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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기 없는 짓/Dublinesque

Dublinesque 77-

by 어정버정 2023. 4. 14.

2019-02-18

 

 
 
 
 

page 77

브렌던 비헌(Brendan Behan, 아일랜드 시인 단편소설가 1961년 사망)관한 단상을 골똘히 짚어보는 일보다 더블린 여행의 준비보다 적합한 일은 없어 보인다. 잠시-지금으로서는 예전에-이 아일랜드 작가는 그에게는 불가사의였다. 아우구스토 몬테로소가 우화의 중심부로 가는 여행에서 브렌던 비헌의 뉴욕같은 여행기는 가장 흡족한 행복이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미스터리였다.

아주 오랫동안 이 브렌던 비헌이라는 작자는 대체 어떤 놈이란 말인가 답을 곱씹었지만 실제로 찾아볼 만큼 파고드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는 몬테로소를 볼 때마다, 그에게 물어보는 것을 잊었다는 것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또한 전혀 뜻하지 않은 때에, 뉴욕 첼시 호텔의 유명 투숙객에 관한 기사에서 브렌던 비헌의 이름을 발견했던 기억도 난다. 거기 적힌 말은 다만 스스로 글 쓰는 문제에 관해 쓰는 술꾼이라고 칭하곤 하던 탁월한 아일랜드 작가라는 말 뿐이었다.

그 말이 그의 마음에 깊이 박혔다. 강렬한 정보이긴 해도 동시에 내용이 빈약해서 이런 술꾼 성자의 불가사의는 한층 깊어지기만 했고, 그러던 어느 날, 수태가 지난 뒤에, 벤자민 블랙이라는 가명으로 쓴 존 밴빌의 소설, ‘크리스틴 펄에서 어느 바에 있는 수다스러운 바니 보일이라는 인물 뒤에 위장을 한 비헌을 찾아내었다. 이런 발견의 놀라움에 여전히 휩싸인 채 그는 이 보일이라는, 비헌의 대응인물의 환경에 대해 염탐하는 일에 전념했다. 안개의 기운, 석탄 불, 위스키 증기, 퀴퀴한 담배 연기. 그리고 매일같이 그가 진본 비헌에 자신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틀리지 않았다. 몇 주 전에 어느 책가게에 들어갔다가, 브렌던 비헌의 뉴욕 스페인어판을 홀연히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제일 처음 든 후회는 그가 이를 출판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브렌던의 책이 뉴욕시에 관한 훌륭한 독백이라는 점을 발견하고 나자 더욱 이 후회가 사무쳤다. 뉴욕은 자신에게 신의 땅 표면에 난 가장 위대한 도시 아니던가. 비헌 눈에 뉴욕 전기 도시, 우주의 중심에 비견될 만한 대상은 없었다. 나머지는 침묵이며, 번뜩이는 어둠이었다. 뉴욕에 다녀온 뒤로, 나머지 모든 것들이 형편없었다. 한 예로 런던도 그래서, 뉴욕에서 돌아오는 런던 사람에게 건포도처럼 가운데 이스트 엔드가 턱 박힌 붉은 벽돌의 교외지역의 넓고 평평한 파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브렌던 비헌의 뉴욕, 그의 생애 말미에 쓴 이 책은, 읽어 보았더니 도시 인류 풍광의 무한한 재능 여행, 행운의 별을 타고 난 도시 여행이었다. 게다가 비헌의 뉴욕은 이 도시와 행복은 같은 일임을 확증시켜 주었다. 비헌은 첼시 호텔에서, 60년대 초, 완전히 알콜 중독자였을 때 이 책을 썼다. 그때는 날마다 커다란 파티들이 열렸고, 파티장에서 사람들은 항상 최근에 고안된 트위스트와 매디슨 춤을 추고 있었지만, 막 시작된 혁명의 나날이기도 했다. 몇 년 전에, 웨일즈 사람 딜런 토마스가 첼시 호텔에 1953 11 3일 불쑥 나타나서 자신이 열여덟 잔의 스트레이트 위스키를 마셨다고 공언하고 이는 아마 신기록일 거라고 생각했다.(그는 육일 후에 죽었다.)

10년 뒤에 그가 랭보의 시 취한 배와 똑같이 허리케인으로 새도 없는 창공에 내던져진 듯이, 이 아일랜드인 비헌은 그 호텔에 웨일즈 사람들이 그랬듯이 술에 잔뜩 취해 나타났다. 그는 스탠리 바드, 첼시 호텔 주인의 부축을 받았는데, 이 주인은, 항상 술에 쩔어 있는 이 작가를 다른 호텔은 하나같이 내친 줄 알면서도 그와 그의 아내가 묵도록 해주었다. 위대한 스탠리 바드는 비헌이 글을 다시 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당연히 첼시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랬다. 창작력에 늘 도움이 되는 곳으로 여겨지던, 23번 도로의 이 호텔은 비헌에게는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의 책은 딜런 토마스가 살았던 같은 층에서 작성이 되었다

 

 

 

page 89

상상력 자체가 한 시대의 종말, 속수무책으로 여기는 일이 상상의 특징이란 점을 리바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한 그는 우리의 최대 위기의 시기에 처했다는, 새로운 문화를 향한 대변동의 이행기에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종말론적 사조는 거기, 모든 세대에 늘 있어왔다. 우리는 이를 예를 들어 성경 속에서, 이니이드(Aeneid)에서 발견한다. 이는 모든 문명에 존재한다. 리바는 종말론적 사조는 우리 시대에는 풍자적으로만 다룰 수 있다는 이해한다. 그들이 용케 더블린에서 이 장례식을 치른다면, 시대의 종말에 대해 몇몇 감수성 예민한 인간들의 울음에 거대한 풍자이상은 될 수 없다. 종말론은 과도한 심각함의 결여를 요구한다. 어쨌거나 그의 소년기 이후로 늘 그는 우리의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상황이 특성 없이 끔직하고 어떤 면에서 특권 적인 면모를 지녔다는 시대의 기본 방위라는 말을 듣는데 질렸고 지쳤다. 하지만 이게 정말 사실인가? 우리의 끔찍한 상황이 우리 선조의 상황과, 많은 이들이 우리처럼 느꼈듯이 아주 다른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리고 복의 말처럼 우리의 기준이 우리에게 만족스러워 보인다면 그들에게도 같았을 것이다. 어떤 위기든, 어쨌거나 우리의 존재론적인 불안의 투사이다. 아마도 우리의 유일한 특권은 현존해 가며, 우리 모두 다같이 혹은 따로 죽게 되리라 안다는 점일 것이다. 결국에 종말론은 거창한, 눈부신 가상적인 허식을 지니긴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리바는 생각한다. 왜냐면 실제로 이를 제대로 살펴본다면, 실제로 내게 제공하는 것은 흥겨운, 단호한 그리고 행복한 더블린에서 장례식의 패러독스이기 때문이다. 그건 내게 최근에 가장 필요했던 것들을 제공한다. 미래에 해나갈 무언가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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