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허튼짓, 헛짓/Lost classics

Lost classics 48

by 어정버정 2023. 5. 1.

2013-7-03

 

카산드라  파이버스 

죽은 갈매기-조지 바커 
 
Cassandra Pybus 
The Dead Seagull-George Barker 
 
 
 

내가 처음 그랜드 센트럴 역에 주저앉아 나는 울었다 1967년에 읽고 완전 넋이 나갔다. 나는 막 스무살을 넘기고. “치명적으로 사랑의 씨앗으로 꽂힌 세상의 온갖 슬픔을 바라보는 눈을 가진 상처로 가득 차 있는 엘리자베스 스마트처럼 열정의 순교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통을 안기는 사랑에 대한 그녀의 시각은 직접적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조지 바커에 관해서는, 그녀가 시를 읽은 뒤 강박적으로 추적을 하고 유혹을 했던 시인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할인 가격의 책방에서 헐값으로 파는 책 더미를 훑어보다가 하루는 얇은 책자의 책에 그의 이름을 얼핏 보게 되었다. 몰래 책장을 팔락팔락 넘기며 바커가 스마트와 아주 똑같은 열정의 고역을 묘사하고 있는 대목을 읽고 아연실색을 했다. 하지만 거기엔 혐오감, 속박 받지 않는 독설이 같이 있었다. 이런 부분에 나는 분노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나는 아는 바 없다시피 한 죽은 갈매기를 샀다. 이 책에 대해서 다른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산 게 참 다행한 일이었다.

스마트가 처음 그랜드 센트럴 역에 주저앉아 나는 울었다을 발간한 게 1944년이고 바커는 죽은 갈매기 1950년에 나왔다. 육십년 대 중반에 그들은 서로 일년 못 되는 시차를 두고 재발간을 하였다. 그런 뒤 스마트의 책은 여전히 출판이 되고 감수성 예민한 젊은 여자들에게 수세대 동안 상징적인 소설이 된 반면, 바커의 책은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듯하다.

 

바커와 스마트는 1980년 글래스고우 어느 작가 컨퍼런스에서 그들 책 (그리고 네 명의 그들 아이들)을 낳은 어리석은 열정 후에 반생이 지난 후 그들 책을 같이 낭독을 했다. 내가 낭독회를 보려고 참석하지 않아서 나는 기쁘다. 이들 두 개의 비상한 산문시는 무모한 인간들이 점차 늙어서 어느 결에 관음증적인 대중 앞에서 신기한 의식들을 수행하는 그런 세계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다. 그들의 이야기는 평범한 이야기로 쉽게 읽힐 수 있다. 어느 결혼이 열정적이고 충동적인 정사로 파괴된다. 어느 여자가 한 남자의 갈망에 사로잡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열정에 다 죽어가는 소리를 하지만 뻔뻔하고 무자비한 사람이 된다. 성자 같은 아내와 음탕한 애인 사이에서 고를 수가 없던 남자는 욕정으로 파괴가 된다는 내용이다. 스마트와 바커의 손에서 이 지저분한 넋두리는 시적인 변형을 겪고 장대한 신화가 되어, 우리는 그랜드 센트럴 역에 주저앉아 나는 울었다 주피터가 레다와 지냈는데 지금은 어떤 것도 트로이 전쟁을 피할 수 없다.”로 읽을 수 있다. 죽은 갈매기에서 스스로를 찢고 발기는 서술자는 그의 욕망 대상을 풀려날 수 없는 돼지-여자, 키르케로 인식하고 그의 열정을 언젠가는 완전히 무장을 하고 불쑥 솟아 나를 파괴할 야생 귀리 들판으로 보았다.

양쪽의 글쓰기는 흥미진진하다. 본능적이면서도 동시에 시적이다. 정교하고 응축된 감정의 번역이자 벌어진 상처처럼 따갑다. 각자는 시적인 서사의 걸작을 더빙을 했다. 그래도 작은 분량의 이 두 작품이 놀랄 따름인 이유는, 적어도 나에게는 눈부신 시작법이라거나 이교도적인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자신에 있다. “모든 것이, 그렇게 시작하였듯이 이기주의적인 심장으로 시작한다.”고 바커는 썼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를 조금도 못했대도 놀랍지가 않다.

왜 어떤 사람은 승리로 살아남고 왜 다른 이는 행방불명이 되는가 그 가능한 이유가 여기 있다. 엘리자베스 스마트의 독자들은, 내 추측에, 나처럼 관습적인 도덕성의 의무를 지워버리는 초월적인 열정의 환상에 언제라고 휩쓸려 태세인 스무 살 근방이 아닐까, 반대로 그들은 바커가 보여주는 야누스의 두 얼굴에 반감이 들 가능성이 크다. 자신은 성욕에 대해 스마트에게는 탐욕스럽고, 비도덕적이고 동물적인 열정, “그의 삶을 갈가리 넝마로 찢는 열정에 대해, 그의 서술은 혐오감으로 그득하다.

책의 중심 이미지는 바커가 해변에서 발견하는, 배반을 당하는 고결한 그의 아내의 완벽한 메타포인 죽은 갈매기가 차지한다. 손을 상심에 빠진 아내의 심장의 상징인 죽은 새의 가슴께에 올려놓으며, 욕을 내지른다. “씨버럴 갈매기야.” 그는 그들 둘 다, 그가 우유부단한 자기혐오의 분노 속에서 어기적어기적 왔다갔다 갈팡질팡하는 고통에 잠긴 아내와 탐욕스러운 정부를 다 의미한다. 그가 진짜 바라는 바는 여자에 대한 욕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는 헤르마프로디테(자웅동체)가 되는 꿈을 꾼다.

나는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끌리기도 하고 반감도 들었다. 어떻게 엘리자베스 스마트는 그를 그렇게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는가?

그렇지만 그랜드 센트럴 역에 주저앉아 나는 울었다에서 스마트가 그의 애인을 황금빛 부정(不定)의 얼굴을 한 헤르마프로디테라고 묘사한 곳에 다 나와 있다. 그리고 그녀는 헝크러진 정사의 침대 이불보에서 공포와 혐오감으로 고함치는 소리를 아주 솔직히 듣는다. “넌 갈보야. 그저 갈보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우쭐한 유아론(solipsism)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그녀는 오직 그녀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바커가 그가 두려워하는 것만 보는 것과 꼭 같다.

죽은 갈매기는 바커와 스마트가 아직 그들의 고문 같은 성적인 흥정에 서로 매여 있을 적에 쓰였다. 서술자는 1945년에 글을 적고 있다고 주장하고, 세바스찬이라고 하는 아들에게 해주는 말로 되어 있다. 세바스찬은 스마트가 바커하고 사이에 가지고, 1945년 태어난 두 번째 아이 이름이기도 하고 같은 해 스마트는 그랜드 센트럴 역에 주저앉아 나는 울었다을 출판했다. 스마트는 그 다음 두해 동안 바커의 아이 둘을 더 임신을 한다. “내가 재채기를 할 때마다 아이를 밴다.”고 책의 서술자는 후회에 찬 목소리로 고백한다. 그의 생각에 일종의 저주였다.

그랜드 센트럴 역에 주저앉아 나는 울었다는 누가 봐도 고전이고 죽은 갈매기는 이의 잃어버린 반쪽이다. 한쪽은 다른 쪽이 없이 불완전하다. 누군가 이를 한 권을 묶을 생각을 하지 않는지 기이하다. 비록 누가 그런 무모한 자기집착의 과부하에 정력이 불끈불끈 솟을까마는.

 

 

'허튼짓, 헛짓 > Lost classics' 카테고리의 다른 글

Lost Classics 해롤드 이야기  (0) 2023.05.01
Lost classics_Treatise on style-Louis Aragon  (0) 2023.05.01
Lost classics 46  (0) 2023.05.01
Lost classics 37  (0) 2023.05.01
The saddest pleasure  (0) 2023.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