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ma mandalay
그렇게 부정기화물선과의 만남은 끝이 났다. 그 기억은 내 존재의 가장 무기물적이고 고집스러운 본질과 마구 뒤섞인 강박적인 이미지들의 간결한 컬렉션을 형성하게 되었다. 꿈에 나타나는 빈도는 점점 드물어지고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특정 상황, 현실의 어떤 흔치 않은 배치가 그 출현과 닮은 구석이 있을 때마다 배가 떠오르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미지가 숨어다니는 구석이 더 깊어지고, 더 은밀해져, 출현도 덜해졌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잊어간다. 아무리 우리에게 두텁고 살가웠더라도 우리 일들이란 게 위태로운 현재가 끊임없이 모방적으로 기만적으로 작용하여 낯설어진다. 이러한 이미지 중 하나가 굳건히 살아 버티겠다는 온통 악착같은 의지로 되돌아오면, 배운 사람들이 현현/통찰이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난다. 납작 퍼져버릴 수도 있고 혹은 우리가 계속 살아가는데 아주 유용한 몇몇 진면모들을 더욱 공고히 할 수도 있는 경험이다. 나는 다시는 트램프증기선을 보지 못했다고 했지만, 사실 다시 듣기는 들어, 황량함의 극치인 배의 역사에 대한 소식은 전해들었다. 신은 과거 특정 영역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우리가 걷는 일을 좀체 허락하지 않는데, 아마도 우리가 보게 될 것에 항상 준비되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슬픔보다 더 높은 신탁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나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오리노코 강 어귀를 방문한 지 몇 달 후, 나는 나라의 상당 부분을 가로지르며 배도 드나들 수 있는 장강(長江) 유역을 굽어보고 서 있는 정유 공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길고 격렬한 노사 분쟁으로 인해 나는 노조와 통상적인 전략적 협상부터 지역 라디오 방송국 및 신문에 조심스럽게 개입하여 경영진의 견해를 대중에게 알리는 일까지 다양한 업무에 힘을 쏟으며 몇 달 동안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잠잠해지는 시기에는 비행기를 타고 수도로 가는 대신 강을 따라 하류 큰 항구로 내려갔다. 나는 회사의 작지만 편안한 예인선을 타고 여행을 떠났는데, 무거운 연료나 아스팔트를 실은 바지선들로 된 캐러밴을 아래로 끌고 내려가는 이 예인선에 각각 승객을 위한 선실이 두 개 있었고, 선객들은 선장과 입이 침이 마르도록 칭송해도 모자라는 재간 뛰어난 자메이카 여인 요리사가 준비한 식사를 나눠 먹었다. 매실 소스에 절인 돼지고기, 코코넛과 튀긴 플라타나(바나나)를 곁들인 밥, 강에서 잡은 생선으로 만든 군침 도는 스튜, 식사에 빠져서는 안 되는, 언제나 환영받는 반주,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개운한 보드카 섞은 배즙 음료로 마음이 덩달아 달큰해져 끊임없이 변화하는 강과 강둑의 파노라마를 한껏 즐길 수 있었고, 그 가늠하기 힘든 음료의 마법 덕분에, 모든 일들이 아무도 해독하려고 들지 않는 양단처럼 부드럽고 만족스러운 먼 거리를 두고서 일어났다. (예인선 항해에 아주 열광했던 승객들이 육지에서 보드카와 배즙 혼합물을 반복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환멸에 시달려야 했음을 언급 안 할 수가 없다.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만든 것 도저히 마실 수 없었다.) 밤이 되면 작은 갑판에서 긴 잡담을 나누며 시원하다고 착각할 만한 바람을 찾아 앉아있다가, 우리는 벙커침상에 나가떨어져, 흑인 요리사들의 웃음소리와 영어가 언어적 캔버스 역할을 하는 그들의 이해할 수 없지만 유려한 방언의 주문을 자장가 삼아 잠이 들곤 했다.
파업은 끝끝내 발생하지 않았고 노조와의 협상은 넘어서려면 오랜 시간 복잡하게 하나하나 따지고 짚어가는 장고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항구를 구경하기로 결심하고 다음 예인선 자리를 예약하기 위해 우리 회사 해운 사무소로 갔다. 항상 나를 상대하던 직원이 그 순간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집에 머리가 하얗게 센 남성과 말을 나누고 있었다. 남자 말투가 프랑스어와 북부 스페인어 사이 어딘가에 억양이 약간 섞여 이야기하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이 선장님이 어르신과 함께 여행하실 겁니다.” 직원이 소개말로 내게 말했다. 그 남자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친근해도 차분한 권위가 묻어나는 미소를 지으며 나와 악수를 했다. “존 이투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짙은 눈썹으로 거의 가려진 그의 회색 눈은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사람의 눈빛이었다. 대화 상대방을 정면으로 응시하지만 먼 곳을, 가늠 안 가지만 항상 존재하는 지평선 같은 데를 시야에서 놓지 않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나는 승선권을 받았고 그 뱃사람은 기다렸다가 함께 걸어 나갔다. 우리는 식당을 차려 놓은 방갈로 쪽으로 향했다. 점심 호출은 이미 울렸다. 그의 발걸음은 단단하고 다소 군인 같았지만, 마치 땅에 내린 뒤에도 갑판 위를 걷는 사람처럼 허리가 약간 비틀거렸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내가 불쑥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선장님 억양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외람되지만 이런 기벽도 저 자신도 도무지 제어도, 고쳐지지도 않네요.”
그는 활짝 웃었다. 그의 완벽한 치아가 검게 그을린 얼굴과 촘촘하고 검은 콧수염으로 유별나게 돋보였다.
“이해합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저도 익숙해요. 저는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아이노아(Ainhoa)에서 태어났어요. 부모님은 (남부프랑스) 바욘 출신이셨고. 하지만 여러 가족 관련 사정으로 산세바스티안에서 학교를 다녔고 빌바오에서 선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완전히 이중 언어를 구사하지만 각각 언어에 다른 언어의 억양이 묻어납니다. 제 이름도 마찬가지로 다들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여기 미국인들은 저를 존이라고 부르는데, 당연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요.”
“그래요, 이름을 듣자마자 바스크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빌바오에 사는 제 친구의 이름도 욘(Jon)입니다. 정말 아주 훌륭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계속 대화를 나누고 점심을 함께 먹었다. 그는 전형적인 바스크인이었다. 그는 서먹서먹하지만 또 거리낌은 없는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점에 나는 항상 그 민족에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적 미덕과 함께 외부 이방인의 습격들에는 즉각 발끈하며 지키는 분야도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치 단테의 지옥의 환들 같은, 육체적 고문보다는 정신적인 시련이 특히나 고통스러운 곳에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첫 만남에서 우리는 공통적인 관심사와 추억들을 충분히 많은 것을 발견해 함께 즐거운 여행이 되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한 번은 푸엔테라비아에서 보르도로 가는 길에 아이노아에서 렌터카가 고장 나 주저앉아서, 아이노아에서 하룻밤 묵어야 했는데, 제가 묵었던 호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이름, 오안체아 호텔이 잊히지가 않아요.”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사촌 중 한 명이 소유했던 덴데요, 수년 전에.” 그는 말했다.
때때로 이런 소소한 일들이 이유를 잘 알지 못한 채 호감이 물씬 솟구친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풍경이나 어느 장소를 아주 잠시라도 공유하면 가족 같은 정이 느껴진다. 정박지나 일정한 주거지 없이 세계를 떠도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의 경우가 그랬다. 그의 경우는 선원이었고, 항상 나는 내 바람과는 무관한 이유로 여러 나라를 자주 옮겨 다녔기 때문이다.
예인선은 그로부터 3일 후에 도착했다. 나는 밤에 배에 올랐다. 강 하류 항구로 내려가야 하는 캐러반 바지선들은 이미 준비되었다. 선실에 자리를 잡고 정돈하던 때에는 이투리는 보이지 않았다. 짐을 풀고 늘 승객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캔버스 의자 중 하나에 앉아 좀 뻗고 누워있으려고 갑판으로 나갔다. 갑판이라고 칭하긴 했지만 말이 그렇다는 뜻이다. 함교 지붕에 얹힌 3 곱하기 4미터의 제한된 직사각형 공간은 이름 붙이기에도 민망한 공간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회사 색깔, 빨간색, 흰색, 파란색으로 칠해진 금속 난간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나온다. 프랑스 국기에 대한 농담은 당연히 따라다녔지만 더 이상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렇게 특혜받은 높은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강과 강변들의 풍광과 비교될 만한 광경은 없었다.
나는 의자에 누워 소소한 출항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즐길 준비를 했다. 연료를 실어 줄줄이 이어놓은 바지선들을 거대한 강의 만곡부들, 숨은 구석, 구불구불한 곡류들을 향도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조정력은 아무나 넘보기 어려운 위업으로 여겨졌다. 바로 그때 누군가 사다리를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투리였다. 그를 거의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강 위에서 펼쳐지는 항해술에 넋이 나가 있던 탓이었다. 선장은 인사도 없이 마치 아까 시작한 대화를 이어가듯 자연스럽게 말했다: “저는 왜 강에서 기동하는 일이 조금 짜증 나는지 도통 이해를 못 하겠어요. 강에서 철로를 달리는 셈인데. 나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거슬러 움직이는 강물 위에서. 심각할 것은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나는 완전히 반대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흥미가 더 일고 존경심까지 솟았다.
나는 인화성 액체로 찰랑찰랑 가득 채운 바지선 10척을 성공적으로 운송한 것을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했다. “전 신경 쓰지 마세요.” 바스크인이 대답했다. “바다 선원들은 다소 광기가 들려요. 육지에서는 항상 잠시 머무는 떠돌이처럼 느끼고 육지에서 일어나는 일에 제대로 가늠을 못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기차가 싫어요. 그렇게 많은 철을 들이고 너무 많은 소음을 내는데 비해 그런 노력들이 너무… 너무 어리석다는 인상이 들어요.” 지루하고 변변찮은 육지 생활에 시달리는 다소 불퉁하지만 반박할 수 없은 이 선원의 근본적인 솔직함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긴 침묵 사이사이로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회사 예인선을 타고 여행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 회사에서 일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루바에 정박하다 우리 유조선 중 하나가 고초를 겪은 두 번의 연속 사고에 대해 전문가적인 진술을 하러 온 것이었다. 보험 회사는 그를 이후 이어지는 조사에서 보험 회사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도록 임명했다. 그는 정유 공장에 가야만 했는데, 그곳이 누출 밀봉 구획들 내 가연성 물질의 운송에 관한 특정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는 아덴만으로 데려가 줄 벨기에 화물선을 타고 가려고 돌아가고 있는 길이었다. 거기 만에 따라 있는 국가들의 해안을 따라 냉동식품을 운송하는 소형 선박의 선장을 대신할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존 선장은 당뇨병성 쇼크를 일으켜 한동안 일을 벗어나야 했다.
항구까지의 뱃길은 열흘 이상 지속될 예정이었다. 예인선은 몇 번씩 멈춰 일부 바지선을 인도하고, 비어 있는 다른 바지선을 취집하여 큰 항구의 창고 시설이 있는 회사 부두로 끌고 가야 했다. 우리 둘 다 도착을 서두르지 않았다. “비행기로 갈 수도 있었지만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 더 흥미롭고 느긋할 것 같았습니다.” 이투리가 설명했다. “항상 이런 종류의 여행을 하고 싶었어요. 강에 대해 아는 거라곤 몇몇 삼각주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스헬데 강, 템즈 강, 르아브르에 있는 센 강이나. 모든 강이 이 정도로 통과할 수 있고 안전한 것은 아니죠. 다 그런 게 아녜요.” 마지막 문장을 맺는 단어들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말하기가 힘든, 말을 잇지 못하고 목이 메는 듯한 느낌, 마치 갑자기 낮은 끄응 소리로 목을 막아버린 듯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고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나누었다.
찜통더위로 숨이 거의 막히던 어느 날 밤, 우리는 의자에 앉아 거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로 보름달이 느릿느릿 느긋하게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 지역에는 좀체 없는 날씨였다. 달빛이 강물에 그리고 강둑을 따라 언덕의 개간지 위로 비추는 모습은 마치 마테를링크의 무대 배경을 보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플랑드르로 화제가 넘어가, 그곳 도시, 사람, 음식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필연적인 마무리로 앤트워프까지 흘러갔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에게 매우 소중한 도시로, 내 의견으로는 어떤 항구보다 가장 매력적이고 조화로운 활동을 하는 항구가 딸렸는데, 스헬데 강변의 교통은 아주 섬세하고 완전 느릿하여 운용하여 나고 드는 선박의 움직임을 일종의 발레로 바꾸기 때문이었다. 이미 내가 언급했듯이 우리는 신뢰의 장벽을 허물었고, 이번에는 이투리가 즉시 특별히 내 관심을 끄는 말을 했다.
“앤트워프에서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사람들을 처음 만났습니다. 반쯤 선주이자 반쯤 상인이었던 레바논인 한 명은 대부분의 그의 동포들처럼 영리하고 매력적이었고, 그의 친구이자 사업동반자로, 국적 불명의 남성이었는데, 지중해 연안에서, 당시에는 통상적인 도덕률에 항상 딱 맞아들어가지만은 않은 다양한 성격의 사업을 하며 기웃거리고 있었죠. 우리는 항만 근처 한 인도네시아 식당에서 마주치게 되었어요. 그 식당에서 다른 무엇보다 식욕을 먼저 뚝 떨어뜨리는 동양 요리를 마지못해 먹고 있었습니다. 우리 셋은 거의 동시에 서비스가 불규칙적이다 뭐 이런 일로 항의하였고, 결국 우리는 함께 자리를 떠, 소박하고 작은 식당에서 더 평범하고 양은 푸짐한 벨기에 요리를 먹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제 인생은 상상하지도 않던 방향으로 완전 틀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내가 물었다. “당신 같은 성격의 사람이 90도로 바뀌는 일은 좀체 못 봤는데요. 바스크의 성격에 그런 천성이 없어요. 물론 여러분은 모두 반항적이고 순응주의자가 전혀 아니지만,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어렸을 때 배운 기술을 써먹으며 살다가, 자신이 세운 규칙 아래 다들 생을 마감하잖아요.” 나는 이투리 같은 사람의 급진적인 변화라는 말이 진짜 놀라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믿기지 않지요? 우리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성숙하며 뚫고 나오는 그런 놀라운 일에 우리는 늘 대비해야 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들이 순식간에 튀어 오르죠. 사실 저 같은 사람은, 항상 어느 정도 명망 있는 해운 회사에서 일하고 스스로는 어떤 종류도 시험이나 모험도 하지 않는다는 융통성 없는 규칙을 달고 사는데, 종국에는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은 부정기 화물선의 부분 선주 겸 선장이 되었어요. 그런 흉물은 본 적이 없었는데.”
그 말에 갑자기 기억 속에서 무언가가 스쳐, 선장으로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배가 앤트워프에 정박해 있었다고요? 그리고 배를 타고 거기서 출항하신 건가요? 선장님도 순회 화물선에 관한 항만 규정에 관한 규정이나 부두에 정박할 때 필요한 유지 보수 기준을 알고 계시겠지요.”
“네, 물론 앤트워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의 선박관련 정보에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아는 정가 거기서 더 나가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드리아해에서 유고 폴라에서 인솔을 맡았어요. 당신도 직접 보셔야 되는데. 다 허물어져 가는 모습이 가관이었어요. 이름도 꼭 같이 얼토당토않게 환상적이었어요. 바다 한가운데 둥지를 틀고 있는 신화 속 새 이름이 배이름이었습니다. 좋으실 대로 제우스와 헤라보다 더 행복하다고 주장한 부부라고 봐도 무방해요.”
등골이 오싹하게 끼쳤다. 가능한 모든 예상을 깨는 우연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가 모르는 법칙, 상습적 일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을 암시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다. 내 목소리에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대로 묻어나서 나는 겨우 한마디 뱉었다.
“알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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