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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짓, 헛짓/Bridgeshead Revisited

브라이즈헤드를 되돌아보며 04

by 어정버정 2023. 5. 7.

2012-6-7 

 

BOOK ONE

 

Et in Acardia Ego (나조차도 아르카디아(목가적 이상향)에 있다. 라틴어)

 

[1]

 

나 여기 와본 적 있어.’ 내가 말했다. 나는 전에 거기에 있었다. 세바스찬과 처음으로 20년도 더 전에 유월의 어느 구름 없는 날에 도랑은 터리풀로 뜨물 같은 빛깔에 공기는 여름 내음으로 진하던 날. 이상한 광채로 가득한 날이었다. 거기에 아주 자주, 또 온갖 여러 감정으로 드나들었지만 가장 최근의 방문인 지금 내 마음이 돌아가고 있는 곳은 그 첫 번째 방문이었다.

그날, 역시 나는 내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왔었다. 그때가 여덟째 주중이었다. (Eights Week: 옥스퍼드 대학 간 보트 경주가 열리는 4일간, 삼위일체 학기 다섯 번째 주에 열림) 옥스퍼드는 지금은, 리오네스(물 속에 잠겼다는 전설 속의 콘월의 변방)처럼 물에 잠기고 뭉개지고 회복불능이지만 아주 빠르게 범람해 들어오는 물길을 가지고 있는 옥스퍼드는 그 시절에도 여전히 에쿼틴트(부식 시킨 골 사이로 잉크를 바르고 찍어내는 부식동판화, aquatint)였다. 도시의 넓고 조용한 거리에는 남자들이 뉴먼의 날(24시간 진탕 맥주를 마시고 노는 날)을 보낸 사람처럼 걷고 말했다. 도시의 엷은 가을 안개, 도시의 회색 봄철, 도시의 드문 장관의 여름날, 그런 날처럼 밤나무에 꽃이 피고 종소리는 높고 청명하게 울러퍼지는 때면 도시의 박공지붕과 둥근 지붕은 천년 학식의 은은한 증기를 내쉬었다. 이런 탈속(脫俗)의 쉬잇 소리가 우리의 웃음소리에 같이 울려 나타나고 사이사이 끼어드는 떠들썩한 소리에도 즐겁게 옮아갔다. 여기, 여덟째 주중에는 불협화음처럼 왁자한 여자의 무리들이, 자갈돌 너머로, 계단 위로, 유람을 하고 즐거움을 찾고, 클라레 컵(적포도주에 브랜디·탄산수·레몬·설탕을 섞어 차게 한 것)을 마시고, 오이 샌드위치를 먹고 짐짓 백배는 강한 무리들이 재잘거리고, 펄럭거리며 다녔다. 강 근처에서 펀트배(네모 납작하여 삿대로 젓는 배) 삿대를 밀고 바지선에 우르르 떼로 몰려들고, 이시스 강(옥스퍼드를 흐르는 템즈강의 일부, 보트 경기나 펀트 배를 타는 강줄기)과 기이하고 경박한, 완전히 고통스러운 길버트-설리반식 우스갯소리 같은 옥스퍼드 유니언의 갑작스런 등장과 대학부속 예배실에서 울리는 기이한 합창의 효과음으로 인사를 받았다. 침입자들의 메아리는 온갖 구석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속한 대학에서는 메아리는 없었으나 몹시 지독한 교란의 본디 원천이 되었다. 우리는 무도회를 열었다. 내가 살고 있던 곳의 정면 사각 뜰에 바닥을 깔고 천막을 치고, 야자수와 진달래는 수위실에 층층이 쌓고, 그중 가장 나쁜 일은 자연과학과 관련이 있던 생쥐 같이 생긴 교수가 내 위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방들을 여자들의 휴대품 보관소로 빌려주고는 이런 개탄스런 잔인공노를 선포하는 공지 인쇄물을 내 오크(옥스퍼드 대학에 있는 두꺼운 오크로 만든 문을 그냥 오크라고도 한다고 함.)에서 육 인치도 못 미치는 곳에 걸어놓았다.

그 일에 대해 내 스카우트(학생들의 하인)보다 더 강하게 느낀 사람도 없었다.

숙녀를 대동하지 않은 신사들은 다음 며칠 동안은 가능한 한 식사를 밖에서 먹으라고 합니다.’ 그가 풀이 죽어 알려주었다. ‘안에서 드실 겁니까?’

아니, 런트.’

하인들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랍니다. 기회는 무슨! 전 숙녀용 휴대품 보관소 때문에 바늘꽂이까지 사야했습니다. 사람들이 무도회를 원하긴 원한답니까? 전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여덟째 주중에 전에는 무도회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기념무도회(Commem. ball 옥스퍼드 대학 트리니티 학기(여름학기) 끝나는 9번째 주, 방학이 시작되면 열리는 공식 무도회,)는 방학 중에 있으니 지금과 별개의 문제죠. 하지만 여덟째 주에는 없었다고요. 차나 강이면 충분하지 않기라도 하답니까.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다 이게 전쟁 탓입니다. 그런 일 없었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에요.’ 이때가 1923년이었고 런트에게는, 수천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들이  1914년에 있었던 때와는 결코 같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버릇대로 문 밖으로 나가며  반쯤 걸쳐 말을 이었다. ‘이제 저녁에는 와인이, 아니면 한두 명 신사 분들은 오찬에도 먹습니다. 하지만 거기엔 이유라도 있지요. 하지만 춤은 아닙니다. 모두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하고 같이 들어온 거예요. 그 사람들은 너무 늙고 아는 것도 없고 배우려고도 안했어요. 사실이라고요. 그리고 매소닉에 있는 유흥가에 춤을 추러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학생감들이 그들을 잡겠지요, 아시겠지만……이런, 세바스찬 경이 오셨습니다. 구해야 할 바늘꽂이도 있는데 이렇게 떠들고 섰어는 안 되지요.’

세바스찬이 들어섰다. 그는 비둘기색(연회색) 플란넬, 흰색 크레프드신(crepe de chine 얇은 올록볼록한 크레이프 비단)에 샤르베 타이(charvet 회사에서 생산하던 화려한 무늬의 비단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나는 우연히도 우표 무늬의 샤르베 타이를 매고 있었다. ‘찰스, 너희 대학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서커스라도 열려? 코끼리 빼고는 다 본 거 같다. 옥스퍼드 전체가 갑자기 괴상한 탈이라도 난 건지. 어제는 여자들이 바글바글 들끓던데. 넌 당장 위험을 벗어나 여길 떠야겠어. 나 자동차하고 딸기 한 바구니, 샤토 페이라게이 한 병 가져왔어. 이건 네가 이제껏 맛 본 그런 와인이 아냐. 그러니 아는 척 말고. 이 와인을 딸기하고 먹으면 천상의 맛이지.’

우리 어디로 가는데?’

친구한테.’

누구?’

호킨스라는 이름. 사고 싶은 물건을 보게 될 지도 모르니 돈도 좀 가져가. 자동차는 하드캐슬이라는 사람의 소유물이야. 내가 혹 사고로 죽으면 남은 차 조각들은 그에게 돌려줘. 나는 운전에 아주 능숙한 사람이 아니거든.’

문을 너머, 한때 수위실이 있던 겨울 정원 너머, 지붕이 없는 2인승 모리스-카울리가 서 있었다. 세바스찬의 테디 베어는 핸들에 앉아있었다. 우리는 그를 우리 사이에 앉혔다. ‘그가 토하지 않게 잘 돌봐줘.’ 그리고 차를 몰아 출발했다. 세인트 메리 교회의 종이 아홉시를 쳤다. 우리는 하이스트리트(시내 중심가)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조용히 자전거 페달을 밟고 오던, 검정 밀짚모자를 쓰고 흰 수염을 기른 사제를 칠 뻔하다 간신히 피하고, 카팩스를 가로지르고, 역을 지나 곧 보틀리 도로가 툭 트인 시골로 들어섰다.

이른 시간 아니지?’ 세바스찬이 말했다. ‘여자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도 내려오기 전에 그들끼리 하는 일을 아직 하고 있을 거야. 슬로스가 그들을 끌어들였어. 우리는 도주 중이야. 불쌍한 하드캐슬.’

누군지 몰라도 곤란하겠네.’

하드캐슬은 자신도 같이 오는 거라고 생각해. 슬로스가 그도 끌어들였거든. 흐음, 그에게는 열시라고 말해뒀는데. 그 사람은 우리 대학에 있는 아주 음울한 사람이야. 그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어. 적어도 내 느낌에는 그래. 그는 밤이나 낮이나, 항상 하드캐슬로만 살아갈 수 없을 거야. 안 그래? 아니면 그걸로 죽고 말걸. 하드캐슬은 우리 아버지를 안다고 하는데, 그건 불가능해.’

?’

아무도 우리 아빠를 몰라. 아빠는 사회적 나환자(배척자). 그 이야기 못 들었어?’

우리 둘 다 노래를 할 줄 몰라 안타깝다.’ 내가 말했다.

스윈든에서 우리는 간선을 벗어났다. 그리고 태양이 높게 올라앉았을 때 우리는 돌담과 마름돌로 쌓은 집들 사이에 있었고, 세바스찬이 경고도 없이 차를 확 돌려 좁은 길로 들어서며 멈춘 게 열한 시였다. 절로 그늘을 찾을 만큼 이제 날은 무더웠다. 느릅나무 덤불 아래 양들이 풀을 뜯는 둔덕 위에 우리는 딸기를 먹고 와인을 마셨다. 세바스찬이 장담한 대로 함께 먹으니 맛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두툼한, 터키산 궐련에 불을 붙이고 등을 대고 누웠다. 세바스찬의 눈은 그 위의 나뭇잎에 고정되었고, 나는 그런 그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청회색 연기가 어떤 바람의 어지럽힘 없이 나뭇잎의 청록색 그늘 속으로 솟아올랐고 담배의 달콤한 향은 우리 주위의 달콤한 여름 내음과 어우러졌으며 달콤한 황금색 와인의 몽롱한 향기는 손가락 한 마디 높이 잔디 위로 우리를 들어 올려 둥둥 E띄우고 있는 것 같았다.

금 항아리 묻기에 딱 좋을 장소야.’ 세바스찬이 말했다. ‘나는 내가 행복했던 모든 곳에 무언가 귀중한 물건을 묻어놓고 싶어. 그러면 내가 늙고 흉측하고 불쌍해지면 다시 돌아와 그걸 파내고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겠지.’

 

 

그 해는 대학입학시험이후 세 번째 학기였다. 하지만 나는 내 옥스퍼드 생활을 세바스찬을 처음 만난 날부터 친다. 이는 그 이전 학기 중간에 우연히 있었던 일이었다. 우리는 대학이 달랐고 출신 학교도 달랐다. 그가 어느 날 저녁에 우리 대학에서 술에 취하고 내가 정면에 면한 1층 방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내가 3년 혹은 4년 동안 대학교 생활을 하며 그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나의 사촌 재스퍼가 나에게 이런 1층 방의 위험을 경고했었다. 재스퍼는 내가 처음 올라왔을 때 혼자서 나는 상세한 지도가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는 내게 아무 충고 없었다. 게다가 항상 그랬듯이 그는 나와는 심각한 대화는 기피했다. 올라가는 날 2주가 안 남아서야 그는 대학문제에 대해 어쨌든 말을 꺼내었고, 그리고는 부끄러운 듯이 에둘러서 교활하게 말을 했다. ‘너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아테니움(런던의 클럽)에서 네 장래의 학장을 만났구나. 나는 불멸성에 대한 에트루리아인들의 관념에 대해서 대화를 원했는데 그 분은 노동자 계급의 대학공개 강의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를 원했지. 그래서 우리는 절충을 해서 너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에게 네 용돈이 얼마면 적당할까-냐고 물었다. 그가 ’1년에 3,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이상 주면 안 된다. 그게 대부분 남자들이 지니고 있는 전부다.‘라고 하시더라.’ 나는 비통스러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올라갔을 때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세상 어디 다른 곳에서도, 어떤 다른 시대에도 몇 백 파운드 남짓의 돈이 어느 쪽으로든 사람의 중요성과 인기도 그렇게 많은 차이를 만드는 곳은 없을 것이다. ‘나는 너에게 6백을 줄까 어쩔까 생각 중이다.’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가 기분이 좋을 때면 늘 그러듯이 그는 코를 약간 킁킁거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혹여 학장에게 이야기가 들어가면, 대놓고 불손하게 들리겠다 싶더구나. 그래서 나는 너에게 오백하고 오십을 줄 생각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감사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