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가깝다고 말하자면 대답 위를 (사실 등을 대고 납작 누워 있어도) 맴돌고 있다고 이를 딱 잡아 가려내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심판에 관한 중요한 일. 시간, 내 세대. 형편없는 내 드라이브들. 도시. 역사의 수수께끼, 글자 O. 성장. 균형. 동작…뭔가 일종의 그림이라도 드러날지 보기 위해 지도 위에 해리 골드의 여행들을 따라 그려봐야 하나 궁금했다. 대충 내 마음의 눈에, 이들은 치즈 샌드위치 반쪽을 따라가는 듯하였다. 나는 어딘가에서 그린글래스 부부가 그에게 뉴멕시코에서 좋은 유대식 델리카트슨은 찾을 수 있는지 물었다는 그의 말이 기억났다. 아니 어쩌면 골드가 그들에게 물었던가. 나는 폭탄 도해들이 일견 치즈 블린츠를 닮았음을 깨달았다. 매운 양념 계란, 속 채운 양배추들. 위장이 구르릉거렸다. 음식에 대한 생각을 그만해야 한다 깨달았다.
나는 대신 돈에 관해, 교환한 금액이며, 그 돈으로 무엇을 했나 생각하려 애썼다. 머레이 초티너가 이런 규칙을 가르쳤다. 상대방을 공격하며, 추문을 찾고 있을 때, 맨처음 돈에 관해 물어라. 하지만 여기 총합은 작았고 이 돈에 대한 증거마저 수상쩍었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진짜 돈을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판사와 검사, 법무장관, FBI 국장 뿐이었다. 배심원단들은 수수하긴 해도 수월할 정도로 봉급을 받았고, 대부분 증인들은 그러저럭 살아가지만 반면 로젠버그 부부는 이 무리 중에 가장 가난했다. 이게 아마 요점인가, 제로의 O. 그들은 손해 보는 작은 사업을 꾸렸다. 분명 그들 팬텀에 봉사를 무상으로 기부하고 있어서-진짜 광신도들. 그래, 나는 줄리어스의 사업 실페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때 나 자신이 냉동 오렌지주스로 그 길로 접어든 적 있었고 아버지는 일생 연속적인 실패들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팬텀을 위해 그들이 공짜로 일하는 일도 이해가 갔다-나도 엉클 샘을 위해 같은 일을 하리라, 비록 이런 일을 내게 결코 청하지 않아 기쁘긴 해도. 어떻게 그러겠나? 돈은 자존감이다, 그는 내게 직접 그런 말을 했다. 이해가 안 가는 바는, 그래도 로젠버그가 여전히 가난한 채로 남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가난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아니다. 그들은 차도 텔레비전도 없었다. 하이고, 내가 열한 살에 이를 즈음에 나는 돈을 벌고 있었다. 농장에서 콩을 따거나 아버지 가게에서 일을 하고, 주유를 하고, 햄버거를 갈고, 썩은 사과와 토마토를 골라내었다.-아버지는 내게 미국식 삶의 방식에 어떤 추상적인 수업을 해주지는 않았고, 단순히 내게 야채 선반을 넘기고서, 이를 채우라고, 채소를 순서에 맞게 정리하고, 이득을 취하라고 했다. 나는 힘든 일에 대해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보상도. 이제, 가장 단순한 느림보라도 주유할 수 있고 햄버거를 갈 수 있었고, 그래서 나는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분명 가난을 날조하고 있다고 어림잡았다. 그들 가난은 그냥 위장이었다. 틀림없이 비밀 은행계좌가 어딘가 있을 것이다-아마 폴란드, 그 나라가 뻔뻔스럽게 정치적 망명을 제안했으니까. 줄리가 막판에 물쓰듯 돈을 쓰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이런 말 한 사람은 FBI 라고 나는 생각한다-그는 옷을 사고, 사진을 찍고 비싼 식당에서 외식을 한다고. 패트를 데리고 우리 기념실에 비싼 식당에 나들이를 해야 하나 궁금했다. 코네티것에 내가 전해 들은 바로 좋은 멕시코 음식점이 하나 있었다. 한번은 멕시코 음식에 꼭 맛을 들이는 데 열을 올렸다. 왜냐면 이 따위를 먹는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이 너무나 많아서 먹는 버릇을 키워야 하는 족속의 그런 음식이었다. 패트는 아마 강변에서 생선을 먹기를 원할 것이다. 모기들은 모두 꼬여드는 곳, 아주 낭만적이다마다. 나는 언제나처럼, 잘 만든 훌륭한 햄버거면 족할 것이다. 그리고 맥아분유 파인애플 쥬스. 혹은 한 접시 코티지 치즈도. 나는 코티지 치즈 엄청 먹는데 배가 아예 터지도록도 먹을 수 있다. 그럭적럭 맛이 괜찮게 하는 나름 나의 요령은 위에 케첩을 얹는 것이다. 이는 할머니로부터 배웠다.
배가 부르르 끓었다. 나는 허리띠를 한단 늦추고, 빈속에 신트림을 하고, 제산제를 먹었다. 나는 이 일을 너무 오래 매달려 있었다고 생각했다. 조심하지 않으면 또 아프게 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일하지 않고도 어떻게 현재 그들 위치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일요일 골프코스를 벗어나 일에 접어든 순간 이후로, 맹렬한 기세로 계속 일했다. 샤워를 하기 위해 나는 클럽하우스에서 잠시 머무르지도 않았다. (물론 더 이상 공공장소에서 샤워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사람들에게 엉클 샘의 화신이 옷을 입지 않은 모습이 어떤지 보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율리어스 그랜트의 의견에 동의한다. 심지어 반바지나 잠옷차림이라고 해도. 나는 아이젠하워가 매일 아침 그의 시중에게 속옷 입는 일의 도움을 받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불필요한 전략적 위험처럼 보였다) 나는 곧바로 여기로 달려와 저돌적으로 로젠버그 사건, 재판, 배경, 개인 이력 및 주변 문제, 상소, 세계 문제에 미치는 영향, 모든 것에 대한 전면적이고 철저한 연구에 돌입했다. 이것이 학문적, 정치적, 운동 관련이건 또는 낭만적이건, 모든 프로젝트를 대하는 나의 방식이었다. 나는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찾아 몇 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조금이라도 짬이 나는 시간은 모두 보고서와 권고들을 연구하는 데 보내고, 알려진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흡수하려고 노력하고, 수백 번의 전화를 하고 과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철학, 정치 과학 또는 역사서를 읽는다. “강철 엉덩이”이라고 로스쿨에서 그렇게 불렸다. 우리 가족, 특히 어머니 쪽, 즉 퀘이커 쪽에서는 항상 열심히 일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면 항상 성과를 올렸다.
나는 그런 진력이 지금도 성과를 이룩하리라 생각했지만, 그 성과의 보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여전히 확신이 안 섰다. 물론 요즘에는 딱 한 가지밖에 생각나지 않았고, 아직 먼일 같았지만, 항상 눈을 뜨고 아무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한순간 부주의하거나 산만해져서, 발을 헛디디면 영원히 시선에서 벗어난다. 캘리포니아에서 나를 위해 마련해줬다고 한 그 기금처럼, 당시 나는 그것에 대해 거의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 일 때문에 거의 지워질 뻔했다. 시시한 세목이 당신을 만들 수도 망칠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이걸 너무 과하게 해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것은 그냥 하잖은 본보기 여흥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엉클 샘의 마음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매우 연극적인 것은 확실했다. 남동생이 큰 누나를 전기의자형을 시키는 드라마가 있다. 고아가 될 로젠버그 아이들의 암시적 비극; 유대인들이 유대인을 기소하고 판결을 하고 그 다음 부족적 신의를 저버린 일로 서로를 비난하는 흥미로운 볼거리; 기소된 범죄와 관련이 있든 없든 우리 시대의 많은 주요 문제들을 버무린 거의 바그너식 광범위한 기소문 발표; 이 드라마 전반에 걸쳐 선과 악의 세력 사이의 극명한 투쟁이라는 느낌… 그리고 거기에 덤으로 기소가 믿을 만하다는 가정 하에, 꽤나 괜찮은 수많은 스파이 이야기: 비밀 암호명, 인식 신호들, 비밀 투하 장소들, 탈출 계획, 신분 위장, 뇌물, FBI 감시팀과의 고양이와 쥐 술래잡기, 국경도주 모의들. 그러나 그것보다 더한 뭔가가 있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판사부터 아래까지 모든 사람들이 – 실제, 나를 포함한 정부 안팎의 사람들,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 연극에 휘말린 배우들처럼 행동했지만, 우리 모두 게다가 그냥 우리가 하고 있던 하고 있음을 십분 인지하고 있으며 동시에 더 높은 목적에 전념하여, 말하자면 더 큰 대본에 따르고 있기에, 다른 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로젠버그부부조차도 포용력 넓고 설득력 좋은 드라마적인 측면에 휩쓸려 사악한 “음모”와 세계적인 “테마”와 “설정된 무대”를 그들 편지에서 언급하고, 옳든 그르든, 그들에게 맡겨진 역할을 “명예롭게 위엄을 갖추고”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일도 있는데, 로젠버그 부부뿐만 아니라 이 사건에 관련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거의 같은 나잇대, 내 나잇대였다! 예를 들어, 여러 면에서 이 사건의 진정한 스타이자 영웅으로 떠오른 카우프만 판사는 2년 전 재판 당시 40세 생일 인생 고비를 넘기고 있었을 것이다. 소년 판사, 나는 그를 존경 안 할 수 없었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을 빠른 출발 주자라고 생각했고, 내 인생에서 했던 많은 부분에서 ‘역대 최연소’였다. 하지만 나조차도 어빙 카우프만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는 열여섯 살에 포드햄 법학대학원에 입학했고, 너무 어려서 법학대학원을 졸업해서 변호사 시험에 응시할 수도 없었다. 내가 과거 휘티어 대학 톰 뷸리 사무실 서재의 먼지를 털고 음주 사건, 이혼, 교통이니 좀 스런 일에 똥줄 빼는 동안, 그는 이미 5년 넘게 굵직한 사건들로, 뉴욕시 중심부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는 지방검사보가 되어 강력계담당 톰 듀이를 돕고 “소년 검사”로 명성을 얻었다. 그 시대 로이 콘 Roy Cohn같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성공하는 게 당연하다. 나는 1946년에 공직에 출마하라는 요청을 받기 전까지는 국가 정치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카우프만은 이미 1939년(14년 전!)에 연방 판사를 선출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F.D.R(루즈벨트)에게 개인적으로 불려갔으며, 내가 “재직 중인 가장 새파란 초짜 하원의원”으로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그는 법무장관 톰 클라크의 특별 보좌관이었고, 에드거 후버와는 서로 이름 부르는 사이에, 모든 신문들에 큰 규모의 논평기사들이 실렸다. 1949년 해리 트루먼이 그를 연방 판사로 임명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39세였으며 미국에서 가장 어린 연방 판사였다. 그리고 이제 그는 미국 대법원 진출의 말이 크게 돌고 있었다. 그의 친구 톰 클라크, 트루먼의 궂은 일 담당꾼은 이미 거기 앉아 있었고, 그를 지지하고 추진해 나갈 것은 명약관화하였다. 글쎄, 내가 지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그가 아직 지명하지 못했다면, 유대인 자리가 비어 있다고 친다면, 그는 유력한 후보가 될 것이다. 내가 남태평양에서 뱃멀미와 모기와 싸우고 있는 동안, 카우프만은 사법 변호사로 일하면서 밀턴 벌리처럼 유복한 고객으로 연간 10만 달러를 받으며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때때로 느꼈던 분노를 아마 극복해야 하리라. 하지만 만약 내가 진정한 화신이 된다면 그런 모든 감정은 클라크 켄트의 안경처럼 약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확실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판사였으며 동시에 야당에도 인기 있는 선택이었다. 교황 카우프만, 전미 기독교 정교회 유대인, 법률 파트너가 저명한 공화당 지도자인 태머니 홀 민주당원, 고결한 마음에 피도 눈물도 없이 강직함, 뉴욕포스트가 어느 헤드라인 기사에서 그에 대해 한 말처럼 “어느 날은 급진적”이었다가 “다음 날은 반골보수주의자” 타고난 사람이다. 이 신중한 균형은 그의 특별한 재능이었다. 그는 엄격하면서도 동시에 관대해 보일 수도 있고, 학문적이면서도 세속적이며, 치열하면서도 고요하고, 혁신적이면서도 전통적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는 심지어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 그리고 하루에 정확히 두 개의 시가를 피웠다.
로젠버그 재판에서 이 재능은 그가 적법 절차 및 공정한 행동과 관련하여 모든 올바른 조치 취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실제로 사건 진행을 엄격하게 통제를 지속하는 데도 도왔다. 어빙 세이폴이 허우적거릴 위험에 처했다 싶을 때마다 카우프만은 불쑥 증인에게 효과적이며 따끔한 질문을 던지고 검사를 다시 궤도에 올려놓았으나 블로크가 반면에 너무 뻔한 온갖 실수들를 저지를 때는 그는 냉정하게 침묵을 지켰다. 블로크가 뭔가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정점에 도달하기 시작하려고 할 때마다 판사는 퉁명스러운, 때로는 조롱 섞인 훼방을 놓으며 기를 빼버렸고, 블로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는 짧은 휴정으로 검찰측 국면을 고조시키는 방법, 유대인으로서 부활절 정신을 법정에 도입하는 방법, 반항적인 변호인을 비참한 침묵으로 몰아넣는 방법을 알았다. “법정에서 보통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나에게 가르치려 들지 마시오! 나는 이런 식으로 이 법정을 운영하고, 법정 운영하는 방식은 나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당신에게서 더 이상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소!” 그러다가 로젠버그 부부가 공산주의 문제에 관해 증언을 거부하던 날이 왔다. 아무런 도움없이 사정은 더없이 나빴다. 하지만 같은 건물의 위층에서 조 아도니스와 프랭크 코스텔로 같은 갱스터들도 키포버 상원 범죄 수사 위원회 앞에서 불리한 증언 거부를 하였고, 카우프만은 딱 봐도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심리를 중단하고, 법원을 다 비우고서, 배심원들에게 머물 것을 요청하고, 오래된 뉴햄프셔 떠버리, 토비 상원의원을 초대해 내렸다. “여기 와서 당신들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카우프만이 그를 맞이하러 급히 벤치에서 내려오는 동안 토비가 그들 모두에게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들 위층에 쓸 수도 있었을 텐데요.” 누가 연결을 놓칠 수 있을까? 또 한 번은 세이폴이 도청 가능성에 대한 블로크의 질의에 곤란한 처지에 놓이자, 그를 구출해준 사람이 카우프만이었고 - “터무니없어요!” - 심지어 동시에 배심원들에게 미국 검사가 말한 것은 무엇이든 반박불능, 확고한 사실일 거라고 상기시키고, 질문에 실제로 답변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흐리기까지 했다. (물론 블로크가 도청에 관해 옳았을 수도 있지만 누구도 이런 핵심적인 사례가 한갓 기술적인 문제로 본질이 흐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마도 블로크 조차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게다가 카우프만은 도청을 좋아했다. 13년 전에 그는 연방 사건에서 도청을 사용한 관할 구역 내 첫 번째 검사였다. 작은 휴대용 축음기로 내용을 틀었고 법정에서 큰 파문이 일었고, 심지어 피고인측도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려고 모여들었다.) 그는 연극 감독 마냥 배우들의 자존심을 고양시키고 무대 상연과 해석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법을 잘 알았고, 한편 사실 모든 줄을 잡고 배후조종하였다. 환상적으로 매끄러운 연기, 블로크 자신이 결국에는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외(뻘짓) > the Public Burn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public burning p124~ (0) | 2024.01.01 |
---|---|
the public burning p120~ (0) | 2023.12.31 |
A little Morality Play for our Generation p111~ (0) | 2023.12.30 |
the public burning p105~ (0) | 2023.12.27 |
the public burning p101~105 (0) | 2023.12.26 |