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5-31
(1945년 초판)
(1960년 개정판 )
황토색-여기저기 주워모은 주석
브라이즈헤드를 되돌아보며 브라이즈헤드 REVISITED
브라이즈헤드 REVISITED, Evelyn Waugh, 1945
프롤로그
내가 언덕 꼭대기에 있던 C 중대의 전열에 다다르자 나는 멈춰 서서 머물던 진영을 돌아보았다. 야영지는 발아래 이른 아침 잿빛의 옅은 안개 너머로 전체 모습이 그제야 눈에 다 들어왔다. 우리는 그날 떠날 예정이었다. 3 개월 전에 우리가 진군해 들어왔을 때는 그 장소는 눈으로 덮여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첫 봄의 이파리들이 움을 틔우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아무리 황량한 광경이 우리 앞에 놓여 있어도 이것보다 더 잔혹한 광경도 없으리라 두려움에 속으로 뇌까렸지만 지금은 반추해 보니 어떤 행복한 기억이 내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 사랑은 나와 적(군대) 사이에서 죽었다.
여기에 전차선은 끝났다. 그래서 글래스고에서 만취해 돌아오는 사람들은 종착역에 다다라 깨울 때까지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수 있었다. 전차 정거장에서 400미터 가량 군문까지 가는 꽤 되는 길이 있어서 사람들은 위병소를 지나기 전에 셔츠의 단추를 채우거나 모자를 바로 썼고 그 도로의 끝에서 콘크리트길은 풀길로 바뀌었다. 여기는 시의 최극단이었다. 여기서 다닥다닥, 비슷비슷한 주택개발단지와 극장은 끝나고 시골이 시작되었다.
진영은 꽤 최근까지 목초지와 경작지로 남아있던 들판에 서 있었다. 여전히 거기 구릉의 골 사이에 서 있던 농가는 대대 사무실 역할을 했다. 담쟁이덩굴이 한때 과실 밭의 벽을 이루던 벽을 떠받치고 있었고, 세탁장의 뒤에 있는 반 에이커의 훼손된 노목들이 그나마 과수원에서 살아남았다. 그 장소는 군대가 들어오기 전부터 파괴가 완연했다. 평화의 시기가 계속되었더라면 거기에는 농가도, 벽도, 사과나무들도 없었을 것이다. 헐벗은 진흙 둑 사이와 겉도랑 위로 이미 4 킬로미터가 깔린 콘크리트 도로가 지방정부의 도급업자가 아마 계획했을 배수 체계를 따라 나 있었다. 평화가 한 해 더 이어졌더라면 이 장소는 인접 교외지역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겨울을 보낸 헛간은 이제 파괴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길 저쪽으로는 사람들이 많이 빈정대는 대상, 겨울인데도 거의 나무들로 폭 감싸인 지자체 운영의 정신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철로 만든 철책과 웅장한 병원의 정문에 비한다면 대충 두른 우리의 철조망은 부끄러울 지경인 장소였다. 온화한 날이면 우리는 잘 가꾼 자갈 산책길과 산뜻하게 심어놓은 잔디밭을 어슬렁거리거나 폴짝거리고 다니는 미치광이들을 볼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투를 진즉에 포기한 적과의 행복한 협력자, 모든 의심은 해결되고, 모든 의무는 놓여 난, 한 세기 발전으로 이뤄낸, 누구도 부인 못할 법정상속인들이 안락하게 그 유산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가 행군해 지나가면 그 사람들은 철책 사이로 우리게 인사말을 외치곤 하였다. ‘내 침대 따뜻하게 잘 데워 놔. 친구. 머지않아 나갈 거야.’ 하지만 최근에 합류한 소대장인 후퍼는 특권 같은 그들 삶에 아주 못마땅해 했다. ‘히틀러라면 저들을 가스실에 처넣었을 텐데. 난 그 놈한테도 한두 가지 일쯤은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우리가 한 겨울에 진군해 들어왔을 때 나는 강건하고 희망찬 사내들의 1개 중대를 이끌고 왔었다. 우리가 황야에서 이쪽 항구 지역으로 이동을 하자 마침내 우리는 중동으로 가기 위한 통과 지역에 주둔하는 거란 말이 돌았었다. 날이 지나고, 눈을 치우고 연병장을 편평하게 다지기 시작하자 나는 그들의 실망이 체념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생선튀김 가게에 코를 킁킁대고 평화 시에 친숙한 공장의 사이렌 소리와 댄스홀 밴드 소리에 귀를 곧추세웠다. 쉬는 날에는 이제 그들은 거리 구석탱이에 구부정하게 앉아 장교라도 다가오면, 혹시 경례로 새로 사귄 정부 앞에서 체면을 구길까봐 슬슬 뒷걸음을 쳤다. 중대 본부에서는 사소한 사건들이 잇따르고 특별휴가 요청이 줄을 이었다. 여전히 투지의 반은 살았어도, 하루해는 꾀병환자의 칭얼거리는 소리와 침울한 얼굴과 불만에 차 멀뚱한 눈의 남자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 모든 수칙에 의거하여 그들을 북돋워야만 하는 나는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겠는가, 제 일도 스스로 거의 해내지 못하는 데? 여기에서 우리 중대를 훈련시켰던 대령은 승진을 해 우리 시야를 벗어났고 더 젊고, 덜 정이 가는 남자가 다른 연대에서 교차 배치되었다. 이제 이 어중이떠중이 중에는 전쟁의 발발과 지원하여 함께 훈련을 받은 한 무리에선 남은 사람이 없다시피, 이렁저렁 거의 모두 가버렸다. 몇몇은 의병제대하였으며, 몇몇은 다른 대대로 승진했고, 몇몇은 참모직으로 배치가 되고, 일부는 특수기관에 자원해 들어갔고 하나는 사격훈련연습장에서 잘못 해서 맞아죽었고, 한 사람은 군법재판을 받았다. 그들의 자리는 금방 징집병으로 채워졌다. 요즘에는 끊임없이 대기실에 라디오 소리가 들렸고, 맥주는 저녁식사 전부터 많이들 마셨다. 이는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여기서 서른아홉 살의 나는 이제 늙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면 나는 몸이 뻣뻣하고 나른해 진영 밖으로 나가기가 내키지 않았다. 내 전용 의자와 신문을 따로 몇몇 콕 집어 놓았고 저녁 전에 규칙적으로 진을 세 잔씩, 더도 덜도 없이 딱 세 잔씩 마셨으며 아홉시 뉴스가 끝나면 즉시 자러 갔다. 기상나팔 한 시간 전에 어김없이 깨어나 조바심을 내며 기다렸다.
여기서 내 마지막 사랑이 죽었다. 그 죽음의 방식에 특별난 것은 없었다. 어느 날, 이윽고 ‘이 진영에서 마지막 날, 기상나팔 전에 깨어 누워 있다가, 반원형 막사에서, 새까만 어둠을 바라보며, 다른 4 명의 막사 동료들의 깊은 호흡과 투덜거림 속에서, 그날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며, 화기 훈련 과정에 상등병 두 명의 이름을 올릴까? 나는 그날 일괄 돌아와야 하는 휴가를 너무 오래 넘기는 병사 최고 기록은 다시 깨게 될까? 후퍼가 지원 반원들을 독도법에 데리고 나가는 일을 내가 신뢰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어두운 시간에 누워 있으면서, 나는 내 속에 있는 무언가가, 오랫동안 앓던 일이, 조용히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가 턱 막혔다. 그리하여 결혼 4년에 접어드는 여느 남편처럼, 갑자기 더 이상 한때 사랑했던 아내에게 욕망, 애틋함, 찬탄도 남아 있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말동무를 해도 전혀 즐겁지 않고, 비위를 맞추려는 바람도 없고 그녀가 무얼 하든, 말하든, 생각하든 전혀 호기심이 일지 않고 일을 바루고자 하는 희망도 없고 이 재난에 대한 자책도 없는 그런 남편. 나는 이 모든 걸, 온갖 칙칙한 범주의 전쟁에 대한 환멸을 알았다. 우리, 군대와 나는 함께 이 일을 치루며 겪어왔다. 성가시게 졸라대는 구애로 만났던 우리는 차가운 법과 의무와 관습의 속박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지금까지 세월을 치렀다. 나는 온갖 가정비극의 장면은 다 선보였다. 사소한 말다툼이 자꾸만 늘기만 하였고, 눈물에 덜 흔들리고, 화해는 덜 달콤해지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급기야 이들이 쌓여 무관심한 분위기와 차가운 비난을 낳았고, 죄의 책임은 내 자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상대에게 물어야한다는 의구심이 확정으로 자랐다. 나는 그녀 목소리에서 마음에 안 드는 가락을 잡아채고 우려 속에 그를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나는 그녀의 눈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공허하고, 분개하는 눈빛을, 입 꼬리에 자리 잡은 이기적이며 매서운 입매를 알아챘다. 나는 그녀를 배웠다. 사람들이 허구한 날 3년 하고도 육 개월 동안을 같은 집에서 살아야 하는 여자를 알게 되듯이 그렇게 도가 텄다. 나는 그녀의 지저분한 방식들을. 그녀의 마력, 질투와 이기주의의 일상적인 반복과 그 기제, 거짓말을 하고 있을 때 신경질적인 손가락의 속임수를 배웠다. 그녀의 모든 주문은 이제 발가벗겨졌다. 한 순간 나의 어리석음으로 불가분의 관계라 맹세를 하였지만 이제는 불통의 이방인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동하는 이날 아침에는 나는 완전히 우리의 운명에 무관심했다. 나는 계속 내 일을 해나가겠지만 만부득이 하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하달 받은 명령은 배낭에 만기가 남은 하루치 배급식량을 챙겨 09시 15분에 인근 철도측선에 승차하라는 것이었다. 그게 내가 알아야 할 전부였다. 중대 부사령관은 소수 선발부대와 앞서 가버렸다. 중대 비축품은 전날 다 싸두었다. 후퍼는 전열을 점검하라는 특별임무를 하명 받았다. 중대는 07시 30분에 막사 앞에 포개놓은 잡낭을 지고 행군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동은 우리가 칼레의 방어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잘못 믿고서는 극도로 신바람이 오르던 1940년 아침 그 때부터 많았다. 이 후로 1년에 3번 혹은 4번 정도 씩 우리의 장소는 바뀌었다. 이번에 새로운 부대장은 비통상적인 ‘보안 정신’을 과시하고 있어서 우리는 우리 제복이나 수송 수단에 식별 배지들을 일일이 다 제거하는 일까지 해야만 했다. 그의 말을 빌면 ‘현역복부 환경에 가치 있는 훈련’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이런 여자 종군 민간인이 한 명이라도 저쪽 목적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게 발각되면 누설이 있었던 걸로 간주하겠’단다.
취사장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옅은 안개 속에 흩어지고 있었다. 야영지는 마치 고고학 발굴단이 훨씬 후세에 발굴을 해놓은 현장처럼 끝나지 않은 주택건설 기초체계 위에 겹쳐 무계획적인 지름길의 복잡한 미로들을 드러내며 누워있었다.
‘폴록 발굴지는 20세기의 시민-노예사회와 그들을 이어받은 부족 수준 무정부상태의 귀중한 연결고리를 제공한다. 여기 정교한 배수체계와 영구적인 고속도로 건설이 가능하였던 발달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가장 낮은 유형의 종족에 의해 괴멸당한 것으로 보인다.’
미래의 전문가들이 이와 같이 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중대선임하사관에게 인사를 했다. ‘후퍼 소대장 근처에 돌아다니던가?’
‘오늘 아침에 한 번도 못 뵈었습니다.’
우리는 해체된 중대 본부로 갔다. 병영 손상 장부를 완료한 뒤에야 거기 새로이 깨진 창문을 발견했다. ‘야간에 바람이 불었습니다.’ 선임하사관이 말했다.
(모든 파손 물품은 저렇게 갖다 붙이거나 ‘공병의 양동작전입니다.’라는 구실을 대었다.)
후퍼가 나타났다. 그는 머리를 가르마는 타지 않고, 앞이마에서 바짝 빗질해 넘긴 중부지방 액센트에 꾀가 얕은 젊은이였다. 그가 중대에 있은 지는 두 달이 못 되었다.
부대원들은 후퍼가 자신의 소임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고 그리고 편히쉬어 상태에서 그들을 개인적으로 ‘조지(근사한 놈, 자*)’라고 호칭을 하곤 하여서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거의 애정에 가깝다고 할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크게는 그가 온 첫날 장교식당에서의 일 때문이었다.
새로운 대령은 그 당시에 우리와 일주일도 지내지 않은 상태였고 아직 우리는 대령에 대한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대령은 대기실에서 서서 몇 순배 진을 마시며 약간 떠들썩하게 굴다가 처음으로 후퍼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저 젊은 장교는 자네 수하지, 안 그런가, 라이더?’ 그가 내게 말했다. ‘머리 좀 깎아야겠어.’
‘그렇습니다, 대령님.’ 내가 말했다. 정말 그랬다. ‘시행토록 조처하겠습니다.’
대령은 진을 마저 죽 마시고는 후퍼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어이쿠, 저 사람들 지금 우리한테 보내는 장교들 꼴이.’라고 다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후퍼는 그날 저녁에 대령에게 강박이 생긴 거 같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대령이 갑자기 아주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지난 연대에서는 젊은 장교가 저 꼴로 나타나면 중위이하 장교들이 빌어먹을 젊은 장교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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