원고 황토색 표지는 지도 제작자의 환상을 잘 반영한다. 믿음의 땅, 불신자의 땅, 약속의 땅, 모두 알 수 없는 대양에 둘러싸인 곳, 두려움 모르는 두 개의 배와 천상유수 내뱉는 바다 괴물로 용감하게 건넜다. 잉크 올가미가 책의 제목, ‘세상이 깨어나다, 3 부’ 주위로 단단히 조인다. 그 고리 안에 코고는 사람의 zzz들로 차 있다. 책등은 갈라지고 페이지의 제본한 견양접장은 느슨하게 비어졌다.)
…암흑기에 직업 관련 구조작업은-붕괴의 순간에 사람이 호출하는 그 미봉책은-수익성 좋은 전공이 될 것이다. 하락의 심리학, 진보가 역전되었다는 깨달음, 역사는 긴, 어쩌면 종착 부패에 들어서고 있다는 깨달음, 문명화의 확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변은 이번 시도의 범주 저 너머 위치 한다…
…16세기 초기 유럽의 좁은 9년 세월에… 1527년에서 1535년보다 상반되는 양방향으로 폭발하던 시대도 거의 없었다. 가동 활자를 통해 인쇄된 인쇄물들의 보급, 교역의 급격한 확장, 파라셀서스의 획기적인 수술 편람이 이끈 의학의 발전들, 세계가 다시는 생성하지 못할 그런 예술적 천재들이 밀집하고, 그리고 국가 간 복지에 도움이 되는 도보경주로 서쪽 방향으로 출범하는 매일의 대탈출은 드높은 낙관주의의 원인이었다.
그래도 그 시대 성장의 밑면은 그 보조 맞추는 이상이었다. 정치적 음모와 사회적 전위의 그 방대한 규모에 그 시대의 가장 재능 타고난 사람들조차 확신이 다 뜯겨나갔다. 징후와 전조들-1531년 혜성, 구세주의 죽음 후 열다섯 번째 백주년을 가리키는 그노시스파의 계산들, 지구상에 흩어진 종족들을 함께 모일 거라는 콜롬부스의 예언적인 실현 (그에 따른 충돌은 세상이 아직 회복되어야 하긴 해도)-은 더욱 실질적인 킬리아즘(천년왕국설)의 근거가 된다. 재개된 터키 급습들, 뮌처Müntzer의 소작농 봉기의 농민전쟁(Bauernkrieg), 기근과 흉작의 끊임없는 구실들, 흑사병의 복귀, 부의 지독한 분포, 서로마제국의 붕괴 이후로 천년 동안 유럽을 살아 지탱시키던 유일한 기관의 해체, 그리고 영속적으로 임박한 방문을 위한 루터의 새로운 시간표 모두 겁에 질린 예상의 기후를 증명한다.
고도로 교양을 갖춘, 서부 유럽 크기 하나의 다국가 연방에게, 이 시절은 진실로 역사의 끝이었다. 피사로(Pizarro)와 그의 이백 군인들은 카하마르카(Cajamarca) 마을 광장에 매복 했다 튀어나와, 잉카 제국 황제를 포로로 잡았고, 사천-명 경호대를 살육했다. 쿠스코 헤게모니는 쓰러졌고, 세계가 목격했던 여느 제국만큼 비범했던 제국은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고향 항구에서, 우화처럼 엄청난 황금의 땅은 난처한 과잉인구, 인플레이션, 불경기, 실업과 쉼 없는 폭력을 특별히 해결하기 위해 아슬아슬한 시기에 맞춰 바다에서 솟은 것 같았다. 그래도 하룻밤 새 새로운 상품의 주입-담배, 덩이줄기들, 옥수수, 황금, 인명들-은 주민들의 분열과 혼란만 증가시켰다. 1527년이 되자, 전체 유럽이 카라크 선(무장 상선)과 캐러벌(작은 범선)들을 타고 바다들을 종횡으로 움직여 다녔다. 배를 모아 함대를 꾸리는 일은 국가라면 벌이는 통과의례가 되어, 상품들과 재원들을 쫓아 광분한 순회 사냥을 다녔다. 하지만 역사적인 법칙이 되어버린 과정을 통해, 물질 지분에서 갑작스러운, 종종 인플레이션(통화 팽창)같은 증가는 위험의 비례적인 팽창을 야기하는 바 참사의…
(한 구절이 여기에 격렬한 크레욜라 나선들, 진홍색, 카나리아 노란색, 아드리아해 청록색으로 알아보기 힘들다)
…코냑Cognac 연맹의 술책에 샤를은 화가 치솟았다. 황제의 반응은 프룬즈베르크 아래 용병 군세를 선동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거의 온전하게, 미샤겔 클로츠, 콩토티에르(중세 이탈리아 외인부대)의 부대내 루터교도 창병 지휘관이던 이 사람의 일기를 보유한 것은 행운이다. 다른 편의 첼리니 기록처럼, 이는 직접 경험으로 (로마) 노략질을 설명 제공하는 탁월한 서류이다. 클로츠는 란스크네흐트(Landsknechte 미늘창, 도끼창 지닌 보병 용병)가 롬바르디아를 뚫고 지나는 길에 대대적인 파괴에 관해 쓴다. 거기서 그들은 부르봉 공작의 군대와 통합이 되어 비아 에밀리아 아래로 영원한 도시를 향해 합동으로 몰려들었다.
개인적으로 클로츠는 교황과 황제 사이의 휴전으로 타협을 보려는 막판 시도들을 지지했다. 하지만 클레멘트가 제안을 하고 샤를 대제의 대행인들이 받아들인 협상안은 약탈과 전리품의 전망에 잔뜩 공뜬 이만 병 독일과 스페인 부대들에게는 좀스러울 정도로 하찮았다. 클로츠는 프룬츠베르크 혹은 부르봉이 전체로 병력을 제압할 수 없듯이 그 자신의 여단을 쥐고 흔들 수 없었다. 군대는 이제 독립적인 의지에 따라 기독교국의 수도로 진군하였다.
4월이 되자, 로마는 마침내 자신들이 행군의 목적지임을 깨달았다. 부활절에, 미쳐 날뛰는 한 은둔자가 거리들을 내달리며, 소돔의 사생아 새끼들아 회개하라 안 그러면 궤멸할 것이라고 촉구하고 다녔다. 필사적인 방어 태세들을 갖추기 시작했지만, 이들은 너무 뒤늦은 조처였다. 교황의 경비병은 적어도 오대 일로 중과부적이었다. 솜씨 좋게 성벽들을 이용하고 기존의 대포가 어떻게 간신히 공격하는 방진들을 줄어들게 하긴 했다. 곧, 하지만, 교황은 카스텔 산탄젤로 위로 밀려 후퇴했다. 첼리니의 기록을 보면 어떻게 그가 한손으로…
(두 페이지 더 현란한 크레욜라로 물들었다. 보석 장식을 한, 푹 꺼진 정원 위로 누군지 모를 조각상들, 배들, 폭죽놀이들이 떠다니고, 몇몇 대문자 H들과 O들, 무정형의 목동 갈고리 막대들의 코러스 라인들과 더불어 나열되었다.)
교황 소유 금고들의 탁월하고 웅장한 예술적, 무한한 소장품들의 호위하는 업무는 젊은 안토니오 다 상갈로에게 떨어졌다. 안토니오, 위대한 상갈로 건축가 형제들의 조카는, 그때 건축 프로젝트의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그 자금 조달 책략이-과도한 세금 책정, 교황 면죄부 판매, 그런 따위-서구 세계의 재앙을 초래하는 파멸로 치닫게 만들었다…
금고 물건들 많은 부분이 북부 침략자들의 손에 떨어지게 두느니 차라리 녹여버리자는 쪽을 택했다. 첼리니(조각가) 자신도 (안토니오를 감식력 없는 목세공인이라고 폄하했던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그 자신의 유일무이한 명작들을 파괴하였고, 또한 가장 위대한 동시대인들과 조상들의 작품 역시 파기했다.
하지만 상갈로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 동시에 완전 동떨어진 별난 계획, 태풍으로부터 문명화의 업적들을 보존할 의도의 계획이 있었다. 비밀스러운 조치들의 형태는 기록의 틈새로부터만 등장한다. 이 뛰어난 건축가는 바티칸의 한계 안에 불철주야로 작업을 하여, 모래주머니들을 다져 넣고 식스투스의 개인 예배실을 채웠다. 떨어지는 박격포로부터 보티첼리,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프레스코들을 보호하고, 창조에 받쳐진 이미 전 세계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예배소에 가해는 포격의 충격을 흡수하겠다는 희망에서였다. 안토니오는 꾸준히 작업을 했고 현실의 가장 최신 맹공격으로부터 상상력의 개가들을 보존할 수 있으리라는 아주 큰 희망은 없이, 이는 처음도 아니요, 그 끝도 아니고 가장 무분별한 절멸시키고야 마는 정치 조직체들의 포위작전조차 아니란 것을 완전 각득覺得하며 모래를 쌓아갔다.
안토니오의 대담한 계획은 한참 침입자들은 안개와 대포 사격의 아수라장 속에서 파괴된 성벽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5월 6일 밤에 거행되었다. 그는 막-방어벽을 친 교황 아파트들(papal apartments)에, 그가 찾을 수 있는 그 구역의 청소년기 노숙자들을 가능한 한 많이 모아들였다. 거리 부랑아들은 이상적인 위장이었고, 강탈을 하는 용병이 갈취를 위해 탈탈 털어봐야겠다 절대 생각하지 않을 사체들이었다, 그 자신의 결단력으로, 상갈로는 대단히 귀중한 메달리온, 카메오, 초상화, 성유물함, 그릇들, 값진 유리잔, 보석류를 극악무도한 아이들 무리에 나눠주고, 그들에게 거금의 현물들을 멀리 날라 가라고 지시를 하고 위험이 가라앉은 뒤에 신성한 예술품 아주 작은 한 조각이라도 돌아오지 못할 시에는 신이 항구적인 지옥살이의 천벌을 내릴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리하여 유럽 내 인공공예품 중 가장 풍부한 수집품 상당한 양이 빈곤한 거리들 속으로, 아이들 찢겨진 옷 솔기들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학교에 다니며 교육을 받을 정도의 특전을 누리지 못했는데…
클로츠는 공포에 마음에 혹해, 이들 여드레 간의 사건들을 들려준다. 그의 전문적인 군인들은 피를 들이키는 폭력배들로 퇴보하였고, 순전히 재미 삼아 무작정 사람을 죽이고, 교회들과 도서관들과 팔라찌(궁전들)을 뒤집어엎고, 대학교를 파괴하고, 대체할 수 없는 필사본들을 불을 싸지르고, 담보로 잡을 수 있을 만한 것은 뭐든 노략질하고, 모든 움직일 수 있는 그림 그려진 표면들은 구략을 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대부분 앙심을 품고 파괴를 하였으며, 예하들을 고문을 하고, 추기경의 제의들을 입고 이리저리 행진을 하고, 제단을 모독하며 훼손하고, 루터를 교황으로 선언하고, 수녀들과 젊은 여인네와 소녀들을 칼끝으로 위협해 피아지 델 포폴로로 강제로 몰아 문란한 -행의 축제를 벌였다.
(‘문란한’ 단어에 서투르고 조잡한 느낌표 부호들로 둥글게 원을 그렸다.) 한번 무의미한 도락에, 날도적들은 산토 스피리토 병원의 고아원에 들어갔고 거기가 보호받을 수 있는 성역이라고 여겼을 모든 무력한 이들을 도륙했다. 교황은 카스텔로에 죄수로 갇혔다. 법과 품위가 끝장이 났다. 로테르담의 현자(에라스무스)는 이 약탈 속에서 “도시 하나의 파괴가 아니라, 전체 세계의 파괴”를 본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클로츠가 차지한 노획물 지분은, 그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대단치 않았다. 그는 처음 이틀을 예의를 회복시키려는 시도로 보낸다. 교황의 저항이 와해되자, 그는 거리들을 배회하며 부하들의 잔혹한 만행을 줄여보려고 훑고 다닌다. 그는 마침내 핍탈에 눈이 벌건 기사의 손에서 아주 작은 소년과 소녀를 구해낸 이야기를 쓴다. 그 군인은 아이들의 소유물 중에서-보석을 박은 금줄세공 핀, 로마네스크 양식 날개달린 은 그로테스크, 피렌체 테라코타- 브로치들을 찾아내었다. 클로츠는 아이들을 -행하던 군인을 명백한 만족감을 내보이며 죽였다.
다음에 긴 문장이, 때로는 애처로운 구절들이 따른다. 그 속에 클라츠는 노략질로 험악하게 이울어가는 나날 동안 개인적 보호 하에 그 아이들을 두었다고 서술한다. 이들 전쟁 피난민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이타적인 충동 사이에 찢어발기는 내부 전쟁이, 아마 반복적이지 않을까 싶은데 뒤를 따랐고, 다스릴 수 없는 여러 차례 더욱 비도덕적인…
(2 쪽이 면도칼로 혹은 도덕적인 등가물로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클로츠의 독일의 귀환과 황제군의 직위들을 거치며 진급하여…로마의 약탈 후 여덟 해 그는 또 다른 포위에 휘말렸다. 이번에는, 그는 가톨릭 수도의 아주 정반대편, 뮌스터의 재세례론자 근거지 요새, 개신교도의 뉴예루살렘에 대항하여 배치되었다.
재세례론자Anabaptist 운동은, 천년왕국 종파의 느슨한 봉기로, 소란으로 불안정하던 1520년 후반과 1530년 대 초반 독일과 저지대 국가들(북해 연안 국가들 지칭)에서 세를 얻었다. 한스 후트(Hans Hut), 제본기술자가 선지자로 변했고, 1527년 아우스부르크 감옥에서 다음 해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을 하고서, 불가사의하게 죽었다. 방랑하는 예지자 멜히오르 호프만Melchior Hofmann은 넓은 추종자들을 모아들였고, 1533년에 계시로 드러나게 될, 비통의 시기를 설교했다. 그리고 그 해, 종말의 대규모 기대로 번창하던 뮌스터의 한자 마을은 지상의 신의 도시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패러디로 바뀌기 시작했다.
1534년 이월 초, 무역상인 크니퍼돌링크와 네덜란드 사람 얀 뷔켈손(라이든의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며 도시의 거리를 비명을 지르며 내달렸다. 그들은 어떻게 개종한 재세례교도들을 종용해 무장 봉기를 도발하였고, 시청을 탈취했다. 의회는 내분으로 약화되고 그 자신의 숭배의 자유를 보호하기에 열심인 루터교도들로 가득해, 이 반란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의 정신적인 주인, 수염 무성하고, 수척한 금욕주의자 하를렘의 얀 마티스의 도착에 도움을 받아, 뷔켈손이 재빨리 장악했다. 무장한 도당들은 마을에서 모든 그릇된 믿음의 신도들을 내쫓았다. 그들의 재산을 전용하고 이 몰수당한 이들을, 출산 앞둔 어머니들과 젖먹이들을 포함하여, 줄을 이뤄 2월 눈폭풍 속으로 유형 길에 나섰다.
네덜란드 재림 선포자들은 남아 절대 신권 정치를 수립, 역사의 마지막 폭우 가운데 신성하게 영감을 받은 선택된 자의 섬을 만들었다. 마티스는 유토피아적인 공동생활을 이행하기 시작했고 두어 달 동안 도시가 발광을 하여 미쳐 돌아갔다. 사유 화폐는 폐지되었고, 재산은 통속적으로 배분되었다. 성서를 제외한 모든 책들은 대성당 광장 장작더미 위에 화염에 휩싸였다. 이의 제기하는 목소리들의 공개 처형은 찬송가의 반주에 맞춰 벌어졌다.
질서를 복원하기 위해, 뮌스터의 주교는 마을 주변으로 토루들을 돋우었다. 하지만 그의 힘은 너무 약해 완전히 효과적인 포위를 하지 못했다. 부활절에 마티스는 이제 도시의 절대적인 독재자로, 신성한 성공의 확신을 주장하며, 포위한 군대를 흩어버리겠다며 얼마 안 되는 남자들과 말을 타고 나갔다. 마티스와 그의 자살 특공대는 가차 없는 칼질로 도륙되었다.
다시 성벽 안에, 통솔직의 망토가 뷔켈손에게 떨어졌다. 신비한 계시들을 쫓아, 엄격한 교대의 노동을 시행하였고 열두 연장자의 운영위원회를 지명하였다. 그는 일부다처제를 도입하였고 특정 나이 아래 모든 여성들은 결혼하라고 강제하였다. 그해 말에, 일부다처제는 일종의 의무적인, 뒤죽박죽 만연하는 난혼으로 변질되었다. 뷔켈손은 이천 명 남짓 그의 작은 수비대를 어찌나 매섭게 보구채었던지 이들은 반복적으로 그들 크기 몇배나 되는 주교감독 군대들의 공격을 버텼다.
9월에, 뒤젠트슈어라는 한 금세공인이, 프린지팔마흐트(Prinzipalmarkt)에 서서, 신이 뷔켈손을 왕들의 왕으로 지상 모든 나라의 지배자, 최후의 날의 메시아로 골랐다고 선언했다. 그러다 보니 뷔켈손은, 팡파레 사이로 늘어가는 소곤거림에 즉시 임명을 받았다. 거리와 수문들, 일주일의 날짜, 아이들까지 모두 새 이름이 주어졌다. 장식용 주화를 두들겨 주조했고, 뷔켈손은 화려하게 장식된 환상 궁정의 과시물들로 둘러쌌다. 이러 화려한 장관을 지불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로 물품을 징발하는 한편, 새 왕은 그들을 자갈돌이 빵으로 바뀌고 진흙이 금으로 바뀔 날이 머지않았노라고 안심시켰다. 제3세대가 여기 도래하였노라, 신의 아이들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지상의 부를 상속받을 때가.
동조적인 재세례교도의 봉기들이 북부를 가로질러 불거져 나왔다. 마침내 뮌스터 사건들의 규모를 깨닫고서, 제국의 지배층들이 합심하여 뷔켈손의 메시아주의 왕국을 넘어뜨릴 돈과 군사들을 보냈다. 클로츠가 1535년 1월 봉쇄를 다져 봉인하기 위해 도착할 즈음에, 도시 내의 삶은 최후의, 모골 송연한 악몽으로 내려앉았다. 환상적인 연출기법의 기예와 묘기들이 굶어죽는 대중들을 위해 고안되었다. 육상 경기 토너먼트들, 가면극들, 대성당에서 공연되는 음란한 미사들. 트럼펫주자들은 때를 가리지 않고 일치된 빵빵 소리를 터뜨리며 돌아다녔다. 마을 사람들에게 광장으로 모이라고, 안 오면 사형에 처해질 줄 알고, 왕의 가장 최근 영감을 들으라는 신호였다.
클로츠가 묘사하는 많은 부분은, 아무리 기상천외하더라도, 성벽 내부의 자료들로 입증이 된다. 5월에, 뷔켈손은 그의 굶주린, 히스테리 상태의 신민들의 집단 처형들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많은 신도들이 그와 함께 하늘 위로 이송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 제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는 일이 허용되었지만, 황제의 무장병력들이 이들이 포위선을 뚫고 지나는 일을 거절했다. 클로츠는 이들 생명들이 도시 성벽과 포위군 토루 사이 해자에서 동물처럼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풀을 뜯어 먹고, 죽여 달라고 호소하더라고 묘사한다. 이들은 운이 좋은 치들이었다. 차후의 탈주자는 네 가랑이를 찢겨 도시 주변으로 못을 박았다.
클로츠의 임무는 부덴투름(Buddenturm)을 따라 시민들에게 그들의 왕에게 달려들어 대학살을 피하라고 간청하는, 리플렛들의 연속포격으로 북쪽 성곽을 포격하는 일이었다. 그는 처참하고 섬뜩한 포위 말미에, 절망적인 수비대가 굶주린 어린아이들로 줄어들었다고 보고한다. 포위군들이 마침내 도시를 궤뚫고 마지막, 광란의 방어를 극복하자, 그들은 상상 이상의 즐비한 살육된 시체들 사이 발 디딜 데 골라 나가야만 했다. 층층이 쌓인 시체들이 거리에 줄을 지었으며 대부분 처형으로 혹은 사체를 먹어서, 늙은이들이 젊은이들로부터 들을 수 없는 질병으로 아주 훼손이 되어 있었다.
살아남은 재세례교 지도자들, 뵈켈손과 크니퍼돌링크는 벌겋게 달은 철판에 그슬러 죽었다. 클로츠는 왕은 고문 중에 아무 소리도 내지도, 신념을 철회하지도 않았다고 보고한다. 그들 시체는 람베르티키르헤Lambertikirche 첨탑 꼭지에서 납 우리 안에 넣어 매달렸다.
정확하게 이 시간에, 다 늙은 미칼렌젤로, 인간혐오에 잠기고, 역사에 신물이 나, 이제는 상갈로가 쌓은 모래주머니가 없는 시스티나 분회당으로 돌아와 그의 천정 벽화 창조에 각주를 더해 넣었다. 무시무시한 마지막 심판, 서양 예술에서 가장 무자비한 작품…
(크래욜라 꽃들, 집들, 프러시안 블루 연기들이 고불고불한 그 굴뚝들, 뭔가 단순한 단어들, 한 여자아이의 뻣뻣한 얼굴, 전투기가 땅딸막한 무지개 총알 애벌레들을 토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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